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향적인 인간에게 주는 환상 같은 것
이미 친해진 사람들에게는 믿지 못할 이야기일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꽤나 내향적인 성격으로 평생을 살아왔다. 특히나 낯을 심하게 가리는 편에 속하지만 실제 성격은 망나니인 탓에 오해를 겪기도 했다. 터놓고 대화할 수 있는 상대가 되기까지 남들보다 많은 시간이나 상황같은 것들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모든 이들에게 본연의 모습을 드러내는 데 어려움이 있었다. 깊게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의심할 여지 없는 A형으로, 친한 친구들은 무조건 AB형으로 진단하는 이중적인 성격을 깨기 위해 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노력이 필요했다. 대학 전공도 외향적인 친구들이 판을 치는 신문방송학을 선택한 덕에 억지로라도 남들 앞에 나가 발표하거나 의견을 개진해야 하는 경우가 빈번하게 발생했다. 아르바이트 또한 무조건 면대면으로 마주쳐야 하는 서비스 업종만 선택했다.
어쩌면 나의 내향성은 다수의 집단 안에 속해있을 때 나에게 발언권이 주어지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에 한정되어 있을 수도 있겠다. 여러 명의 직원이 보는 앞에서 손님 한 명 응대하는 데도 얼굴이 시뻘개지고 손이 떨리던 학생이 세월의 힘이 보태주었다한들 너무나 자연스럽게 영업사원 아저씨들과 농담 따먹기 쯤은 가벼운 직장인이 되었으니 말이다. 일대일로 마주했을 때는 대화 주제를 먼저 꺼낸다거나 말이 끊기지 않게 이어가는 데 예전부터 크게 두려움이 없었던 듯하다. 말하는 것을 두려워했지만 한 사람과 마주했을 때는 강박관념이 있는 듯이 처음 보는 사람과도 어떤 말이든지 내뱉곤 했다.
대학생이 되어서 누구나 한 번쯤은 해본다는 소개팅에서도 그러했다. 사실 소개팅에서 말을 잘 해야 하는 의무는 어떤 상황에서든 동일하게 주어진다. 상대가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소개시켜준 사람의 체면을 생각해 나쁜 인상을 주지 않기 위해 열심히 대화를 늘어놓거나, 마음에 들 경우에는 나에 대한 좋은 인상을 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게 된다. 사회인이 되어서도 마찬가지였다. 집단 내에서 마음이 맞는 사람과 선택적인 관계 맺기가 가능했던 시절과는 다르게 상대방과 무조건적인 친분을 쌓아야 하는 날들이 많아진다. 그러한 의무로부터 벗어나게 된 순간, 내 앞에 마주한 사람과 친밀한 대화를 이어나갈 수 있을까는 미지수다.
현실에서는 없을 법한 환상 같은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비포 선라이즈>가 많은 사람들의 인생 영화로 꼽히는 이유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번쯤은 내 인생에 있었으면 하는 사건을 그리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절대 인연이 될 수 없을 법한 같은 열차칸 안의 두 남녀가 하루를 보내게 된 데는 짧은 대화가 가장 큰 발판이 된다. 단순히 호감 가는 외모뿐이었다면 기억에 보존조차 되지 않았을 타인이 ‘어릴 적 물안개 속에서 돌아가신 할머니의 유령을 보았다’는 문장을 내뱉는 순간 운명처럼 자리 잡는다. 그만큼 상대방이 어떤 대화 주제를 들고 오느냐는 그에 대한 호감 여부를 결정짓는 데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외형적인 부분 외에는 그 사람에 대한 가치 판단의 기준이 없는 첫만남에서 대화는 그 어느 때보다 강력한 권력을 가진다.
내향적인 성격과 무관하게 오직 두 사람만이 나눌 수 있는 대화의 장에서 발언의 기회는 꽤나 평등한 편이다. 그렇기에 다수의 사람들 안에서 발언권을 따내야 할 필요 없는 환경은 나에게 유리했고, 대화에 자신이 없었던 나조차도 연애 경험이 없었던 당시 이 영화를 처음 보며 ‘제시(에단 호크)’와 같은 대화 상대가 나타나길 꿈꿨었다. 자연히 이상적인 대화 상대에 맞추어 나 자신도 ‘셀린(줄리 델피)’과 같은 대화를 진행할 수 있는 사람인가에 관한 의문도 품었다. 어린 눈으로 보기엔 꽤나 높은 수준의 대화 주제를 누구 하나 지지 않고 그렇다고 이기려 들지도 않으며 자유롭게 나누는 장면 하나 하나가 환상을 품게 해주기에 충분했다.
너무 빠르게 낭만을 버렸나 싶긴 하지만, 어느 정도의 삶의 단계를 거치고나니 첫 만남에서 이루어지는 완전한 대화는 얼마나 이상적이었는가 생각하게 된다. 완벽하게 통하는 대화를 하였다 한들 첫 번째 대화에서 엿보게 된 상대의 모습이 모든 것을 말해주지는 않는다. 체면 차리는 성인이 된 두 사람이 주고받는 말에는 ‘나’라는 인간이 지식 수준이 낮아보인다거나 무시 당할 거리를 보이지 않도록 돕는 철저한 보조 장치들이 숨어 있다. 영화 속 예외적인 장면처럼 밀도 높은 관계는 첫 대화에서 이루어지는 경우가 거의 없다. 관계의 깊이는 두 번째, 세 번째, 그리고 그 이후의 대화에서 주고 받는 신뢰와 이해가 뒷받침되어 만들어진다.
이제 나는 예전만큼 첫 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 순간보다 앞으로의 과정이 나의 많은 것을 보여줄 수 있음을 알게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첫 만남의 환상보다 오래된 관계가 더 큰 위안으로 다가올 때가 있다. 동이 트기 전 하루를 시작하는 설렘보다 무사히 하루를 마친 자정이 더 편안할 때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