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준이 살아온 방식.
특목고를 다니는 고등학생인 나는, 고3을 앞둔 2017년 12월 겨울방학, 나는 내 인생의 기로에서 어떤 것을 선택해야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그동안 다사다난한 경험을 하며 꾸준히 도전하고 있었다. 컴퓨터를 시작으로 3D프린터도 만들었고, 인공위성을 만들겠다고 도전하다 학교 전교생이 대피할 뻔 했으며, 고등학교 사이트를 해킹한 적도 있다. 청소년 시절에만 블로그 누적조회수 740만명을 찍기도 했고, UN 정식 회의에 초대받기도 하였고, Forbes 랭킹에도 선정됐다.
이런 것들이 내가 19살이 되기 전에 있었던 경험들이었다. 그런 이유로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고등학생 때까진 내가 갖고 있는 커리어에 조금은 우쭐했다. 아마추어 느낌으로 스타트업을 하고 있으면서 단지 창업 대회에서 몇 번 우승하고, 나름 내가 만든 서비스로 돈도 벌어 봤다며 우쭐하다니.
오늘은 스스로를 우쭐해하고 쪽팔려하고, 그렇게 다시 내가 배운 것들을 작성하고 싶다.
배운 것을 이야기하기 전에,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조금 더 깊게 이야기할 필요를 느낀다.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나는 내 스스로에게 당당할만큼 매 사에 열심히 살았다. 새벽에 일어나 새벽에 잠을 자왔다. 가끔은 왜 이렇게 힘든 길을 택했는지 한탄해보면서도 이를 악물고 하루 하루 최선을 다해 일했다. 물론 지금도 그런 삶을 살고 있긴 하다.
많은 사람들이 충분히 놀 나이에 왜 일을 하고 있는지 묻는다. 때로는 안타까운 시선으로 나를 동정한다. 그러나 나는 어릴 때부터 내가 인생에서 어떤 일을 하며 살 것인지에 대해 궁금해왔다. 그 만큼, 난 일하는 것에 관심이 많았고 어떤 일을 하게 될지 설레해왔다. 후회는 없다.
내 어릴 때를 잠시 회상해보면, 정말 어린 나이였는데도 불구하고 내 미래에 대한 고민을 정말 진지하고 깊게 했던 편이다. 친구들이 만화책을 읽을 때, 나는 진로에 관련된 책을 읽는 것을 더 즐거워했다.
"10년, 20년 뒤에 나는 뭘 하고 있을까?"
당시 어린이들을 위한 미래직업 탐구도서는 다 읽었다. 책을 읽으며 미래의 나를 상상했다. 그게 내 즐거움이자 하루하루 동기부여를 얻는 방법이었다.
그러다 9살 때, 아이폰3GS가 출시하였다. 아이폰의 런칭 키노트를 보며 심장이 쿵쾅거렸다. 다른 사람들은 아이폰의 디자인과 매끄러운 터치, 엄청난 UIUX를 보며 두근거렸다면, 나는 다른 곳에서 기대하고 있었다. 사실 스마트한 기능들은 미래영화에서도 보일만큼 상상할 수 있는 수준 아니었던가?
아이폰이 나오고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아이튠즈가 앱스토어 역할을 하며 내가 원하는 기능을 핸드폰에 구현해내고, 다른 사람들과 공유할 수 있다고 하지 않는가. 심지어 돈도 벌 환경을 준다니. 기업이 아니라 개인이더라도 새로운 기능과 게임을 구현해 앱스토어를 통해 용돈을 벌 수 있다는 것에 감탄하였다.
나는 초등학생 때부터 세상에 나온 대부분 스마트폰의 스펙을 정확하게 꿰뚫고 있었다. 한 달에 한 번씩 통신사에서 나오는 스마트폰 광고책을 읽고 또 읽으며 펜으로 적어갈만큼 달달 외웠다. 그만큼 기계에 관심이 많았다.
아이폰이 나오기 전에도 나는 단순한 터치 패널의 핸드폰 (예로, 쿠키폰)에서 움직이는 배경화면 스티커를 독학으로 구현해낼만큼 핸드폰 내부를 커스터마이징하는 것을 좋아했고 열심히 팠다.
(아마도 공부했다는 단어보단 덕후처럼 계속 그 분야를 팠다는 말이 더 정확한 것 같다.)
그 무렵, 수 억을 벌어들인 한 개발자가 나와 동갑이라는 것을 신문을 읽다 알게 됐다.
