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에서 외국인과 말해야만 영어를 하는 건가요?
"독일로 유학 가세요?"
"남자 친구가 이탈리아인이신가 봐요?"
"너 뭐냐? 이번에는 스웨덴어야? 거기 가서 살게?"
외국어를 하나씩 배울 때마다 한 번도 빠지지 않고 들어 본 이야기다. 물론 영어도 마찬가지다. 영어에 관해서는 이 언어가 전공이 되고 업이 된 이후로는 크게 묻는 사람은 없었지만 그 전에는 (그렇다, 사실 처음부터 영어가 전공이자 내 인생의 공식적인 방향은 아니었다.) 토익 시험은 절대 치지도 않으면서 영어 회화 학원은 징그럽게도 꾸준히 다니고, 서점 가서 괜히 원서 코너를 어슬렁거릴 때에도 친구들은 무슨 영어 공부를 그렇게 계속하냐며 궁금해했다. 그리고 어떤 언어든 간에 그 궁금증의 시작은 하나로 모아졌다.
"쓸 일도 없는 걸 왜 배워요??"
즉, 그 나라에 나가서 살거나 공부하거나 애인이나 배우자가 그 나라 사람도 아닌데 왜 그렇게 애인처럼 그 외국어에 집착하고 자꾸 배우는 거지? 이유가 없잖아, 이유가. 이걸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하나 망설이다 결국 내뱉었던 핑계라고는 참 객관적인 것 같으면서 마음에 들지 않았던 네 단어, [자기만족] 혹은 이건 좀 그래도 나으려나 싶은 [취미] 정도였다.
특히 독일어 같은 경우에는 한국에서 독일어를 배울 때에 같은 수업의 학생들은 대부분 당장 독일어권 나라로 유학이나 취직을 위해 언어 성적과 공부가 급했던 친구들이었다. 그러다 보니 음악이나 미술, 공대생, 이과생 등 외국어 공부와는 크게 인연이 닿지 않았을 케이스가 많았다. 즉, 즐기면서 독일어를 배우러 오는 친구들은 아니었다. 그들에게 약간 나는 신기한(?) 케이스였을지도 모르겠다.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외국어를 배우러 온 수업에서 이 외국어가 좋아 배우러 온 경우가 희귀 케이스가 되어 버리다니!
다행히(?) 런던에서 저녁 수업으로 들으러 다녔던 이탈리아어 초급반에서는 같은 반 사람들이 모두 이탈리아가 혹은 이탈리아어가 좋아서 배우러 온 사람들이었다. 물론 지금 당장 이탈리아어를 쓸 기회가 있는 건 아니었지만, 나중에 휴가를 가거나 아니면 좋아하는 이탈리아 음식에 대해 좀 더 많은 책을 읽어보고 싶어서이거나 하는 이유가 대다수였다.
오늘 다루고 싶은 이야기는 외국어 공부에 대한 열정, 랭귀지 덕후, 이런 것보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외국어를 쓸 일'이 대체 무엇인지, 외국에 나가서 현지인과 직접 이야기를 나누는 것 외에는 정말 외국어를 쓸 일이란 없는 것인지 같은 (또 뜬금없고 개인적인) 궁금증이다.
토익 공부를 한다.
점수를 내서 취직을 하기 위해.
영어 단어를 외운다.
토플이나 아이엘츠에서 점수를 조금이라도 더 받기 위해
외국인 선생님과 회화 공부를 한다.
외국 거래처 담당자와 미팅을 문제없이 하기 위해.
이르게는 수능 시험 준비부터 다들 몇십 년 넘게 영어라는 놈을 부여잡고 살고 있다. 이유는 간단하다. 필요하니깐. 쓸 데가 있으니깐.
성적을 내야 하고, 점수를 내야 하고, 면접도 보고, 미팅도 해야 하니깐.
하지만 이런 당장 눈에 보이는 결과물을 목표로 하는 경우가 아님에도 외국어를 배우는 사람은 많다. 그리고 많은 경우가 '외국어를 배우는 것이 좋아서'가 그 이유일 것이고 아마도 한 번 이상은 '쓸 일도 없을 텐데 왜 그걸 배우냐'라는 질문도 받아 봤을 것이다.
하지만 과연
외국에 나가서 혹은 외국인과 직접 대화를 나누거나 이메일을 주고받거나 하는 것이 아니면 지금 내가 공부하고 배우고 있는 이 언어는 정말 쓰일 일이 한 군데도 없는 걸까? 당장 내가 미국이나 독일, 좀 더 멀리는 러시아나 스페인으로 날아가서 입 밖으로 이 말을 내뱉을 용무가 있는 게 아니라면 정말 내 노트 위에 빼곡히 필기된 이 외국어 문장들은 '쓰일 일이 없는, 당최 왜 배우는지 모르겠는' 의미 없는 행위인 것일까?
