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지금 인류 역사상 가장 똑똑한 상태에 도달해가는 중이다. 우리는 정보를 다루는 법을 배웠고, 기억을 외부화하는 데 성공했으며, 판단마저도 알고리즘에게 위임하기 시작했다.
데이터는 우리보다 먼저 사고하고, 인공지능은 우리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결론을 대신 도출한다. 그러나 이 문명적 진보의 중심에서 인간은 역설적으로 점점 더 무력해지고 있다. 문제는 더 이상 ‘무지’가 아니다. 오히려 ‘지나친 앎’이 새로운 무능의 형태로 등장했다는 것이다.
AI는 인간의 사고 구조를 확장한 것이 아니라, 분할했다. 우리는 과거보다 훨씬 많은 정보에 접근하지만, 그 정보를 수용하는 과정에서 ‘판단의 권한’을 함께 넘겨주었다. 알고리즘은 언제나 정확하고 논리적이기에, 인간은 스스로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
선택의 과정을 생략하면 효율은 높아지지만, 그 대가로 판단의 근육은 약화된다. 한 세대 전만 해도 인간은 ‘무엇이 옳은가’를 두고 토론했지만, 이제는 ‘무엇이 효율적인가’만을 계산한다. 사고는 점점 단기화되고, 판단은 외주화되며, 지성은 도구의 속도에 종속된다.
더 많은 정보를 알수록 인간은 불확실성을 견디지 못한다. 수많은 데이터가 동시에 존재하는 세상에서 확신은 점점 더 희귀한 감정이 되었다. 불확실성을 버티는 힘이 줄어들면, 인간은 안정성을 찾아 헤매게 된다. 그러나 안정성의 다른 이름은 ‘결정의 위임’이다. 우리는 스스로의 방향을 잃을 때마다, AI가 제시하는 최적의 선택지를 따른다. 그렇게 기술은 인간의 삶을 ‘자동 조종 모드’로 전환시키고, 인간은 더 이상 자신이 왜 그 길을 걷는지도 모른 채 살아간다.
문제는 기술이 인간의 사고 능력을 박탈했다기보다, 의지의 피로를 만들어냈다는 점이다. 판단의 과정이 사라지면, 인간은 결정을 내릴 때마다 미세한 죄책감을 느낀다. 선택은 가능하지만, 책임은 불안하다. 기술은 그 불안을 완화시켜주는 완벽한 대리인이다.
덕분에 우리는 스스로의 판단을 점점 더 쉽게 포기한다. AI가 대신 결정해주는 편리함 속에는, 인간이 스스로의 존재를 포기하는 과정이 숨어 있다. 결국 우리는 더 많은 것을 알고, 더 적게 행동하게 된다. 더 똑똑해졌지만, 더 무기력해졌다.
이 시대의 위기는 무지의 위기가 아니다. 결정력의 위기다. 인간은 스스로 판단하지 않아도 되는 사회 속에서 살아가며, 그로 인해 점점 판단의 의미를 잃어간다. 이는 단순히 개인의 나약함이 아니라 문명의 구조적 피로다. 기술이 너무 빠르게 발전한 탓에, 인간의 의식이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철학은 기술을 정의할 시간을 잃었고, 인간의 사유는 이제 현실을 해석하기보다 추격하는 역할로 밀려났다. 이 불균형이 바로 ‘지성의 디플레이션’을 불러온다. 지식은 넘쳐나지만, 지혜는 희소해진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시대를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기술의 발전을 거부할 수도, 속도를 늦출 수도 없다. 그러나 하나는 분명하다. 인간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다시 ‘생각의 주체’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AI가 만들어주는 편리함을 누리되, 판단의 주권만큼은 넘겨주지 말아야 한다. 기계가 계산할 수 없는 것은 의도의 이유이고, 인간이 회복해야 할 것은 바로 그 이유다. 기술이 삶의 경로를 설계해줄 수는 있어도, 그 삶의 목적은 여전히 인간이 정의해야 한다.
결국 세상이 아무리 똑똑해져도, 인간이 살아야 하는 이유는 여전히 단순하다. ‘왜’라는 질문을 던질 수 있는 존재로 남는 것이다. 판단이 불편하더라도, 그 불편함을 감수하는 용기야말로 인간이 기술을 넘어설 수 있는 마지막 힘이다. 세상은 앞으로 더 정교해질 것이고, AI는 더 많은 영역을 흡수할 것이다. 그러나 그 모든 진보 속에서도, 자신의 뜻으로 선택하고, 자신의 언어로 설명하며, 자신의 의지로 살아가는 사람만이 진짜로 살아남을 것이다. 인간이 인간으로 남는다는 건, 이제 ‘스스로 결정한다’는 말과 같은 의미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