'지구 반대 바퀴에 살고 있는 친구는 가상공간(컴퓨터)에서 큰 돈을 벌고 있는데
나는 내 인생을 어떻게 살고 있는 건가...(자괴감)'
나 역시 앱을 만들어 다른 사람들이 반응하고 환호하는 것을 보고 싶었다.
하지만, 단순한 배경화면에 움직이는 스티커를 넣는 수준을 뛰어넘는 '앱 개발'은 미친 듯이 어려웠다. 동갑내기이자 다른 나라에 사는 친구도 앱으로 몇 억을 벌었다는 소식이 있었으니, 그 정보 하나만 믿고 앱 개발을 쉽게 생각했지만 오산이었다. (그럼에도 남들도 만드는 앱을 나라고 못 만들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곧바로 나도 앱을 만들 것이라며 어려운 개발 독학서를 구입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머니는 내가 이 어려운 독학서를 분명 이해하지 못할 것을 아셨을 텐데 흔쾌히 구입해주셨다. 여담으로 우리 어머니는 유태인 하브루타 토론수업, 리더십 수업 등 별난 교육까지 모두 받을 수 있도록 지원하였다. 안다녀본 학원이 없을 정도이다.
나는 이 세상에 대단한 사람은 없다고 생각했다. 머릿속으로 상상만 하느냐, 아니면 몸으로 부딪치면서 현실로 실현시키느냐에 따라 신문에 내가 나올지, 아니면 신문을 읽기만 하고 있을지 결정된다고 생각했었다.
당시 똑똑해 보이는 친구들을 불러 모아 개발 독학서를 함께 읽어가며 앱 개발을 공부했다. 하지만 역시나 9살, 10살 친구들이 앱 개발을 하기에는 어려움이 정말 많았다. 어려운 단어와 구조를 당최 이해하기 어렵자 컴퓨터 과목 선생님을 찾아가 답답함을 호소하며 코딩 방과후 수업을 개설해달라고 요청하였다.
선생님은 우리의 호기심에 반응해주셨고, 덕분에 선생님 밑에서 오랜 시간을 소프트웨어 코딩과
임베디드 로봇 개발을 배울 수 있었다. 우리의 부모님도 적극적으로 응원해주셨기에 학교를 마치고는 코딩, 로봇 학원을 다니며 초등학생 시절을 보냈다.
*앱 개발을 성공적으로 하지 못했지만, 간단한 유틸리티 등을 출시해 돈을 벌었다. 당시 앱을 개발해 통신사 전용 앱스토어에 등록만 하면 통신사에서 지원금을 줄 때가 있었다. 매우 간단한 기능을 하나의 앱 형태로 개발해 용돈벌이를 했었다.
그러다 한 친구가 애플 스토어에 있는 맥북으로 네이버 카페를 운영하는 것을 보며 자극을 받았다. 당시 초등학생이던 그는 컴박사라는 네이버 카페를 운영하고 있었다. 어린 나이에 이미 커뮤니티에서 짱을 먹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 찾아보니 사라지긴 했다. 혹시 이 글을 읽는다면 연락을 주면 좋겠다.)
나는 그 친구를 통해 네이버 카페와 블로그로도 큰 수익을 발생시킬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동안 새로운 것을 만들어야만 가상의 공간에서도 돈을 벌 수 있다고 생각했기에 앱 개발에만 몰두해왔다. 그러다 우연찮은 기회로 만났던 친구 덕분에 이미 만들어진 플랫폼 안에서도 개발없이 수익을 낼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이걸 지켜보며 나는 조금 생각을 다르게 했다.
'이미 만들어진 가상의 공간을 더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을 만들자. '
당시 우리 아빠는 작은 의류 가게를 하셨다. 지금 생각해보면 적자가 많아서 넉넉하게 잘살지 못했다.
아빠가 직원을 채용할 때 접속하던 채용 사이트를 접속해 자동으로 로그인된 아빠의 계정으로 채용 공고문을 작성했다. 어른 행세를 하며 대학생이던 개발자 한 명을 채용했고 나름 직원을 뽑는 것이라며 네이트온으로 면접까지 보았다. 그 대학생 개발자는 왜 전화나 대면면접이 아닌 네이트온으로만 연락을 주고받는지에 대한 의문을 항상 갖고 있었다.
그렇게 나는 대학생 개발자를 재택근무 형태로 계약을 하였다. (계약서도 제대로 쓰지 않았다.)
