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주씨 Feb 05. 2020

당신이 화성에 가져갈 수 있는
단 한 가지

당신이 외로움을 대하는 감정에 대해서

영화 감상을 위한 일회성 소모임의 뒤풀이 자리였다. 가운데 치킨과 맥주를 두고서 사람 여섯이 둘러앉았다. 앞서 자유롭게 영화 감상평을 나누고 난 뒤여서 그런지 본인의 이야기를 하는데 어색함이 없었다. 이 소모임의 상위에는 정기적인 ‘소셜 모임’이 있는데 그곳에도 참여했던 한 명이 이야기를 꺼냈다.


“거기에서는 자기소개를 하는데 꽤 특이하게 해요. 나이가 몇 살이고 무슨 일을 하는지 묻지 않고요. ‘당신이 화성에 가게 되었고 딱 한 가지 만을 가져갈 수 있다. 무엇을 가져가겠는가?’라는 질문을 해요. 사람 수만큼 다른 답변이 나오는 게 신기하고 재밌더라고요.”


요즘 소모임이 많아짐에 따른 각종 부작용을 방지하기 위해 개인 정보를 묻지 않는 것이 일종의 관례임은 알고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꽤 신선했다. 지연, 혈연, 학연이 얽히고설킨 대한민국 사회에서 나이, 출신지, 직장 같은 것들 없이도 나를 표현할 수 있을까? 이야기가 나온 김에 그 자리에서도 한 번 이야기해보기로 했다. 물과 식량 등 기본적인 의식주는 갖춰진 상태를 전제로 하고서, 과연 당신은 화성에 단 한 가지, 무엇을 가지고 갈 것인가?


“저는 엄마요. 엄마랑 제일 친하거든요.”

“어, 나도요!”

“에이, 사람은 빼고 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그러면 다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이랑 간다고 할 것 같은데.”

“그렇긴 하네. 그럼 사람은 빼고 물건만 얘기해볼까요?"


제한사항이 하나 생겼을 뿐인데 전에 없던 침묵이 돌았다. 가볍고, 단순한 질문이었음에도 모두의 얼굴에 진지함이 깃든 것이 보기 재밌었다. 이 이야기가 나오기 전, IT 직종에서 일한다고 밝힌 앳된 얼굴의 여자분이 말했다.


"저는 베개요. 자는 게 저한테는 엄청 중요하거든요. 화성 여기저기 탐험하고, 피곤해지면 그 자리에서 바로 자면 좋을 것 같아요."

"음... 저는 넷플릭스요. 최근에 프렌즈 정주행을 시작했는데 진짜 양이 많더라고요. 제 취향만 골라 봐도 죽을 때까지 다 못 볼 것 같아요."


"M님은요?"

"저는 약이요."

"약? 어디 아프세요?"

"아니요."


처음 보는 사람들에게 이런 얘기를 해도 되나, 괜히 분위기 어색해지는 거 아닐까 하는 생각이 언뜻 들었지만 살짝 울렁거리는 마음과 함께 말이 튀어나오고야 말았다. 


"먹으면 죽는 약이요. 혼자 화성에 남는다면 그냥 죽고 싶어요."




화성은 아니었지만, 작년 3월 홍콩으로 여행을 갔을 때 '극단적 혼자'를 경험했었다. 함께 여행을 갔던 선배가 일정상 먼저 떠나게 되어서 트램 정류장까지 그녀를 배웅하고 호텔로 돌아왔다. 그새 익숙해진 호텔 방의 문을 닫고 오롯이 남아있는 내 짐과 혼자인 나의 존재를 체감했을 때 내가 느낀 건 '두려움'이었다. 심심하다, 외롭다의 수준이 아니라, 말 그대로 무서웠다. 아담하고 조용해서 좋았던 방이 오히려 내가 정말 혼자이고, 아무도 곁에 없다는 사실을 부각했다. 그 사실이 내 정신을 마구 헤집고 당연했던 호흡마저 가빠질 때, 무작정 밖으로 나왔다. 부슬비가 내리던 늦은 밤이었는데, 완차이에 있던 호텔에서 코즈웨이 베이까지 무작정 걸었다. 젖은 공기 속으로 울려 퍼지는 경적 소리, 어수선히 내 옆을 스쳐가는 사람들에 마음이 조금씩 안정되었다. 한편으로는 끊임없이 카카오톡을 보냈다. '엄마, 자?', 'A야, 자?'


