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원 작가의 강의를 듣고
중학교 2학년 생활통지표에 기록된 담임선생님 의견란 중에서 기억에 남는 한 문구가 있었다.
…좋고 싫은 것이 확실합니다…
보통은 이럴 때 예상되는 흔한 문구들이 있다. 성실하다거나 교우관계가 원만하다거나 학교행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등 '참 잘했어요' 도장 같은 찍어낸 말이다. 나의 생활기록란 대부분 그런 뻔한 문장들로 채워졌다. 그런 말들 사이에서 유독 이 문구는 볼드체 처리된 듯 눈에 띄었었다. 바라보기에 따라 그냥 지나칠 수 있는 말이었지만, 내가 생각하는 나와는 퍽 다르기에 생소했다. 스스로를 별반 의견이란 게 없는 무난한 성격에 목소리 작은 아이라 여겨왔기 때문이다.
내가 호불호가 확실하다고?
선생님은 말수가 적고 내성적인 내게서 대체 어떤 면을 보시고 쓰신 걸까?
그 문장은 이후에도 늘러붙은 양 가끔 생각났다.
평소에는 시야에 없지만 팔을 잘못 놀려서 뒤를 부딪치면 찡한 느낌으로 얼얼해지는 팔꿈치처럼.
그렇게 기록되려면 나는 이런 사람이 되어야 했다.
무엇을 좋아하는지 알고 표현을 할 줄 아는,
스스로에 대해 잘 이해하고 안목이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이 되고 싶긴 했다.
어쩌면 선생님의 한 문장은 하나의 기준점이 되어 은연중에 나를 만들어 주었는지도 모른다.
며칠 전 어느 인문학 작가분의 강의를 듣게 되었다.
한국인은 선택과 질문을 많이들 어려워한다고 한다. 평소의 나도 어떤 말을 꺼내기 전에 듣는 상대의 기분이 어떨지 생각해서 망설일 때가 있다. 메뉴나 물건을 고를 때는 주변 사람들을 의식하며 고민하기도 한다. 가령, 여럿이 함께 음식점에서 가서 메뉴를 주문할 때 뭐 먹을 거냐는 질문에 너는 뭐 먹겠느냐고 반문하는 예도 흔하다.
몇 년 전 오바마가 미국 대통령이었던 시절에 우리나라를 방문했던 한미정상회담 기자회견장에서 한국기자단은 아무도 질문하지 않았다는 일화가 있다. 여러 차례 기회가 주어졌는데도 불구하고 끝내 한 명도 손들고 질문하지 못했다고 하는 소식을 듣고 막연히 부끄러움을 느꼈던 기억이 있다.
강의 내용에 그 일화가 소개되었다. 작가분은 한국기자단이 질문을 못 했던 이유가 어쩌면 준비를 못 했다거나 능력이 없었던 식의 문제가 아닐 수 있다고 했다. 바로 '관계'에서 그 이유를 찾아볼 수 있다고 한다. 기자회견이라는 공개석상에서 어떤 발언을 할 때 한국기사는 직속상관과 데스크, 편집부 등 여러 관계의 입장과 시선을 줄줄이 연상하며 따져보았을 거라고 했다. ‘관계’안에서 사고하는 것이다.
동양적 사고는 맥락을 보며 집단을 고려하는 사고가 강하다. 질문이나 말을 떠오르는 데로 바로 꺼내놓지 못하는 거다. 관련된 사람들의 반응을 두루 고려하고 전체를 보려고 하는 경향 때문이다. 그렇기에 의견을 내거나 질문을 하는 행위가 그 자체로 매우 어려운 일이 된다.
강의를 진행한 작가분은 아래와 같이 말씀하셨다.
전체를 바라보는 시선에서 벗어나 작은 지점에 집중하자.
가치판단의 기준을 내 안에 세워 나만의 관점으로 바라보자.
그래야 어떤 내용이든 '주장'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내게 반대하거나 다른 의견이 있을 수 있다. 그걸 두려워하거나 피하지 말아야 한다. 반대의견이 있다면 말 그대로 반대될 가치가 있는 것이라 했다. 모두가 동의한다면 그 의견은 새로운 것이 아니거나 당연한 이야기일 거라고 한다.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안목 있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자신만의 시선을 만들어야 한다. 흔한 단어들을 새롭게 정의해보며 시작해보자. 예를 들어, 낙엽이 누군가에게는 나비처럼 또는 댄서처럼 보일 수도 있다. 사물을 다르게 보려고 할 때 나만의 시선이 만들어진다. ‘시’ 또한 다르게 보는 데서 출발한다.
무엇보다 동양적 문화안에서 체화된 '관계를 중시하는 관념'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강조했다.
아이가 밥을 잘 안 먹고 남길 때 많은 부모가 꺼내는 말이 있다.
"네가 밥을 남기면 그걸 키우느라 애쓰신 농부 아저씨 마음이 얼마나 속상하겠니?"
그럴 때마다 아이는 얼굴도 모르는 타인의 마음마저 헤아리며 자꾸 누군가의 눈치를 보게 된다.
대신 이렇게 말해보라고 한다.
"네 몸이 튼튼해지려면 여러 영양소가 필요해. 식탁에 있는 음식을 골고루 먹으면 할 수 있단다."
그러면 자신의 몸을 위해, 자신의 시선에서 판단하고 그 가치를 아는 사람으로 성장하도록 도와줄 수 있다.
물론 전체와 타인을 고려하는 것도 필요한 지점이 있다. 그러나 그런 방식으로는 생각을 정리하거나 의견을 만들기 어렵다. 우선 하나의 대상에 집중해서 자신의 관점을 만든 다음에 나머지로 확장해보자고 했다. 지금 여기 나의 내면에 멈춰서서 부분에 집중할 것을 권하는 강의내용은 신선한 여운을 남겼다.
다르게 생각하며, 나만의 관점을 가지고,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삶을 살고 싶다.
나는 여전히 ‘좋고 싫은 것이 확실한’ 사람이 되어 가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