급여의 경우, 프로그램을 완성하면 200만원을 주기로 하였는데 당시 줄 수 있는 여건이 안됐지만, 프로그램을 개발해 팔게 된다면 200만원을 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무턱대고 채용한 것이다. 아마 팔리지 않았다면 나는 고용노동부에 신고됐을 수도 있다.
우리는 네이버 블로그와 카페 마케팅을 자동으로 반복하는 프로그램을 개발했다. (크롤링 기반의 자동화 프로그램) 또한 네이버 상위노출 방식을 역으로 구현해내는 알고리즘을 프로그램에 담아 마케팅 대행사에 판매했다. 꽤나 짭짤한 수익을 벌어들였다.
지금이야 그런 네이버 마케팅 프로그램이 널렸지만, 당시에 마케팅 대행사들은 내가 만든 이런 프로그램을 처음 접했기에 안 믿는 사람들이 대반수였다. 그래서 나는 프로그램 권한을 7일간 무료로 제공하고, 프로그램을 계속해서 사용하길 원한다면 14일에 20만 원씩 결제하는 구조로 마케팅 대행사에 팔았다.
정말 잘 팔렸다. 초등학교에 있는 시간에도 이메일로 프로그램을 사용하고 싶다는 연락이 정말 많이 왔었다.
10년 뒤인 뷰티패스를 창업하고 몇 달이 지나고, 내 프로그램을 사용했던 대행사에서 연락이 왔다. 그렇게
뷰티패스가 개발한 병원 마케팅 프로그램을 믿고 대신 영업해준다던 곳이 있었다. 당시 내 프로그램의 명성을 오랜만에 확인한 것 같아 기분은 정말 좋았다.
하지만, 그렇게 짭짤한 돈 맛을 알게 된 지 몇 달 되지 않아 네이버의 경고와 제재(내용증명)가 들어왔다. 어린 나이에 괜스레 감옥 갈 수도 있다는 생각에 겁이 나 정말 울면서 프로그램 운영을 종료했던 때가 있다.
'그때 대행사에서는 다시 프로그램 권한을 달라고 협박하고, 네이버에서는 경고받고.. 그땐 진짜무서웠다.
사실 이렇게 겁먹은 적은 예전에도 몇 번 더 있었다.
어른 행세를 하며 만들었던 개발자 커뮤니티 사이트를 나름 저렴한 가격으로 팔았다. 내가 개발한 사이트가 그 정도 가치를 하는지 이해하기 어려울 시절, 한 중소 회사가 제안한 가격은 너무나 메리트에 있게 느껴졌다. 그 때 양도했던 사이트의 주인은 오랜 시간 동안 많은 회사와 사람을 거쳤다. 그 과정에서 마지막 소유권을 갖게 된 회사가 사행성 광고를 달면서 나한테까지 연락이 닿았고, 아빠 손을 잡고 경찰서를 방문해 참고인 조사를 받기도 했다.
어릴 때부터 본의 아니게 창업과 비슷한 경험을 하면서 법원도 들리고, 경찰서도 들리면서 이런 심적 공포스러움은 일찍이 경험했다. 사실 어릴 때 일이라, 마치 히어로가 된 것처럼 친구들에게 자랑을 하곤 했었지만, 우리 부모님은 나의 행동에 완전히 질리셨었다. (늘 내가 하고 싶은걸 하고 있으니..)
호기심 많고 하나에 빠지면 하루 종일 그 분야만 알아보는 성격. 관심 갖는 분야가 잡다하고 산만해 보이는 행동에 어른들은 내가 ADHD(주의력결핍 과잉행동 장애)가 아니냐며 다들 걱정하셨다. 그래도 학업의 끈을 놓지 않도록 부모님께서 힘든 와중에도 나의 교육을 위해서는 언제나 항상 힘써주셨다.
뉴질랜드, 미국, 중국 유학 경험과 좋은 학교를 다니면서 여러 문화를 보고 배웠으며 다른 친구들에 비해 더 넓은 배경지식을 갖을 수 있었다. 다양한 국가에서 살아보는 동안 죽기 전까지 하기 어려울 수 있을 스쿠버다이빙, 사격, 경비행기 부조종, 산에서 승마하기, 해외 선교 활동 등 지금 생각해보면 참 겁 없이 하고 싶은 것은 어떻게든 하려고 했고 이뤘다고 늘 생각했다.
그 뒤에는 다양한 팀(회사)에서 내가 상상한 것을 현실화시키는 방법과 프로덕트 개발 프로세스를 배웠다. 제곱Xecop이라는 이름으로 회사를 공동 설립해 카카오톡 테마와 조립식 컴퓨터를 만드는 일을 하였다.
