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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씨 May 10. 2020

연애의 끝에서 만난 시작점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하는 그곳

퇴근길에 안양천을 따라서 걷거나, 자전거를 탈 때가 있다. 해가 일찍 지던 2019년 겨울에는 흐르는 강물을 멍하니 보았다. 그렇게 몇 분, 몇십 분을 보내다 보면 항상 다다르는 생각은 같았다. ‘죽고 싶다.’ 뛰어들고 싶은 데 거창한 이유는 없었다. 그냥 생각하는 자체를 멈추고 싶었다. 당시 나는 스스로를 괴롭히는 생각에 끊임없이 괴로워했고, 항상 울었다. 하지만 지금 2020년 봄에는 다르다. 이전보다 조금 늦게 지는 해에 감사하며 길 가의 조그만 들꽃 사진을 찍는다. 먼발치에서나마 만개한 벚꽃의 분홍색에 취하고, 비릿하기까지 할 정도로 생생한 풀내음도 맡아본다. 집에 도착해서는 샤워를 하고, 좋아하는 책을 읽거나 드라마를 본 뒤에 감사하고, 또 대견한 마음으로 잠자리에 든다. 무언가 큰 변화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저 내 선택이었다.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끝에 머무를 것인지, 혹은 어떻게든 써나가 볼 수 있는 시작에서 한 발짝씩 떼 볼 것인지. 어디에 있을지를 택하는 것만으로도 내 시간 속 모든 순간들이 다르게 다가왔다. 되돌아보면 그렇게 유별날 정도의 큰일은 아니었다. 서른이 되어서야 한 두 번째 연애에 푹 빠졌을 뿐이고, 두 달 간의 만남 이후에 일방적으로 차였을 뿐. 그렇다고 상대가 바람을 폈다거나 하는 막장은 아니었고, 남들 다 얘기하는 ‘성격차이’ 때문이었다. 그뿐이었는데, 그 여파는 절대로 작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인생에서 가장 큰 파도였다. 하필이면 그 ‘성격차이’가 평생의 트라우마인 병적인 외로움과 맞부딪혀 증폭되는 바람에 이별 후 두 달 동안 매일 새로운 종류와 정도의 우울감과 조우했다. 돌이켜 봤을 때 그 우울감의 근원은 내가 서있는 기준점이었다. 나는 어찌해볼 수도 없는 관계의 끝에서 살았다. ‘내가 그때 여행을 가지 않았더라면?’, ‘그때 화를 내지 않았더라면?’하는 식으로 끊임없이 기억들을 되짚었다. 과거의 모든 것들이 내 잘못처럼 여겨졌고 상대의 행동, 말들에 심히 의미 부여하며 자존감 역시 모래성 마냥 잘게 부서졌다. 원하지 않는 끝에 선 내 일상은 항상 후회로 가득 찼고, 그 속의 나는 무력했다. 이유 없이 눈물이 나는 때가 잦아졌다. 그래서 생각했다. 죽으면, 이렇게 생각하는 것도 멈출 수 있지 않을까 하고. 그렇게 2019년이 가고, 2020년이 왔다. 새로운 해를 맞은 내 다짐은 ‘행복하고 싶다.’가 아니었다. ‘우울하고 싶지 않다.’였다. 어찌 보면 소박하고 어찌 보면 거창했지만, 정말로 간절했다. 적어도 회사에서 회의하는 중에 눈물이 나는 일 따위는 더 이상 없었으면 해서였다. 서른 하나라에 접어들어 하루하루가 아쉬운 시점에, 바뀐 해가, 그리고 시간이 아까웠다. 그래서 손에 피가 나도록 쥐고 있던 2019년 여름의 두 달을 놓기로 했다. 그렇지 않으면 다가올 어느 순간도 안온할 수 없음을 인정해야 했다. 드라마틱한 환경의 변화 없이도, 그저 매 순간 ‘끝’을 의식했다. ‘끝났어.’라고 되뇌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편치 않던 마음이 갈수록 잔잔해졌다. 그렇게 ‘끝’을 받아들이게 되자, 또 다른 의미의 ‘시작’을, 무한한 가능성을 꿈꿀 수 있게 되었다. 내가 진심으로 바라는 것이 무엇일까. 단순히 헤어진 전 연인을 만나는 것이 진실한 목표였나 생각하면 그것은 아니었다. 그저 나와 잘 맞는, 좋은 사람을 만나 서로 사랑하고 의지하며 사는 것이 궁극적으로 바라는 바였다.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내가 어찌할 수 없는 것에 매달려서는 도무지 답이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하기로 했다. 비록, 좋은 사람을 만나게 되는 것은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해도, 언제든 좋은 사람을 만났을 때 인연을 이어갈 수 있도록 내가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은 할 수 있었다. 전 연인이 나에 대해 말했던 단점 대신 장점들을 되짚어가면서, 좋아하는 것, 잘하는 것을 찾기 시작했다. 스스로 좋은 사람이 된다면 언제 어디서 새로운 인연을 만났을 때 나다운 모습으로 다가갈 수 있다. 그 좋은 사람에는 혹시라도 내가 죽고 못살았던 옛 연인이 포함되어 있을 수도 있고, 아니어도 그에 준하는 혹은 그 보다 나와 맞는 사람이 포함될 수도 있는 것이다. 설령 당장 인연을 만나지 못한다 해도, 괜찮을 것이다. 새로운 시작으로 인해 나는 내 스스로를 따뜻하게 안아줄 수 있게 되었고, 또 좋은 사람으로 거듭날 수 있게 되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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