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디어보다 먼저 평가되는 ‘사고의 깊이’에 대하여
이번에 만난 대표님은 어쩐지 느낌이 이상했다. 글로 명확히 특정할 수는 없지만, 묘하게 촉에 걸리는 무언가가 있었다. 본인의 아이템에 대해 깊이 고민해 본 흔적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딘지 모르게 '얕음'이 묻어나는 느낌이랄까. 누구를 고객으로 설정했는지, 그래서 어떤 사용자 경험(CX)을 선사하고 싶은지, 이 시장이 어떤 특성과 구조, 논리로 움직이는 지조차 제대로 정리되지 않은 상태였다.
질문을 던질수록 그 공백은 더욱 선명해졌다. 대표님의 답변은 스스로 고민한 결과라기보다 나에게 결정을 위임하는 요청에 가까웠다. 가령, "비즈니스 모델이 무엇인가요?"라고 묻자, "그러게요, 저 어떻게 돈 벌어야 할까요? BM 좀 만들어주세요"라던지. "고객군은 누구라고 보시나요?"라는 질문에는, "잘 모르겠어요. 뭐, 그냥... 30대 회사원들? 론칭하다 보면 알겠죠."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대화를 이어갈수록 묘한 단절감이 느껴졌다. 질문에 답은 돌아오지만, 그 답변들은 대부분 수박 겉핥기식의 피상적인 대답들이었고,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지 않는 포인트가 많았다. 고객 이야기에서 갑자기 기술로 점프하고, 기술 이야기가 끝나면 막연한 비전이 덧붙여지는 식이었다. 문제는 있어 보이는데 그것이 왜 문제인지에 대한 집요함은 없었고, 해결책은 화려했지만 왜 반드시 이 팀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설득은 보이지 않았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와중에 디자인 작업은 어디서 받으셨는지, 피칭덱은 오히려 '그럴 듯'하게 가져오셨다. 슬라이드는 매끈하고, 용어는 최신이며, 레퍼런스도 적당히 있었다. 하지만 투자자든 멘토든, 현장에 있는 사람들은 몇 분만 지나면 같은 지점에서 고개를 갸웃하게 된다.
"그래서, 이 대표님을 무엇을 얼마나 깊이 고민해 봤을까?"
스타트업 피칭에서 가장 빨리 들키는 건 아이디어의 수준이 아니라 '사고의 깊이'다. 고객을 실제로 만나봤는지, 그 불편함이 일회성인지 구조적인 결함인지, 기존 플레이어들은 왜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는지. 이 질문들에 자신만의 답이 없는 피칭은 결국 ‘생각 안 해본 티’가 날 수밖에 없다.
많은 대표님이 “아직 초기라서요”, “지금은 MVP 단계라서요”라는 말로 이 공백을 변호하곤 한다. 하지만 초기일수록 우리에게 필요한 건 완성된 답이 아니라 치열한 고민의 흔적이다.
고객을 정의하려다 처참히 실패했던 경험
세웠던 가설이 틀렸다는 걸 깨닫게 된 뼈아픈 계기
그 끝에 방향을 어떻게 수정했는지에 대한 서사
이런 이야기들은 화려한 숫자나 기능 설명보다 훨씬 강한 설득력을 가진다. 아이디어는 어디선가 빌려올 수 있어도, 고민의 시간은 결코 빌려올 수 없기 때문이다. 피칭에서 느껴지는 ‘얕음’은 준비의 부족이 아니라 사유의 부재에서 온다.
그래서 나는 멘토링을 마무리하며 종종 이런 질문을 던지곤 한다.
“이 아이템을 시작한 이후, 가장 오래 붙잡고 고민했던 질문은 무엇이었나요?”
그 질문 앞에서 잠시라도 멈춰 서서 생각에 잠긴다면, 아직은 괜찮다. 하지만 질문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는 표정이라면, 그때는 아이디어를 고치기 전에 '생각하는 방식'부터 다시 점검해야 할 시점이다.
이 글을 읽으며 혹시 마음 한구석이 찔렸다면, 그것은 당신의 사업이 잘못되어서가 아니라 '더 깊어질 준비'가 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얕은 피칭의 늪에서 벗어나 사유의 깊이를 증명하고 싶은 대표님들을 위해, 디테일러가 제안하는 세 가지 적용점입니다.
단순히 "고객이 불편해합니다"에서 멈추지 마세요. "왜 불편해하는가?" → "기존 방식이 느리기 때문이다." → "왜 아직도 느린가?" → "기술이 없어서가 아니라, 관성적인 절차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파고들어야 합니다. 내 답변이 더 이상 쪼개지지 않는 '본질적 이유'에 닿을 때까지 스스로를 몰아세워 보십시오.
성공한 지표보다 더 강력한 건, 내가 틀렸음을 인정했던 기록입니다. "A가 정답인 줄 알고 시도했으나, B라는 이유로 실패했다. 그래서 지금은 C라는 가설을 검증 중이다." 끊임없이 시장과 고객을 위하여 씨름하고 있음을 보여주세요. 완벽해 보이려 노력하기보다, 치열하게 부딪힌 흔적을 보여주십시오.
심사위원이 공격하기 전에 본인이 먼저 스스로의 논리를 공격해 봐야 합니다. "만약 대기업이 자본을 투입해 똑같이 따라 한다면?" 혹은 "사용자가 귀찮아서 이 기능을 안 쓴다면?" 이 질문들에 대해 '그럴 리 없다'는 희망 회로가 아닌, 냉정한 '플랜 B'를 고민해 본 사람의 눈빛은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아이디어는 한순간의 영감으로 태어나지만, 비즈니스는 그 영감을 증명하기 위한 고통스러운 사유의 축적으로 완성된다. 슬라이드의 폰트를 고치기 전에, 오늘 밤 스스로에게 이 질문을 다시 던져보셨으면 한다. "나는 오늘, 내 사업의 본질을 얼마나 깊이 파고들었는가?" 그 고민의 밀도가 결국 당신의 피칭을 '진짜'로 만들 것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