지방에 있는 작은 도서관에 컴퓨터를 납품하기도 했고, 아이돌 팬카페에서 들어오는 외주를 받아 카카오톡 테마를 만들어줬다. 그러다 물론 팀원들에 의해 이 회사에서 퇴출당했다.
(수익을 위해 애완동물 온라인 커뮤니티 사업을 해보는 것은 어떻겠냐고 제안했다가..)
이후에는 리뷰 전문 블로그를 개설해 글을 꾸준히 써왔다.
모든 글은 통틀어서 누적 734만번의 조회수가 기록됐다.
블로그를 운영하면서 올림푸스와 엔비디아, 엘지, 삼성, 소니 등 꽤나 유명 IT기업들과 콜라보 리뷰를 진행했다. 또 태국 관광청/하나투어/티웨이 항공사와 콜라보 마케팅을 해 태국 여행도 가고 항공사 기내 매거진에 칼럼 기재, 올림푸스 사진전을 개최하며 여러 경험들을 해볼 수 있었다.
블로거를 하면서, 제품 리뷰를 하기 위해 엔비디아를 만났다. 그 인연의 시작으로 엔비디아 이용덕 대표님을 만났고 16살 때부터 나는 멘토멘티 관계로써 지금까지도 경영 수업을 받아올 수 있었다.
14살 중순, 중국 심양에 위치한 유차이 국제학교를 다니게 됐고 16살이 되기 전에 학업을 일찍 마무리하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중국을 다니면서도 온라인 커뮤니티를 국내에서 운영하며 수익을 벌고 있었다.)
남들에 비해 1년이라는 시간 동안 학교를 가지 않고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는 시간이 존재했다. 그리고 나는 이 시간을 결코 헛되게 사용하고 싶지 않았다.
당시, UN CEO Caryl M. Stern가 저술한 'I Believe in ZERO: Learning from the World's Children'를 감명 있게 읽으면서 기아에게 간접적인 도움(후원) 형태가 아닌 직접적인 도움을 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물론 해외 봉사를 다녀오는 방법도 있었으나, 초등학생 때 다녀온 경험이 있기에 보다 더 실질적이고 장기적으로 도울 수 있는 방법을 모색했다.
그렇게 판교에 위치한 UN산하기구 플랜코리아에서 1년 넘는 시간 동안 인턴 아닌 인턴으로 일하며 후원 아동 소식을 번역하는 활동을 하였다. 그 활동을 통해 봉사 시간을 수백시간 얻을 수 있었고, 이는 훗날 특목고를 갈 때 도움이 되는 이력이 됐다.
곰곰하게 생각해보면, 중학생 때 내가 설립했던 조립식 컴퓨터 납품 회사에서 팀원들에 의해 퇴출당하기도 하고 경찰서도 다녀오고, 그땐 참 충격도 많이 받고 여러 쓰라린 경험을 했었다. 아마 그러한 쓰라린 경험 때문에 부모님께서 아직까지도 창업을 반대하는 것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고등학교는 동탄국제고등학교를 입학했다. 사립 국제학교는 아니고, 정부가 외고를 대체하겠다며 공립 국제고를 만들었다. 사실상 외고와 같은 포맷이었다. 과학고, 외고, 국제고.. 똑같이 성적과 인성면접, 토론 등을 거쳐 선발된다. 동탄국제고는 공립이라 학비는 거의 0였고, 시설은 상속자들 드라마를 촬영할만큼 엄청났다. 당시 상속자들 드라마를 보면서 학교가 이쁘다 생각했고, 학비가 없는데 공부만 잘하면 갈 수 있다는 말에 그냥 준비했다.
아무튼 같은 동기생들과 '준브레일' 이라는 UN NPO 단체이자 기술 비영리단체를 설립해, 전국에 있는 시각 장애를 겪는 아이들을 위해 새로운 점자책을 선물했다. 준브레일이 만든 새로운 점자책은 3D 프린팅 기술을 활용해 얇게 플라스틱 종이를 출력하여 점자를 입히는 기술이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이 기술을 통해 약 10개국에 IKR 국제지식재산권을 출원했고 교육부 기업가정신상, 여성가족부 장관상 등을 수상했다. 고등학생 신분이지만 UN 정식회의에서 반기문 사무총장님과 대면하였고, 오준 대사님과 함께 UN 세션에 참석하기도 했다.