'왜'라는 근원적인 이유는 차치하고서, 홍콩에서 그리고 '약'을 가져가겠다고 말했던 얼마 전까지도 내게 '외로움'이란 두려운 존재였다. 편히 즐기거나 혹은 극복해야 할 무언가가 아니라, 나를 압도하고 굴복시키는 존재. 오랜 시간 동안 그래 왔다. 주말에 아무런 약속 없이 조용한 집에서 눈을 뜨는 것은 휴식이 아니라 고역이었다. 그때마다 나는 친구와 갑작스레 약속을 잡거나, 노트북을 싸들고 근처 카페로라도 나갔다. 나는 무엇이라도 하며 바삐 사는 것을 좋아해서 그런 줄 알았지만, 아니었다. 혼자인 것을 무서워해서였다.


그런 나에게 전 남자 친구가 헤어지며 한 말은 '어차피 사람은 혼자야. 부모님이나 친구가 평생 옆에 있어줄 것 같아? 다른 사람한테 그만 좀 기대. 제발 혼자서 잘 지내.'였다. 맞는 말이었다. 다만, 피하고 싶었고, 피할 수 있을 줄 알았던 똥 폭탄에 친절하게 내 이름표까지 붙여서 건네받은 기분이었다. 열렬히 사랑했던 연인과 헤어진 그 시기에, 함께 살던 룸메이트는 사택으로 들어갔고 얼마 남지 않은 싱글 친구들이 하나둘씩 청첩장을 건넸다. 2019년 마지막 숙제는 혼자 살 집을 계약한 것이었다. 결국 내 앞에 놓인 미래는 철저히 외길이었고, 그를 에둘러갈 샛길의 가짓수는 점점 줄어들었다. 당장의 외로움을 모면하기 위한 일시적 만남들은 더 이상 성사되기 어려웠으며, 성사된다 하더라도 이후에 오는 허함이 더 컸다. 인생에서 이 똥 폭탄을 더 이상 회피할 수 없음을 직감했다. 내가 혼자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느라, 피해지지 않는 것을 피하려 애쓰느라 너무나도 많은 시간과 감정을 소비했다. 인정하자. 그래, 나는 혼자야. 


'외로움'이 필연적인 존재임을 안다. 내가 의지하고, 사랑하는 누군가들은 예상치 못한 어떤 일로도, 혹은 자연스럽게 죽어서라도 나를 떠날 수 있다. 그렇게 언제, 어디서, 어떻게든 나는 혼자일 수 있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그렇다. 하지만, 모두에게 참으로 공평한 이 굴레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끌어가느냐는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혼자만의 시간을 조용히 음미할 수도 있을 것이고, 다양한 외부 활동을 하며 재미를 찾아갈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간의 나는 너무 힘들었다. 내가 혼자이고, 외롭다는 사실을 인정하기조차 쉽지 않았는데, 하필 그 사실이 참으로 두렵기까지 해서 툭하면 눈물이 났고, 가끔은 호흡마저 가빠왔다. 어떻게 상대해볼 용기는 내게 사치였다.


살아있다면 필연적일 외로움을 피하는 방법은 죽는 것 밖에는 없겠지만, 일단 내가 사는 이 곳은 화성이 아니라 서울시 영등포구 어드매이고, 먹으면 죽는 약을 쉽게 구할 수도 없을뿐더러 정말로 죽을 용기는 내게 전무하며, 무엇보다 살아야 될 적지 않은 이유들이 곁에 있다. 죽어서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결국 살아서 당연한 것이라면, 적어도 두려워하고 싶지는 않다. 언제 덮쳐올지 모르는 형체 없는 공포에 몸을 사리기에도, 혹은 적극적으로 도망치기에도 나는 이미 지쳤다. 시간은 점점 빠르게 지나가고, 감정, 체력 등 내가 가진 것들 역시 빠르게 소진되어 가고 있기에 도저히 헛되이 쓸 수가 없다. 불가능한 일에 라면 더더욱. 이제 내게 남은 것들을 외로움을 두려워하는 데 쏟기보다, 두려워하지 않는 데 쏟고 싶다. 


아직 어떻게 해야 할지까지는 모르지만, 외로움에 대한 내 감정을 명확하게 인지하고 인정하게 된 것만으로도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다. 적어도 무엇을 상대해야 하는지는 알았고 무엇보다 그동안 이유없이 무작정 힘들어했던 나 자신을 이해하고, 토닥여줄 수 있게 되었으니.


그래서 앞으로도 끊임없이 자문하게 될 것 같다. 솔직히 당장은 무어라 말할지 모르겠지만, 부디 미래의 내 답이 과거의 내 답과 다르기를 바란다. '나, 화성에 가게 된다면 무엇을 들고 가고 싶니?'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