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어린 시절 기억의 대부분은 바위 투성이 해변과 다시마 숲에서 이루어졌다. 어릴 때는 커다란 파도가 몰아쳐도 무서운 줄 모르고 마냥 신이 나서 바다 곁을 서성였다. 바닷가 풍경은 어릴 적 내 세상의 전부였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 애를 만났다.
그 아이는 수영을 아주 잘했다. 바다에서 헤엄을 칠 때면 눈동자가 반짝거렸고 온 몸이 산호초처럼 여러 빛깔로 빛나곤 했다. 파도가 세게 부서지는 순간에는 하얀 거품과 구분이 어려울 정도로 바다와 하나가 되었다. 나는 그것을 전혀 이상하다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멀찍이 서서 그 애와 파도가 번갈아 들고 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바다는 물살이 거세고 자주 몸이 얼어붙을 정도로 차가워졌기 때문에 사실 나는 수영을 즐기지 않았다. 그저 그 애의 물놀이가 끝나길 기다렸다가 같이 해변에서 어울리곤 했다.
그 애는 내가 살고 있는 고장의 말을 몰랐다. 어느 외국어인지 알 수 없었으나, 돌고래 소리와 새소리가 반반 섞여 있는 듯한 소리를 냈다. 하지만 그 당시 우리는 대화를 한다기보다 그저 같은 공간에 어울리는 것이 다였기 때문에 그것은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만큼 순수하고 어렸다. 함께 노는 시간이 길어지며 그 애의 ‘말’을 조금씩 이해할 수 있었다. 그 애도 내 말을 조금씩 알아듣기 시작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여름날 바다에 뛰어들 용기가 생겼다. 뜨거운 열기가 나의 등을 떠밀었는지도 모른다. 그때 알게 되었다. 내가 바다에서 만난 친구는 인어라는 사실을. 그제야 모든 것이 한꺼번에 이해되었다. 그 애가 그림자 방향이 바뀔 정도로 오래 잠수하던 것. 자맥질을 하던 그 애 옆으로 지느러미 하나가 반짝거렸던 것도. 다만 물가로 나오면 지느러미는 온데간데없는 여느 아이와 다름없는 모습이었다. 옷가지로는 부족한 몇 가닥의 미역을 제외한다면.
조금씩 커가면서 나는 뭍에서도 친구들에 생겼고, 차츰 바다와 멀어졌다. 내가 바다에 나가 놀지 않는 날이 늘어날수록 그 아이가 나타나지 않는 날도 늘어갔다. 그렇게 그 애는 나의 어린 시절과 함께 한동안 잊혀있었다.
열여섯 되던 해, 나는 왕궁에 허드렛일을 거드는 신분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궁정 시녀가 된 것이다. 외딴 바닷가 마을 허름한 집에 살던 내게는 과분한 자리였다. 하마터면 산 건너편에 아버지뻘 되는 남자에게 팔려갈 뻔한 것을, 평소 미사에 빠지지 않는 나를 기특하게 여기신 신부님이 연줄을 대어 왕궁에 자리를 알아봐 주셨던 것이다.
처음 성문을 통과하던 날은 모든 게 놀랍기만 했다. 꿈을 꾸고 있는 건가 생각이 들 정도로 발이 둥둥 떠다녔다. 도무지 실감이 나지 않으면 벽돌 바닥과 대리석 계단을 발로 꾹꾹 눌러가며 걸어 다녔다. 그곳은 모든 것이 넘쳐나는 곳이었다. 거리는 갖가지 물건들과 사람들, 말과 병사들로 붐볐다. 그래도 성에서 생활은 금방 적응이 되었다. 무엇보다 배부르게 먹을 수 있었고 할 일이 끝도 없이 이어졌다. 고단함도 느꼈지만 매일이 새로웠다. 나는 꽃이 가득 핀 정원에서 부지런히 꽃가루를 나르는 신참 일벌이었다.
“왕자님이 웬 벌거벗은 벙어리 처녀를 데려왔다지 뭐야.”
다른 시녀들이 수군거렸다.
“바다 해변에 쓰러져 있었다네.”
“마음씨가 착하신 왕자님이 그냥 지나치실리 없지.” 시종들과 시녀들은 낯선 등장인물의 외모를 입에 올리며 왕자에 대한 칭송을 이어갔다.
왕자님. 그는 이 나라에서 가장 귀한 분이 될 사람이다. 성 안에 어느 광장 중앙에 그의 동상이 우뚝 서있었기 때문에 누구나 그 생김새를 잘 알고 있었다. 왕자라는 것만으로 사람들이 우러러보기 충분했지만, 훤칠한 체격과 남다른 외모로 더욱 추앙받는 존재였다.