준브레일의 시작은 어땠을까?
처음 3D 프린팅 기술을 사용하고자 3D 프린터를 알아보았을 땐, 구입하기 위해서 1억 정도가 필요했다. 학생들로 구성된 우리는 1억으로 3D 프린터를 갖고 오는 것은 무리라고 판단하였고 수단을 가리지 않기로 하였다. 결국 직접 3D 프린터를 만드는 방법이 있는지 질문을 던졌다.
우리는 구글에서 'prusa i3' 3D 프린터의 오픈소스 자료를 얻게 됐다. 많은 개발자들이 서로 비영리를 목적으로 공유하는 3D 프린터의 도면과 부품 내용 자료를 입수하여, 6개월 동안 준브레일은 3D 프린터를 개발하고 연구하기 시작했다.
개발하면서 3D 프린터의 부품을 태우고 녹였다. 감전도 당해 위험한 일을 겪을 뻔도 했지만 그렇게 오랜 시간 동안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프린터를 완성하였다. 부품을 고장내 돈이 없을 땐 학교 친구들에게 10만원씩 투자를 받았고, 투자의 리워드로 3D프린터 케이스에 이름을 새겨주었다. (물론 친구들은 100% 투자금 회수도 하였다.)
그렇게 연속해서 3D프린터를 만들면서 어느 정도 아두이노를 다루는 방법과 임베디드를 터득하였고, 처음 개발했던 3D 프린터에 비해 완전히 컴팩트한 사이즈이면서도 3D 프린팅 출력 사이즈는 1.5배 넓혔다. 또 접어서 들고 다니거나 세로로 세워서 보관도 가능하게 디자인했다. 애초에 초등학생도 안전하게 3D 프린터를 사용하는 것을 목적으로 개발을 진행했기에, 감전될 수 있는 부품들은 모두 만질 수 없도록 디자인한 것이다.
그렇게 개발한 3D 프린터는 여러 학원, 학교로 납품해 준브레일을 운영했다.
우리는 한 층 더 나아가, Microsoft Korea와 시각 장애를 겪는 아이들이 코딩을 학습할 수 있는 교구를 개발하는 프로젝트를 준비했고 여러 명문 대학의 점자 교재와 촉각 교구를 대신 개발해 납품하는 일도 맡았다. 준브레일은 시각 장애인뿐만 아니라 일반 중학생, 아프리카 기아, 폐지를 줍는 기초수급대상자 할아버지를 위한 프로젝트를 개발해 더 많은 사회적 일을 해왔다.
일반 중학생 약 500여 명에게 교육을 진행했으며, 아프리카 기아들을 위해 말라리아모기 퇴치 재료를 갖고 3D 프린팅 장난감을 만들어 선물했다. 폐지를 줍는 할아버지와 할머니에게 적정 폐지 가격보다 10배 이상의 높은 금액으로 폐지를 구입해 캔버스를 개발했고- 미술부 학생들과 콜라보를 해 폐지 그림 전시회를 개최해 작품을 팔아 다시 폐지를 줍던 할아버지와 할머니에게 수익금을 기부했다.
UN에서 NGO를 공식적으로 인증받은 첫 번째 청소년 NGO 단체이자 비영리 스타트업으로써, 더욱 빠르게 세계로 뻗어나가고 있었고 우리는 준브레일에 대한 소속감과 자부심이 매우 컸다. 이제는 준브레일의 활동을 모두 종료하였다. 그리고 그동안 함께 했던 친구들과 개발해온 기술들을 오픈소스로 공개하기 위해 기술 자료를 정리했다. 준브레일이 개발한 접이식 3D 프린터 도면과 배선정리 및 조립방법, 3D 프린팅 기술을 사용한 점자책 개발 세팅값, 말라리아 퇴치 필라멘트 개발 재료 및 혼합 비율 등을 후배 준브레일 팀원들에게 공유하고 마무리했다.
사실 준브레일은 애초에 돈 벌 목적보다는, 좋은 일을 기술로 풀기 위한 단체였다. 그래서 그런지, 준브레일은 시간이 지날수록 인지도는 높아졌지만 운영할 잔고는 늘 부족했다. 우리는 후원도 받고, 크라우드펀딩도 진행하고 직접 3D프린터 제품도 만들어 팔면서 연명해왔다.