1. 내가 관심 있는 분야의 최고 전문가가 어느 유명한 잡지에 기고한 글을 번역가의 도움 없이 혼자 읽을 수 있다.
2. 내가 좋아하는 배우나 가수가 그가 나고 자란 나라의 티브이 방송이나 잡지에서 인터뷰한 내용을 읽거나 들을 수 있다.
3. 좋아하는 작가나 인기 있는 소설을 읽음으로써 글쓴이의 곁에 한걸음 더 다가간 것 같은 성취감도 느낄 수 있다.
4.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실생활에서 사용해 본 적 없는 요상한 글자와 소리의 의미를 이해하고 더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보고 들을 수 있다.
위의 예는 모두 방구석에 혼자 처박혀 앉아 원서를 읽거나, 문법책을 보거나 인터넷 강의 등을 들으면서 할 수 있는 일이다.
가만히 잘 살펴보면, 대부분 말하거나 외국어를 씀(writing)으로써 텍스트를 생산해내는 행위보다 읽고 들어서 그 언어를 받아들여 이해하는 경우가 많다. 이것들이 대부분 혼자서 외국어 공부를 할 때 먼저 습득할 수 있는 능력이기도 하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당장 외국에 나가 공부하고, 외국인들과 유창하게 의사소통하며 지내고 있는 사람들에 비해 나의 영어와 나의 외국어는 아무 발전을 하지 못하는 것 같고 제자리걸음만 하고 있는 것 같아 보인다. 아직 제대로 쓰고 있지를 않으니 제대로 맞는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확인할 길도 없는 것 같다.
그렇게 조용히, 꾸준히 갈아둔(?) 나의 외국어는 저기 저 멀리에서 쏼라쏼라 이야기하고 있는 저 사람의 외국어보다 못한 것일까? 뒤처진 것일까?
그래서 쓸 일도 없는데 괜히 배우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걸까?
이쯤 되니 지난여름 런던의 어느 썸머 스쿨에서 여러 나라에서 온 어린 학생들과 치렀던 전쟁 이야기를 또 꺼내야 할 것 같다. 그때 가르쳤던 대부분의 아이들은 유럽 출신이었는데 단 한 주, 중국에서 온 팀을 맡은 적이 있다. 우리나라로 치면 중학교 1-2학년 정도의 남녀 학생들이었는데 이 중국 학생들만 골라 맡은 것이 아니라 기존의 다른 유럽 친구들과 중국 친구들이 한 데 섞여 있는 반을 맡아야 했다.
들어간 수업 레벨은 다양했다. 아직 제대로 된 문장 하나를 구사하는 것도 힘든 레벨, 이건 뭐 전 세계 모든 친구들이 다 내 친구야 같은 쏼라쏼라 고급 레벨, 그리고 태어나서 처음 만나 본 외국 친구들이 서로서로 너무나도 신기하고 물어보고 싶은 것이 많아 잔실수는 많지만 영어라는 언어를 사용해 신나게 서로 알아가는 중간 레벨도 있었다.
내게 기억에 가장 남았던 건 이 중간 레벨이었다. 학교에 들어온 지 3주는 넘었겠다 역시나 에너지 넘치는 남부 이태리 친구들과 이 그룹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경계심을 내려놓지 못한 중국 친구들이 인원수로는 반반 정도 섞여 있었다.
흔히들 알려진 민족성인 건지, 고정관념 탓에 그렇게 보였던 건지 인원수는 같았으나 이미 수업의 분위기와 주도권은 이태리 학생들이 쥐고 있었다. 2인 액티비티를 시켜도, 그룹 활동을 시켜도 뭐든 큰 목소리 내는 건 이 이탈리아 친구들이었다. 물론 그 큰 목소리가 내뿜는 영어가 완벽할 리는 없다. (그렇지? 너희도 배우러 왔으니깐?ㅋㅋ)
하지만 역시 동서고금의 진리 : 목소리 큰 놈이 이기는 법. 수업이 절반 이상 지나고 나니 이미 병아리 티쳐의 눈에는 이 왁자지껄 이태리 친구들보다 시키지 않으면 절대 말하지 않고 조용한 중국 친구들의 실력이 좀 더 뒤처지는 걸로 보였다. 하지만 또 내 뒤통수를 인정사정없이 휘갈길 망치의 출연 순간이 왔으니, '학교에서 학생들은 시험을 꼭 봐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각자의 생각을 적어서 읽어 보게 시켰더니 우리 똥꼬 발랄 이태리 학생들은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본인들이 쓴 걸 (문법 다 틀림, 구성 단조로움) 교실이 떠나가라 쩌렁쩌렁하게 읽었다. 뭐, 아주 기특하다고 생각했다. 영혼 담아 물개 박수도 쳐줬고.
