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어난 곳과 지금 사는 곳
누군가에게 태어난 곳과 지금 사는 곳을 물어보면 그 사람에 대해 조금은 알 수 있다고 한다.
태어난 곳은 태어나면서 정해진 곳이고, 어른이 된 사람은 자신이 사는 곳을 정할 수 있으니 말이다.
인생을 살면서 하게 되는 수많은 크고 작은 결정들이 모여, 지금 내가 여기에 산다.
내가 태어난 곳은 한국 인천, 지금 사는 곳은 독일 베를린 노이쾰른이다.
헤이그에서 공부를 마치고 베를린에 처음 인턴을 하기 위해 도착했을 때, 친구가 거의 없었다. 헤이그에서 베를린으로 이주하는 친구들이 3명이나 더 있었지만, 친구들은 한 2-3주 늦게 도착했다. 당시 헤이그에서 플랫 메이트였던 러시아에서 온 젊고 똑똑한 친구는 베를린에 가면 꼭 Meetup에 나가 보라고 했다. 온라인 커뮤니티 같은 것인데, '베를린에 새로 온 사람들'과 같은 테마로 장소와 시간을 정하고 모임을 갖는다. 친구는 어색해도 처음 3분 정도만 딱 참으면 시간이 언제 갔는지도 모를 거라고 했다. 정말 그랬다. 어색함을 끔찍하게 싫어하는 내가 지금 생각해도 참 용기 많이 냈던 것 같다.
그날 만난 친구들 중에 베를린에 온 지 얼마 안 되고, 처음으로 Meetup에 나온 친구들이 있었는데, 그 친구들과 지금도 꾸준히 모임을 갖고 있다. 우리는 독일, 스리랑카, 영국, 미국, 한국 이렇게 다양한 국가들의 20대 후반-30대 초반 여성들이었고, 모임에 친구의 친구들이 늘어나서 이제 폴란드와 아이랜드까지 추가되어 더욱 인터내셔널 해졌다. 우리 중 아무도 베를린 출신은 없고, 이 시대에 베를린에 살고 있으니,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닮아있다.
각자의 속도에 맞춰 삶을 살아가는 우리는 서로의 다름을 존중한다. 시간이 흘러 독일인과 결혼을 한 친구, 베를린에서 만난 그리스인 남자 친구와 아기를 낳은 친구, 결혼 10년 차에 딩크족이고 나에게 독일 힙합을 소개해준 친구, 아직도 클럽을 열심히 다니지만(초반에는 우리 모두 같이 다녔다) 독일어를 제일 빨리 마스터한 똑똑한 저널리스트 친구, 여자 친구가 있는 것을 이해해주는 남자 친구가 있는 친구, 오픈 릴레이션쉽을 시도하는 친구 등 달라도 너무 다르다.
우리는 모두가 좋아하는 브런치를 먹으며 다르기 때문에 더 궁금하고 흥미로운 서로의 모험을 공유한다.
다른 도시에 살다가 이사 온 사람들이 입을 모아 하는 말은 베를린의 삶의 속도가 자신에게 제일 잘 맞아 여기에 정착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한국에 다녀올 때마다 느낀다. 항상 바쁜 일정으로 달리다가 비행기에 오른 탓도 있지만, 베를린에 오면 왠지 모르게 마음이 놓인다. 걸음이 빠른 사람들을 따라 허겁지겁 걷다가 혼자 여유롭게 걷는 느낌이다.
베를린의 묵직한 고요함이 좋다. 하루 일과를 마치고 구멍가게에서 1유로에 시원한 맥주를 사서 예쁜 노을을 보면서 노다 거리는 여유로움 같은 것이 소중하다. 내가 지금 사는 곳이 나를 말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