그렇게 연명하듯 운영하는 것은 나름 대표의 입장으로 버거웠던 것은 사실이다. 그렇게 중국 유학 시절, 비보험 의약품을 구입할 때의 painpoint 를 해결할만한 아이디어 하나를 들고 (무턱대고) 메디컬케어 O2O 스타트업 '바오바브 코리아'를 설립했다.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한 분들과 함께 의약품 조달 플랫폼을 만들며 중국 부트캠프에 참가하기도 하고, 한국 론칭을 하려다 약사 협회와 싸우기도 했다. 짧은 시간 동안 바오바브는 참 많은 사건 사고를 겪었다.
우리가 만든 서비스는 여러 제약회사를 경쟁하게 만들어, 약의 가격을 낮추는 것이 핵심이었다. 박리다매 형태로 가격딜을 하는 것인데 사실 잘안됐다. 그러나 우리가 기능으로 만들었던 OCR 기반의 알약 정보를 알아내는 것이 되려 인기가 높았다.
우리는 이 플랫폼을 중국 베이징에 런칭하였고, 베이징의 여러 약국들이 사용했으며, 특히 징웨이 약국은 가장 활발히 우리의 앱을 사용했다.
우리는 약 17개월만에 알약 데이터 200가지를 분류할 수 있는 기술을 개발했으며, 덕분에 나는 포브스(Forbes) 가 선정한 아시아의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30세 미만 30인으로 최연소 선정될 수 있었다.
어렵게 공부해서 특목고에 입학했더니, 입학 뒤로는 공부보단 창업 생각만하고. 공부 안하는 학생이 딴짓만 한다며 선생님과 부모님의 눈치와 공격을 받아가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외롭게 나만의 창업을 하는 중이었다. 그래도 내 나이에 벌 수 없는. 아니, 아마 남들이 버는 10배 이상의 돈 그 이상을 벌어보는 경험을 하고 있다며 스스로를 위로했다.
정부에서 장관상도 표창받고 심지어 포브스에서 나를 아시아의 영향력 있는 인물이라니. 괜히 나 자신을 더욱 높이 우쭐 우쭐거렸다.
(우쭐할 사람도 아닌데 바보 멍청이)
그러다 슬럼프를 만났다. 뭐랄까.
내가 정말 스타트업을 하고 있는 것일까 하는 그런 생각. 돈도 제법 많이 벌면서 가족에 보탬이 되고, 사회에 좋은 일도 비영리적으로 하고 있다는 생각에 뿌듯함이 있었으나 과연 내가 스타트업을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지, 내가 제대로 된 프로세스로 스타트업을 하고 있는 것인지 확신이 들지 않았다.
그동안 나는 내가 겪고 있는 불편함이 떠오르면, 해결할 수 있다며 생각 없이 추진하고 일을 벌여놨던 편이었다. 우선 일을 벌여놓고 실행하면서 해결하는 방식이기 때문에 스타트업 정석대로 하는지 자신이 들지 않았다.
스타트업하는 사람들은 이 일에 매달리는데. 나는 본업이 창업이 아니라 학업 아닌가. 학생이 창업한다고 말할 수 있는가? 스타트업이 실패해도 안정적인 학교로 돌아갈 수 있는 길이 존재하는데, 과연 내가 스타트업에 치열하게 집중하고 있었을까. 어떻게든 생존해야 한다는 고민을 죽을 만큼 해봤을까. 이런 생각들. 그런 생각들은 나를 학교에서 공부하는 시간이 과연 값어치가 있는지. 내가 학교에서 실질적으로 어떤 것을 배우고 있는지에 대한 고민으로 이어졌다. 그러다 창업의 본질을 생각하며 앞으로 나의 미래 1년, 3년, 5년, 10년을 계획했다.
그리고 부모님께 말씀드렸다. "이제 곧 고등학교 3학년을 올라가지만 나는 자퇴하겠다."
나름 청소년 창업가로 이름 좀 날렸는데, 내가 정말 창업가인지 모르겠다며 다른 사람이 창업한 스타트업에서 제대로 스타트업을 배우고 싶다고 말씀드렸다. 부모님께서는 고등학교만 졸업하고 네가 하고 싶은 일을 하라며 1년만 기다리라고 하셨지만, 나는 결국 자퇴했다. 그리고 곧바로 창업을 멈췄다.
왜 고등학교는 자퇴하고, 그동안 열심히 달려온 회사와 단체들에서 스스로 내려왔냐 묻는다면
지금부터 내가 해야 할 일은 제일 아래로 내려가는 것이라 생각했다. 말도 안 되는 애들 장난처럼 청소년 창업가, 창업가 소꿉놀이하는 그런 기분 다 없애고. 정말 낮은 위치에서 하나씩 기본이 되는 스타트업 프로세스를 경험하고 실전을 배우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번외로 이야기 하나.
