누가 그녀들에게 돌을 던지랴.
마흔한 살 그녀의 이야기
회사에서 '부장님'이라 불리는 J는 여덟 살 난 딸이 있는 '워킹맘'이다. 같은 회사 팀장인 그녀의 남편은 일주일에 다섯 번 회식이 있다. 회사 일이 바빠 육아휴직 한 번 못 써보고 7년이 훌쩍 지났지만, 다행히도 친정 엄마가 집에 들어와 살며 아이를 돌봐준다.
그래도 엄마의 역할은 오롯이 그녀의 몫이라, 틈틈이 휴가를 내고 아이 학원을 등록하거나 학부모 참관 수업에 간다. 회사에 출근해서도 종종 피자나 햄버거를 집으로 주문해주고, 아이 선생님과 상담 전화도 해야 한다. 퇴근을 하고 최대한 빨리 집에 가면 저녁 8시쯤이다. 이미 아이는 친정 엄마와 저녁을 먹은 후다. 회식이나 야근이라도 할라 치면 아이가 잠든 후에야 집에 들어갈 수 있다.
사람들은 그런 그녀의 회사를 '여자가 다니기 좋은 직장'이라 말한다. 영 틀린 말은 아니다. 다른 대기업에 비하면 연차를 쓰기가 말이 안 되게 어려운 것도, 군대 문화가 심한 편도 아니니까. 사내 여직원 비중도 거의 절반에 가깝고, 특히 그녀의 팀은 팀원 대부분이 여성이다.
그렇다고 눈치를 보지 않고 엄마 역할을 수행해도 된다는 의미는 아니다. '아줌마 직원'을 쌍수 들고 환영할 회사는 없다고 보는 편이 편하겠다. 연차를 못 쓰는 것은 아니지만 아이가 아프기라도 하면 며칠 연달아 쉬어야 하니 눈치가 보인다. 회사에 그 많은 여직원 중 임원은 단 한 명도 없고, 몇 안 되는 팀장들도 미혼이거나 아이가 없는 경우가 많다. 그녀의 팀에도 '엄마'는 그녀 한 명 뿐이다.
회식 자리에서 술을 많이 마신 날이면 그녀는 비틀비틀 걸으며 말한다.
회사 10년 넘게 다니면 안 울 것 같지?
근데 이렇게 회식하고 집 들어가서
애 얼굴 보면 눈물이 펑펑 나.
나는 그래서 자주 울어.
회식 다음날이면 그녀는 곱게 화장을 하고 아무렇지 않은 듯 출근을 한다. 여느 때와 같은 얼굴을 하고.
선택을 요구 받는 워킹맘.
사람들은 세상에 두 종류의 워킹맘이 있다고들 한다.
Type A. "나는 애 키우면서 회사 다니는데 당연히 나를 배려해줘야지. 나중에 우리 애가 커서 너희 연금 내주는거야."형
Type B. "회사는 개인 사정 봐주는 곳이 아니니까 워킹맘이라고 유난 떨면 안 돼. 나만 애 키우는 거 아니잖아."형
J는 전형적인 Type B다. 웬만해선 회식에 빠지지 않고, 야근에 몸 사리지 않으며, 업무 능력도 훌륭하다. 덕분에 특진까지 해서 마흔도 되기 전에 부장이 되었다. 심지어 예쁜 외모에 유머 감각까지 갖췄으니 회사에서 인정받지 못할 이유가 없다. 그리고 그런 그녀가 부장 4년 차가 되도록 팀장 제안이 없었을 리 없다.
그러나 그녀는 더 욕심내지 않기로 했다. 책임이 커질수록 회사에 쏟는 시간이 길어질테니까. 아이에게 내어 줄 수 있는 시간은 짧아질테니까.
남편은 본인이 아플 때만 쉬면 되지만, 그녀는 본인이 아파도, 딸이 아파도, 친정 엄마가 아파도, 출근을 못 한다. 아이 등하교는 친정 엄마에게 맡길 수 있지만, 졸업식 입학식은 직접 가야한다는 욕심까지 버릴 순 없다. 그래서 그녀는 회사에서 '조금 덜 잘나기로' 했다.
회사는 아니라고 하겠지만, 그녀는 아이와 승진 중 하나를 택하도록 요구 받았다.
아이가 그녀에게 물었다. 왜 아빠는 팀장인데 엄마는 아니야? 그녀는 대답했다. 엄마도 팀장 하려면 아빠처럼 매일 술 마시고 새벽에 들어와야 하는데, 그래도 괜찮아? 아이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아니, 그건 싫어. 엄마 그럼 팀장 하지마.
잘나기를 포기한다는 것
덜 잘나기로 마음먹는다는 것은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다. 30년 넘게 어딜 가나 똑똑하다고 인정 받던 '알파걸'이 자신의 업무 능력과 업무량에 관대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본능적으로든 습관적으로든, 더 잘하고 더 인정받으려 애쓰는 것이 익숙할 것이다.
이들이 엄마가 되었다고 해서 갑자기 '나는 엄마니까 일은 좀 못해도 돼'라고 생각하게 되지는 않는다. Type A의 워킹맘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는 얘기다. 그런 점에서 Type A는 거의 허상에 가까워 보인다. 그 정도 마인드 세팅이라면 그녀들이 워킹맘이라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원래부터 책임의식도 열정도 없는 인물이라고 보는 편이 맞겠다. 그것도 아니라면 워킹맘의 상황을 조금도 이해하고 싶어하지 않으면서 그들을 무책임하다고 평가하고자 하는 이들의 자의적인 해석일지도 모른다.
덜 잘나기로 한 워킹맘들은 이런 시선까지 감당해야 한다. 몇 안 되는 여성 팀장들과 비교 당하면서.
그녀들은 의지 박약이 아니다
회사에서 워킹맘의 입지는 의지의 문제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여자 팀장들, 여자 임원들도 얼마든지(도대체 어디에?) 있지 않느냐고. 그 사람들처럼 의지를 가져보라고.
그러나 커리어 우먼이 엄마가 되는 순간부터, 그녀들은 얼마나 많은 선택의 순간을 마주해 왔는가. 출산 휴가는 얼마나 쓸 것인지, 육아 휴직 얘기를 어떻게 꺼낼 것인지, 아이를 누구에게 맡길 것인지, 분유는 얼마 짜리를 먹일 것인지, 유치원은 어디에 보낼 것인지. 나의 시간을 아이보다는 커리어에 투자하는 것이 최선인지.
유리천장 아래에 주저 앉아버린 그녀들은 더이상 올라가기가 싫어져서 그런 것이 아닐 것이다. 다만 마지막 질문에 대한 선택이 달랐을 뿐이다. 그러니 덜 잘나기로 한 엄마라고 해서 의지 박약인 것이 아니고, 커리어를 택한 엄마라고 해서 무정한 엄마인 것도 아니다. '워킹대드'는 당연한데 '워킹맘'은 왜 워킹맘이라 규정 당하며 Type A인지 B인지 분류되어야 할까.
마무리
함께 떡볶이를 먹는 내내 아이의 영어 학원 고민을 늘어놓는 J를 누가 토닥여줄 수 있을까. 수고하셨어요, 라고 내가 감히 말해도 되는걸까.
명심해야 할 것은 이것이 그나마 '대기업 부장님' 워킹맘의 이야기라는 사실이다. 친정이나 시댁이 도와주지 못하면, 혼자 있을 아이를 학원에라도 보내거나 누군가에게 맡길 소득 수준이 아니면, 함부로 휴가를 낼 수 있는 회사가 아니면, 이마저도 배부른 얘기일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