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와 작별한 교실(부제_ 'SKY캐슬' 애청자의 회고록)
나의 학창 시절에서 설렘이나 첫사랑 따위의 개념을 찾아보기는 다소 힘들다. 열두 살이 끝나가던 무렵 생소한 지역번호를 쓰는 곳으로 이사를 가게 되면서 핸드폰도 없던 그 시절 유년시절을 함께 보냈던 친구들과는 서서히 연락이 끊겼다. 나름 인생 최대의 격변을 겪은 나이를 지나 열네 살이 되던 해부터는 6년을 허허벌판인 댐 옆에 여학교만 셋이 모인, 공부하기에는 최적의 곳에서 생활했음에 더해 유일하게 이성을 만날 창구인 학원에도 발을 끊었다. 독서실이며 학원에서 오고가며 얼굴만 알게 된 이성 친구에게도 마음이 흔들리는 친구들의 이야기는 소설 속 일화처럼 남 일일뿐이었다.
이러한 성장 배경에도 불구하고 스물 둘에 방구석에서 혼자 보았던 영화 <러브 레터>는 어쩐지 나도 그러한 경험을 엇비슷하게 했던 것만 같던 착각이 일게 만들었다. 단순히 학창 시절의 첫사랑 회고록이라기보다는 사랑하는 누군가를 떠나보낸 적 있는 사람이라면 공유할 수 있는 감정을 그렸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가끔은 나라는 한 사람의 존재가 다른 사람의 인생에 남아 있을지 문득 궁금해질 때가 있다. 내가 세상의 중심이 아닌 타인에게는 그저 없어도 크게 상관할 바 아닌 무의미지는 않을까. 사람에 관한 기억력이 좋은 편인 나는 유치원 때 친구들의 이름도 몇몇 기억을 하곤 하는데, 유년 시절에 큰 환경 변화를 겪으면서 어쩌면 나의 열두 살 이전의 인생은 모두에게 잊혀졌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종종 하곤 한다. 하지만 영화가 나에게 내려준 답은 정도의 차이일 뿐 누구나 그의 인생이 타인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이다. <러브레터>에서 ‘후지이 이츠키(카시와바라 타카시)’라는 한 남자는 죽음 이후에도 다른 사람들의 생에 많은 변화를 준다. 그와 함께 했던 ‘와타나베 히로코(나카야마 미호)’는 이별을 겪으며 한층 성장하게 되고, 그저 이름이 같은 특이한 동창생으로만 그를 기억하던 ‘후지이 이츠키(나카야마 미호)’는 모르고 있었던 추억의 한 조각을 얻는다.
여자 ‘이츠키’는 우연히 ‘히로코’가 죽은 남자 ‘이츠키’의 옛 주소로 보낸 편지를 보게 되며, 짧지만 그에 대한 자신의 기억을 담은 답장을 쓰게 된다. ‘히로코’를 위해 시작한 편지였지만 그로 인해 잊고 있었던 추억을 하나 하나 떠올리게 되고, 추억의 장소들을 찾아보다 그가 꽂아놓은 학교 도서실 대출카드 뒷면을 통해 그 때는 이상하게만 보였던 남자 ‘이츠키’의 행동들이 자신을 좋아해서였음을 뒤늦게 알게 된다.