나를 보고, 어릴 때 창업을 시작할 수 있었던 것은 부모가 금수저이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다. 설사 부모님이 금수저라고 해도, 나는 부모님과 개별적인 관계다. 지금까지 남들 못지않을 아낌없는 교육적 환경을 지원받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한 경험을 통해 배경지식을 얻고, 창업까지 할 수 있었던 것은 맞을 것이다. 하지만 단 한 번도 부모님께 물질적 자금을 지원받아 창업을 시작해본 적이 없다. 나는 온전한 내 힘으로 창업을 준비했고 한 번도 부모님께 손을 벌리지 않았다.
최근에도 부모님께 돈을 매 달 드리면 드렸지, 창업을 위해 돈을 빌리거나 얻어본 적이 없다. 그리고 만약 우리 부모님이 금수저라면, 내가 매 달 직원들 월급은 어떻게 줄지 고민하면서 창업하겠나. 오해 그만해주시면 좋겠다.
규제 혁신의 아이콘, 콜버스 합류.
그렇게 콜버스를 입사했다. 콜버스를 결정하게 된 가장 큰 결정적 계기는 박병종 대표님께 배우고 싶은 마음일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규제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법적 규제를 뚫어가면서까지 서비스를 론칭한 과정을 관찰하면서 엄청난 스타트업 정신을 배울 수 있을 것이라 확신했다. 그리고 구글 캠퍼스에 입주하고 있었기에 스타트업 커뮤니티도 만족스러울 것이라 생각했다. 그렇게 나는 콜버스에서 스타트업을 경험하게 됐다.
사실 내가 학업을 하면서 창업을 이어나갈 때와 콜버스의 프로세스는 비슷했다. 하지만 다른 점이 있다면 더 많은 것을 더 크게 보고 배우고 경험했다는 것, 그리고 깨달은 점이 많다는 것이다. 더욱 큰 게 있다면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난 것이 아닐까 싶다. 뿐만 아니라 나는 박병종 대표님과 밤 11시가 넘을 때까지 단 둘이 콜버스와 관련된 사업 개발과 전략을 함께 고민했다. 나 또한 콜버스에 큰 열정을 갖고 있었고, 박병종 대표님께 많은 것을 배우는 중이었다.
콜버스의 큰 포부와 비전에 놀랐고, 박병종 대표님의 인사이트에 한번 더 놀랬다. 그렇게 열심히 마케팅과 사업개발을 배운 뒤 나는 다시 창업을 하고자 퇴사했다.
(비록 콜버스는 퇴사 했지만 박병종 대표님과 가끔 식사도 하고 창업에 관한 조언을 구하고 있다.)
콜버스를 퇴사할 때 내가 페이스북에 글을 작성했던 게 있다. 발췌해보자면,
‘누군가의 밑’에 있는 경험은 우리에게 많은 걸 가르쳐 준다. 그래서 나는 내가 원하는 성공을 앞서 거두고 있는 박병종 대표님과 함께 일했었다. 박 대표님과 함께 동고동락하면서 깨달은 점은 참 많았다. 여러 인사이트를 얻을 수 있었고, 미래 모빌리티 시장의 전망을 예측해볼 수 있었다. 함께 일도 했지만 시간 날 때마다 다양한 사업 모델을 고민하고, 그 사업 모델에서 찾을 수 있는 단점과 약점을 발굴하는데 에너지를 쏟았다. 그렇게 6개월 동안 이러한 연습을 반복했다.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아이디어가 생겼을 때, 가장 먼저 박병종 대표님을 비롯한 여러 직원들에게 보여주고 공유하였다. 그리고 그들이 생각한 아이디어의 약점을 듣고 다시 보완하는 행동을 반복했다. 나와 가장 가까운 가족과 직원들에게는 아이디어가 만족스러워야 조금이나마 이 사업을 시작할지 고민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만약 그들이 괜찮다고 생각했다면 다른 사람에게 소문을 냈을 테니 그 점도 함께 관찰했다.
비록 나는 7-8개월 일하다 퇴사하고 이제는 내 비즈니스를 하고 있지만 앞으로 내가 원하는 성공을 앞서 거두고 있는 선배와 함께 일한 기억, 위기에 처했을 때 모욕감 없이 자존심을 굽힐 수 있게 해 주고 편견 없이 모든 유용한 조언들을 스펀지처럼 흡수하게 해 준 기억은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콜버스를 퇴사하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창업하다.