등불 여러 개가 해처럼 환해진 저녁시간. 연회장에서 그릇과 집기 따위를 나르던 내 앞을 누군가 막아섰다. 왕자님과 바로 그 낯선 이국의 여인이었다. 익숙한 느낌… 바다를 닮은 눈동자… 다정한 듯 묘한 미소를 띤… 그는 바로 나의 바다친구였다! 왕자님의 특별 손님과 시녀가 손을 꼭 마주 잡은 뜻밖의 장면에 왕자는 잠시 놀란 눈을 했지만 곧 예의 태연한 왕족의 태도로 돌아갔다.
그날 이후 나는 바쁜 하루에 틈틈이 그 애를 보러 갔다. 그 애는 왕자님을 기다리는 지루한 일과 속에서 나의 등장을 무척 반가워하고 있었다. 어릴 적 기억을 덮고 있던 뿌연 먼지들이 날아가며 우리는 곧 이전처럼 가까워졌다. 그 애는 조금만 걸으면 쉬이 피곤해했기 때문에 나는 물을 가득 담은 통을 가져와 그 애의 발을 식혀 주고는 나란히 앉아서 시간을 보냈다. 주로 혼자서 그간의 일을 떠들곤 했다. 어릴 적 바닷가 동네 이야기, 내가 궁에 들어오게 된 사연, 여기저기서 주워들은 이야기들… 내 친구는 알아듣는지 어쩐지 가만히 듣고 있다가 미소를 지었다. 왜 아무 대답도 못하는지 지느러미는 어디로 간 건지 궁금했지만 알 길이 없었다. 다만 내 친구가 더 이상 인어가 아니며 왕자님을 사랑한다는 것을 짐작할 따름이었다. 왕자도 나의 바다친구를 아낀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왕자님은 바쁘기로는 시종보다 못한 존재였다. 여러 회의에 참석하고 외국어나 검술 따위를 공부하고 백성들을 시찰하고 거의 저녁마다 열리는 연회에도 참석해야 했다. 내 친구는 날이 갈수록 빛을 잃어갔다. 그 애가 어떤 곳에서 왔는지 모르지만 이곳과는 퍽 다른 곳이리라. 나와 함께 있을 때 미소를 보이긴 했지만 하루가 다르게 몸이 말라갔다. 꺾어진 꽃처럼 시들어가는 게 내 눈엔 분명하게 보였다.
“지금 네 얼굴이 어떤지 알아? 들여다봐. 거의 시체 같다고. 너는 바다에 있어야 해.”
나는 괜스레 그 애에게 화를 내고 있었다. 곧 그 애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그리곤 손으로 자신의 목과 다리를 가리키며 고개를 연신 가로저었다.
“왜 그래? 바다로 갈 수 없는 게 네가 소리 내지 못하는 거와 관련 있는 거야? 지느러미는? 네 꼬리는? 이제 안 생기는 거야?”
고개를 떨구며 작아지는 그 애를 보며 나는 더 다그칠 수가 없었다.
얼마 후 왕자님의 결혼식이 있었다. 커다란 배에서 성대하게 치러진 행사였다. 나는 정신없는 와중에 그 애에 대한 걱정으로 실수를 연발했다. 몇 시간에 걸친 소란스러움이 지나가고 어느 순간 사방이 고요해졌다. 다들 먹고 마시고 취해서 곯아떨어졌다. 나는 그 애를 찾아 헤맸다.
뱃전에서 바다를 응시하며 몸을 떠는 그 애를 보았다. 손에는 단도가 들려있었다. 덜컥 겁이 났다. 그건 칼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었다. 그 애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서늘함이었다. 곧 정신없이 다가가서 그것을 낚아챘다. “아얏!” 그 바람에 내 손에 상처가 생겼다. 풍덩. 단도는 바닷속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툭 툭 툭. 내 손에서 흘러나온 붉은 액체가 그 애의 발등으로 떨어졌다. 그 순간이었다. 주변이 서서히 환해지는 걸 느꼈다. 천천히 그러나 느닷없이. 그 애의 발이 다리가 피부와 얼굴이 반짝이는 기운을 되찾고 있었다. 마법이었을까? 그 애는 성에서 나를 재회할 때처럼 환한 미소를 띠고 마주 보며 내 손을 잡았다. 고마워… 란 말이 들린 것 같았다.
그 애가 떠난 후 나는 혼자가 되었다. 이제는 성을 떠나 바닷가에 자리한 어느 수도원에 들어왔다. 수녀가 되기 위한 수행을 밟아나가는 중이다. 기도와 공부로 하루를 채워가는 사이에 그간의 일을 떠올리곤 한다. 그 애는 잘 있을까?
촤아. 파도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린다. 그 애가 헤엄치는 소리일까?
햇살이 바다에 부딪히며 보석처럼 부서진다. 그 애가 올라온 걸까?
나는 바다를 응시하고 바다는 나를 향해 미소 짓는다. 이제 괜찮아. 잘 있어. 걱정 마. 바다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인어공주의친구가있었다면 #안데르센동화재창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