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의 확산세가 연일 무섭게 번지고 있다.
지난번 산후조리원 사전 투어를 다녀올 때만 해도
9월이면 지금보다 더 나아지지 않을까 희망이 보였었다. 백신 접종이 순차적으로 진행되고, 확진자가 여전히 많긴 하지만 증폭되진 않았기 때문이었다.
7월 초 거리두기 단계를 완화한다는 말이 오가기가 무섭게 갑자기 확진자가 천 명을 넘어버리더니 사상 최대다 4단계다 뭐다 하며 난리통이 되었다.
덕순이가 태어날 즈음에 세상은 지금보다 좋아질 줄 알았는데 암담하고 실망이 컸다.
하지만 모두가 간신히 버티는 지금 세상에 몹쓸 전염병을 막기 위해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그저 마스크 한 장이 날 보호해주는 유일한 방패막이일 뿐이었다.
이 시국에 나는 한 아이를 품고 있는 임산부다.
임산부는 코로나 고위험군에 속한다. 면역력이 떨어져서 코로나에 걸리기도 쉽고, 중증으로 갈 위험도 높고, 아직 태아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 지도 검증이 채 안되었다.
남들보다 더 배려받고 보호받아야 하지만 현실은 그렇게 녹록지 않았다.
아직 내가 근무하는 회사는 재택근무가 어색한 곳이다. 회사에 출근해야 할 수 있는 일도 많을뿐더러 재택근무를 신뢰하지 않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아주 잠깐, 처음으로 4단계가 시행되었을 때 단 이틀만을 재택근무할 수 있었는데 그것도 임산부인 덕분에 배려받은 것이고
나머지 팀원들은 모두 출근을 했다. 말이 4단계지 도무지 예전보다 더 강력한 조치라는 게 실감이 안 났다.
나는 여전히 대중교통을 이용해서 출퇴근을 하고,
구내식당이 없기 때문에 밖에서 점심을 해결해야 하는데 무엇이 강력한 건지 알 수 없었다.
다만 이 혼란스러운 시국에 나와 내 아이를 지키기 위해 나도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했다.
출퇴근을 월 25만 원이란 비싼 돈을 내고 서울의 공영주차장 정액권을 끊고 남편과 차로 움직였다.
임신한 몸으로 힘든 것도 있었지만 북적거리는 지하철과 버스만 피해도 덜 위험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예전에는 내가 먼저 퇴근을 하기 때문에 오빠를 안 기다리고 먼저 지하철을 타고 집에 가는 날이 많았는데 요즘에는 끝까지 오빠를 기다렸다 같이 차를 타고 갔다. 매일 천 명이 넘는 확진자가 나오는 상황이 심각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또한 매일 나가서 먹던 점심 식사를 혼자서 해결했다. 처음에는 자리에서 혼자 먹는 게 어색하고 심심했지만, 이렇게라도 나 자신을 지켜야 했다.
같은 팀 사람들이야 매번 회의하고 커피를 마시고 마주치기 때문에 내 노력으로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저 우리 가족처럼 건강하길 믿는 수밖에 없었다.
제일 위험해 보이는 건 불특정 다수가 모이는 식당이었다. 사람들이 마스크를 벗고 여름이라 에어컨 바람이 실내를 가득 돌고 있기 때문이었다.
회사 근처 식당들 중 거리두기를 제대로 실천하는 곳도 흔치 않았다. 다들 점심 한 때 바짝 장사하는 곳들이라, 회사원들이 우르르 오면 다닥다닥 붙여놓고 최대한 사람을 많이 받으려 했다.
그리고 기분 탓인지 모르겠지만 식당 사장님들도 그다지 경각심이 있어 보이지 않았다. 하루는 마스크를 벗고 도시락을 포장하면서 재치기를 하는 사장님을 보고 경악할 뻔했다.
때문에 최대한 식당을 피하고자 혼자 자리에서 밥을 먹고 있는데, 덕순이를 위해서라면 이 정도는 감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런 시국에,
이런 곳에서
매일매일 평일에 와야 하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엄청난 위험이었다.
덕순이는 아직까지 나와 한 몸이기 때문에 내가 조심하지 않으면 함께 위험해질 수 있다는 생각이
몹시 두려웠다.
차라리 나 혼자 걸리고 아픈 거라면 좋을 텐데, 아무 잘못 없는 우리 아기가 아플 거란 생각을 하면
너무 속상했다.
이제 휴직까지 한 달이 남았다. 예전 같았으면 평범하게 일을 마무리하고 인수인계하느라 바쁠 한 달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시국에 남은 한 달은 나에게 있어 버티고 버텨서 무사히 보내야 할 한 달이다.
매일매일이 고비인 날
부디 나도 건강하게,
덕순이도 건강하게,
우리 모두 아프지 않게 만날 수 있길 기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