콜버스를 퇴사하고, 콜버스를 다니며 함께 문제를 다각적으로 해결해본 제이미와 (주)뷰티패스를 창업했다.
콜버스를 퇴사한다는 것은 정말 아쉬운 감정이 컸지만, 새로운 내 인생을 도전한다는 생각에 감정이 벅차오르기도 했다. 뷰티패스는 피부과 멤버십 앱을 만들고 있는 스타트업이다. 뷰티패스는 아시아 메디컬케어 시장을 타겟으로 하는 스타트업이다.
코-파운더들은 모두 메디컬케어 기술 개발 및 스타트업 현장에서의 경험이 많은 인력으로 구성되어 있다. 메디컬케어 멤버십 커뮤니티 서비스 뷰티패스를 개발하여 18년 3월 iOS App market에 공식 론칭할 예정이다. 현재 피부과 바이럴 마케팅 솔루션 ‘target’을 출시해 피부과 시장 검증을 하며 매출을 끌어올리고 있다.
우리는 매 월 매우 빠른 성장 속도를 내고 있는 스타트업이라고 생각한다. 마치 다른 회사는 한 달의 시간이 우리에게는 한 주의 시간도 안되는 속도감이랄까?
뷰티패스는 진지하지만 아무 것도 몰라 노련하지 못하고 미숙하다. 경영 방법은 모르겠고, 남의 회사가 아닌 내 회사로 제품을 만들려하니 삽질의 연속 뿐이다.
뷰티패스를 창업한 나는 19살이다. 잘해내야만 한다. 팀원들 뿐만 아니라 엑셀러레이터 Primer 로부터 시드를 유치하였고, 몇몇 창업 선배님께 누적 4억원의 프리a 투자를 받았다. 주주들이 생겼으니 더 잘해야 한다.
나는 뷰티패스를 창업할 때 가족에게 물질적 도움을 전혀 받지 못했다. 전 직장을 퇴사하면서 받은 마지막 월급과 고등학생 때부터 이더리움과 리플에 조금 투자해놓고 벌어들인 수익금, 예전에 창업했던 스타트업 지분을 매각한 돈과 특강 강의료를 모아 회사를 시작했다. 처음 시작할 때부터 서비스 규제 자문료로 절 반 이상을 사용했기에 거의 무자본으로 시작했다. 때문에 어떻게 하면 돈을 벌 수 있을지, 어떻게 하면 돈을 아낄 수 있을지 끊임없이 고민하면서 창업을 이어갔기에 매 월 빠른 성장을 할 수 있었다.
이제는 성과로 이야기하는 김민준이 되고 싶다.
뷰티패스는 ’청소년 창업가’에서 벗어나 김민준이라는 한 사람으로 처음 시작하는 팀이라 생각한다. 아직 나 자신이 많이 부족하고 보잘것없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동안 다양한 경험, 도전을 통해 나름 준비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오랫동안 어떤 서비스로 내 제대로 된 인생을 시작할지 고뇌했다. 이제는 뭐랄까. 많은 사람들이 내가 만든 서비스에 대해 열광할 수 있도록 성과를 보이고 싶다. 내가 만든 서비스를 통해 사람들에게 문화적 습관, 가치소비적 습관을 형성해주고 싶다.
앞으로 최대한 빠르고 정확하게, 사실적인 성과를 올리고자 노력할 것이다.
자 뷰티패스라는 젊은 스타트업과 메디컬케어 멤버십 커뮤니티 앱 뷰티패스, 피부과 마케팅 솔루션 툴 target, 창업가 김민준을 기대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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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s : 2020.09
1. 피부과 가격비교 뷰티패스는 대웅제약 관계사 엠서클로 100% 지분 피인수, 매각됐다.
활동하면서 촬영했던 사진 모음
언론 기사 :
(최근에는 언론 인터뷰를 가급적 안하고 있습니다. 참고바랍니다.)
http://platum.kr/archives/79357
http://platum.kr/archives/66456
http://platum.kr/archives/83425
http://news.chosun.com/misaeng/site/data/html_dir/2016/12/07/2016120700734.html
http://www.globalnewsagency.kr/news/articleView.html?idxno=73695
http://www.newsprime.co.kr/news/article.html?no=343911
http://www.newsprime.co.kr/news/article.html?no=345074
http://platum.kr/archives/945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