두 여자가 주고받는 남자 ‘이츠키’에 관한 편지는 ‘이츠키’가 몰랐던 첫사랑의 추억을 발견하게 되는 매개체이기도 하지만 ‘히로코’의 완전한 이별을 가능하게 해준 방편이기도 하다. 잘 알지 못해 오히려 잊을 수 없었던 사람을 보다 완연하게 이해하게 되면서 수년이 지나서야 그가 떠났음을 받아들이고 ‘나는 잘 지낸다’며 화답하게 된다. 그가 쉽사리 마음을 표현하지 못했을 만큼 좋아했던 첫사랑 상대가 있었음에도 시간을 지나와 자신을 만났듯, 지금 당장은 그를 잊지 못하는 자신 또한 미래에는 웃는 모습으로 회상할 수 있을 것임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한편, 현재 우리의 교실은 도서실 책 한 켠에 누군가를 향한 마음을 숨겨둘 수 있는 사연의 장소가 될 수 있을까. 2019년의 우리는 학창 시절의 아련한 첫사랑을 담은 90년대 영화보다 냉혹한 입시 전쟁을 다룬 드라마 <SKY캐슬>에 열광한다. 인간 관계를 배우고 적어도 하나쯤은 소중한 존재를 얻게 될 교실이라는 공간은 경쟁자들로 채워진 무한의 경기장처럼 변했다. 대개의 드라마에서라면 환경 차이를 넘지 못한 가슴 아픈 첫사랑으로 주목했을 ‘혜나(김보라)’와 ‘우주(찬희)’의 관계도 <SKY캐슬> 안에서는 대학 입시로 어긋난 욕망들에 의해 좌절되는 개개인의 인생을 보여주기 위한 도구로 쓰인다. 이웃 친구들조차 부모님 머릿 속엔 ‘전교 몇 등’으로 그려지고, 선생님에게조차 전교 석차로 평가받는 냉혹한 현실 앞에 진정한 친구 등의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어려운 일임에 틀림 없다.
나의 고등학교 3학년 시절도 이제는 어언 9년 전이 되어 요즘 세대라 말할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지만, <SKY캐슬> 속 교실 풍경에 공감이 안 가는 바는 아니었다. 지방이기는 하더라도 교육열이 꽤 센 지역이었던 터라, 분기별로 모의고사와 내신으로 종합 석차를 내 특별반 구성원을 발표했다. 운좋게 처음부터 그 좌석을 하나 얻기는 했으나 남은 3년 내내 석차가 발표될 시기마다 시험 한 과목만 망쳐도 다음 번에는 짐을 빼야 하는 것은 아닐까 매번 마음을 졸이며 살아야 했다. 일부 선생님들은 은연 중에 각 반마다 특별반에 들어가 있는 아이들을 확인하며 보이지 않는 선 같은 것을 만드는 데 일조했다. 야간자율학습을 할 때도 특별반 자습실은 따로 감독관이 들어오지 않아, 나는 어차피 보게 될거 pmp에 다운로드해 보게 되면 시간 낭비라는 논리로 엄마를 설득해 드라마 생방송을 보기 위해 중간에 빠져 나와 집에 가곤 했는데, 그마저도 특권이라 생각했던 친구들에게 볼멘소리를 듣기도 했다. 성적 몇 점으로 인해 학생의 자율성을 결정하고 같은 공간에서 공부하는 것마저 허락하지 않는 시스템은 평등한 관계 맺음의 장을 깨트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소중한 친구를 몇 안고 졸업하게 된다. 하지만 공부하는 기계처럼 몇 년을 살아내다보니 하루 종일 붙어서 생활해왔던 고등학교 친구들도, 성인이 되어 그 당시에는 겪을 수 없는 상황들을 마주했을 때 전혀 몰랐던 면모를 보게 될 때가 있다. 모든 면을 안다고 생각했던 친구들도 성인이 되면서 모르던 부분을 알게 되고 다시 서로를 이해하는 연습을 하게 되었다. 대학생이 되어 겪은 부모님과 떨어져 사는 일상이라던가 남자친구와의 이별 같은 것도 스무 살이 넘어서야 처음 대처하려니 영 쉬운 일이 아니었다.
사람을 만나고 이별하고 회고하는 일은 시기의 차이만 있을 뿐 누구나 겪게 되는 인생의 한 축이다. 그 대상이 가족이 되었건 친구나 연인이건 말이다. 마주할 수밖에 없는 관계의 맺고 끊음을 연습할 수 있는 기회는 흔치 않다. 그렇기에 인생의 큰 부분을 차지하는 교실 안에서의 생활 또한 관계 맺음의 연습장이 되어야 한다. 올해도 어김없이 다시 시작될 새학기의 풍경은 어떠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