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편한 습관에 대하여
30대 후반부터 기억력이 점점 떨어진다라는 생각을 해왔고 생활 전반의 To-do list를 작성하기 시작한 지 3년째 되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업무 관련으로 리스트를 작성하기 시작하다가 점점 일상생활에서 까먹는 것들이 많아진다 느껴지기 시작해서 집안일, 가족, 육아, 건강, 자기 개발 등등 여러가지 해야 할 일을 적어왔습니다.
이게 하나의 생활 습관이 되어 이제는 To-do list를 작성하지 않으면 높은 확률로 까먹게 되는 지경에 이르렀어요. 어렸을 적 교과서에서 읽었던 윤오영의 '메모광'이라는 수필이 기억납니다. 최근의 것은 기억이 안나서 메모하는 주제에 이런건 또 기억이 잘 나네요.
"그는 잠을 자다가도 무엇이 생각나면 일어나 불을 켜고 메모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도저히 잠을 이루지 못하는 까닭이다. 길을 가다가도 무엇이 생각나면 걸음을 멈추고 메모를 한다. 전차 안에서도 메모를 한다. 남의 집 방문을 가서 이야기를 하다가도 메모를 한다."
어느 새인가 제가 딱 저 지경에 이르렀더라고요. 자다가 깨서 꿈꾼 내용을 적는다던지, 바로 할 수 있는 일인데도 일단 메모를 하고 그 일을 하거나, 해야 할 일을 하고 뒤늦게 그걸 했다는 기록을 합니다. 결국은 제 노트 앱에는 사소하고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들이 태반이 되어버렸지요. 요즘에 흔히들 이야기하는 성인 ADHD에 해당하는 건 아닐까 생각을 합니다. 그건 아닐거야라고 스스로 위로하며 병원을 찾지는 않았지만 늘 그런 생각을 하긴 합니다. 나름 잊지 않으려는 처절한 노력이라고도 평가해 보지만 이미 정상의 범주를 벗어났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제는 다른 사람과 대화를 어떻게 했고 다음에는 이렇게 이야기해야지라고 시나리오를 적기까지 합니다. 업무 관련해서 녹음도 많이 하는데, 녹음한 걸 청취하고 회의록처럼 기록을 남겨두는 편이에요. 다음번 회의나 미팅 때 어떻게 이야기해야지라고 시나리오를 세우곤 하는데 막상 큰 도움은 안 되는 것 같아요. 그래도 그렇게 해야 마음이 편해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이렇게 까지 메모에 집착하는지 스스로도 잘 모르겠어요. 상호관계에서 오는 평가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하는 성격 탓인지, 스스로 상황을 통제하고 완벽한 수행을 하려는 의지인지, 노트 앱에 의존하는게 고착화돼서 뇌 기능을 떨어뜨린 건지, 내재되어있던 강박적인 성향이 발현된 건지 도무지 알 수 없어요. 어쩌면 이 모든게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일 수도 있겠지요.
이 글을 작성하는 것도 제가 느낀 지금의 감정을 까먹을 까봐 적는 중입니다. 일종의 '불안을 메모한다'라고 봐야겠지요. 불안을 메모하는 것이 어떤 도움이 될지, 옳은 것인지 모르겠지만 일단 적어야겠다고 생각이 들었어요. 아니, 무지성으로 적는 것일 수도 있어요. 어떠한 결론이 없는 글이지만 제발 이 불안에서 벗어날 수 있기를 바라며 '메모광'의 한 구절을 인용해 봅니다.
"나중에 그가 죽은 뒤에 그 수많은 메모 뭉치를 정리해 보니, 거기에는 대단한 진리나 문학적인 글귀가 적혀 있는 것이 아니었다. '누구에게 얼마를 빌려주었음', '어느 날 날씨가 맑음' 같은 지극히 사소하고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들이 태반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그의 생애 그 자체였고, 잊지 않으려는 그의 처절한 노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