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살게 해주는 것
"내 지난날을 버티게 해준 건 억센 불행이 아닌, 잔잔하지만 명징한 행복이라는 걸 깨달으며 올해의 첫 종소리를 들었다. 한 해가 반쯤 지났는데도 여전히 나는 슬픔을 자주 느끼고 곱씹는다. 떨쳐낼 수 없는 오랜 악습이다. 슬픔의 지층이 두꺼워질 때마다 사진첩을 들춰본다. 작가 후기나 인터뷰에서 종종 언급한 적 있지만, 내 사진첩에는 ‘나를 살게 해주는 것’이라는 폴더가 있다. 돌아가신 할머니의 사진, 가족과 나눈 문자메시지, 독자들이 남겨준 애정 어린 서평이 그 안에 차곡차곡 쌓여 있다. 그 귀한 마음을 눈으로, 가슴으로 담아본다." (엘르보이스 중)
친할아버지는 내가 20살 때 돌아가셨다. 새내기로 첫 중간고사를 볼 때였다. 나보다 먼저 조부모의 죽음을 경험했던 친구들이 말했다. 꼭 사진이 아닌 영상을 많이 찍어두라고. 말씀을 못하시더라도 남겨두면 사진이 커버해주지 못하는 그리움을 해소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어른들이 다 계실 때는 그 영상을 찍을 수 없었다. 하루라도 더 할아버지가 버텨주시길 기도하는 분들 앞에서, 당신의 죽음 이후의 그리움을 대비하는 모습을 보이는 건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할아버지와 나, 이렇게 둘만 있을 때가 딱 한 번 있었다. 옅은 숨소리로 주무시고 계신 할아버지의 영상을 기록했다. 병실 한 구석에서 숨죽이고.
그 영상을 차마 꺼내보지는 못하고 있다. 사진첩 폴더를 열지 못하고 있달까. 대신 그 영상을 찍던 순간의 내 마음 한 조각은 자주 펼쳐보곤 한다. 지금 이 순간이 영원하지 않을 거라는 걸 알게 해준 순간. 이 순간을 붙잡으려는 노력이 서글프다는 점. 지금 생각에는 할아버지가 들으셨을지 모르겠지만 그때 더 좋은 얘기를 들려드릴 걸, 하는 마음.
아침 러닝을 뛰면서 3-4살 정도 되는 남자아이와 어머니를 보았다. 잡초도 신기해 하는 아이를 어머니는 계속 사진, 영상으로 남기고 있었다. 어미니와 아이 눈 사이에 핸드폰이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왠지 안타까웠다. 아이는 엄마 눈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본 적이 있을까. 자신을 바라보는 따스한 눈에 담긴 애정을 느꼈을까. 이내 곧 내 모습이 겹쳤다. 나도 핸드폰으로 나와 할아버지 사이 벽을 세웠던 걸까.
나를 살게 해주는 건 결국 사진이나 영상이 아니라 내 머리와 마음에 남은 잔상들이다. 할아버지를 담은 영상을 보고 어떤 분은 편찮은 분을 봐서 마음이 안쓰러울 수 있다. 어떤 분은 그렇게라도 할아버지를 봐서 좋을 수도 있다. 나에게 그 영상은 차마 꺼내보기 어려운, 아쉬움의 흔적이다. 사진과 영상을 남기는 것도 좋다. 한편, 그 순간의 마음을 매일은 아니어도 자주 꺼내보려고 노력하는 시간이 나를 살게 하고 더 잘 살게 해준다고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