그렇게 세 명 정도 이태리 친구들이 읽고, 수줍어서 막 교실 안에서 사라져 버릴 것 같은 그런 중국 여학생이 자신의 작문을 읽을 차례가 됐다. 처음부터 끝까지 목소리는 역시나 그 유명한 '개미 기어가는 소리까지 들릴 것 같은' 소리였다. 하지만 그 내용은 달랐다. 사용한 단어, 문법, 문장의 구조까지 앞의 이태리 친구들과는 레벨이 달랐다. 정확한 문법을 사용해 서론 본론 결론 조리 있게 미니 에세이를 훌륭하게 준비했다. 이 친구뿐이 아니었다. 그다음 학생도, 그다음 학생도. 대부분의 중국 학생들은 수업 내내 보여줬던 소극적인 태도와 대비되는 훌륭한 작문 실력을 보여줬다. 그리고 목소리에 자신감이 없고, 모국어 특유의 억양이 조금 묻어났을 뿐, 이태리 친구들보다 단어를 발음하는 규칙도 정확히 알고 있었다.
저 멀리 동양에서 그 유명한 주입식 문법 교육을 받고 온 이 친구에게서 정체 모를 동질감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이들의 문법과 작문 실력을 보기 전에 눈으로 관찰한 수업 태도만으로 이미 나는 그들의 실력을 가늠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국인들이 고질적으로 가지고 있는 문제 중 하나라면 역시 "읽고 쓰는 건 어떻게 하겠는데 말하는 게 참 안 되네요!" 정도가 되겠다. 영어 원서를 독해하거나 문법 문제를 맞히거나 가끔은 간단한 미니 에세이를 써내라고 하면 어떻게 하겠는데 외국인들 앞에서 영어로 말을 하라고 하면 그 자신감은 무한대로 내려간다.
위에 예를 든 이태리 친구들과 중국인 친구들의 이야기로 잠깐 돌아가 보자. 저 상황에서 과연 나는 어느 한쪽의 그룹이 다른 한쪽보다 영어 실력이 앞서거나 떨어진다고 평가할 수 있었을까? 외국인 친구 앞에서 말은 거의 하지 못했지만, 문법적인 실수가 거의 없는 작문을 해낸 중국인 친구들이 영어를 더 못한다고 말할 수 있었을까?
외국에 나가 지내고 공부하는 (특히) 한국인들의 원서 독해 실력은 생각 외로 어마어마하다. 그리고 학창 시절부터 장착한 그 문법력은 영어 티칭을 업으로 하는 원어민들을 제외하면 네이티브도 제칠 정도다. (이건 진짜다. 내가 그랬다. 한국에서는 문법 쓰레기였던 내가 셀타 수업에서 문법의 여왕이라고 불릴 정도였으니..)
하지만 오늘도 극복 못하고 있는 우리 모두의 고질병 : 읽고 쓰는 건 되지만 말을 하지 못해 한없이 내려가는 그 자신감이다. 물론 외국어든 무엇이든 자신이 취약한 부분이 늘 더 크게 보이고 다가오는 건 당연하다. 하지만 본인이 할 수 있는 것을 뒤로한 채 영원히 극복되지 않을 것만 같은 그놈의 스피킹만 바라보며 '난 영어를 못해.', '내 영어는 아직 멀었어.'를 외칠 필요가 과연 있을까?
외국어를 공부하면서 가장 쉽게 평가받고, 가장 쉽게 발전의 양상이 보이는 것이 스피킹인 것은 맞지만, 내 영어의 실력을 가늠하는 유일한 척도가 스피킹인 것도 아니다.
내가 그렇게 공을 들여 공부한 내 영어로 내가 할 수 있는 건 상상 이상으로 많다. 걱정과 한탄 이상으로 이미 내 세계는 넓혀져 있다.
한국어와 글자도 발음도 완전히 다른 낯선 언어를 노트에 빼곡히 채워놓고, 교재에 형광펜 밑줄을 열심히 쳐서 이제는 사람들이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를 읽고 듣고 있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영어를 이미 하고 있는 것이고, 당신의 영어는 '쓰이고' 있는 것이다.
당신의 영어는 혹은 외국어는 보잘것없는 것이 결코 아니며, 당신의 그 언어는 당신의 세계를 넓히는 데에 이미 충분히 사용되고 있다.
조급해할 필요 없다.
잘하고 있으니깐.
"쓸 일이 왜 없어! 이렇게나 할 수 있는 게 많은데!!!! 난 오히려 한정된 목적을 위해서만 외국어라는 이 훌륭한 친구를 소모하고 있는 네가 더 불쌍해, 이 친구야!"
그때 이 말을 해줬어야 했다!
에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