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조수민 라이트랩 Dec 28. 2019

빛이라는 물감

빛을 이해하기 위한 이야기 (4)



회사에서의 매일이 전쟁터처럼 느껴지던 어느 날, 취미를 가져야겠다고 생각했다. 반드시 잘해야 하는 일들만이 내 삶을 덮고 있어서, 꼭 잘하지 않아도 상관없는 일을 하고 싶었다. 몇 가지 취미를 고민하다 대학 입시 때 열심히 했었던 수채화를 다시 해보고자 마음먹었다. 나는 곧장 화방으로 향했다.



화방은 또 다른 설렘이 있는 공간이다. 서점이 빼곡히 글과 그림이 채워져 있는 종이를 파는 곳이라면, 화방은 빈 종이를 파는 곳이다. 화방이라는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은 아무것도 그려져 있지 않은 수많은 백지와 캔버스, 그리고 그 빈 곳을 채울 수 있는 붓과 연필, 물감들이다. 가능성을 파는 곳이라고 하면 화방이 서점보다는 아마 한 수 위일 것이다.



나는 수채화용 고체 물감 팔레트가 있는 매대로 향했다. 크기는 아기자기하지만 가격은 아기자기하지 않은, 보기만 해도 소장욕구가 솟구치는 고급스러운 패키지와 컬러의 물감 팔레트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작은 것은 12색부터 시작해  24색, 36색... 오랜만에 크레파스에 욕심내던 어린 시절이 떠오르는 숫자들이었다.



이제 돈을 버는 사회인이 되었겠다 마음 같아서는 36색 물감을 지르고 싶었지만, 이 취미에 대한 갈망이 얼마나 갈지에 대한 확신이 없었던 터라 가장 작은 12색 물감을 집어 들었다. 역시 고체 물감은 어디에나 들고 다닐 수 있도록 간소한 걸 사는 게 맞다는 자기 위안과 함께. (물론 구매 후 팔레트를 가지고 집 바깥으로 다니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큰 맘먹고 산 12색 고체 수채화물감.




오랜만의 그림은 매우 즐거웠다. 집에 있던 맥주병을 시작으로 커피포트, 바나나, 딸기 등 보이는 것을 그려나갔다. 못했다고 혼내는 사람도 없고 실망할 사람도 없었다. 스스로가 대견했다. 입시 때도 해본 적 없던 '오직 나를 위해 그리는 그림'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알록달록하고 화려한 그림을 그려나갈수록 나의 그림들이 실제 대상에 비해 어딘가 부족한 색감을 가지고 있음이 느껴졌다. 12색의 물감으로는 토마토도, 딸기도, 장미도 모두 한 가지의 빨간색으로만 칠할 수밖에 없었고, 섞어서 색을 만드는 것에도 한계가 있었다. 팔레트의 색이 훨씬 더 다양했다면 훨씬 풍성한 그림을 그릴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장인은 도구를 탓하지 않는다지만, 다양한 색의 팔레트는 더 풍성한 그림을 그릴 수 있게 해주는 도구임은 어쩔 수 없는 사실이다.






물체는 색을 가지고 있지 않다. 



빨간 사과는 빨간색을 가지고 있지 않고, 노란 바나나도 노란색을 가지고 있지 않다. 심지어 우리가 사용하는 아름다운 색의 물감마저도 그 자신이 색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물체는 일정한 색의 빛을 흡수하고, 일정한 색의 빛을 반사하는 ‘성질’만을 가질 뿐, 우리가 보는 모든 색을 가지고 있는 것은 빛이다.



빛은 팔레트와 같다. 빛은 여러 색이 합쳐질수록 하얀색이 된다. (학창 시절 어렴풋이 가산 혼합과 감산 혼합을 구분하기 위해 노력해본 기억이 있을 것이다) 실제로 우리가 보는 하얀빛은 여러 색의 빛이 섞여 있는 상태다. 그런 빛이 어떤 물체의 표면을 만나 어떤 색은 흡수하고, 또 어떤 색을 반사하면서 우리 시각이 그 반사한 빛을 '색'으로 인식하는 과정을 거친다. 하지만 하얀색이라고 해서 모두 같은 빛이 아니다. 빛마다 품고 있는 색의 종류와 범위가 다르다. 마치 그림을 그리기 위해 펼쳐 든 팔레트처럼 말이다.



‘단색광’이라는 조명이 있다. 가시광선 중에서 특정 색상의 빛만을 내는 조명을 말한다. 과거 가로등이나 터널에 주로 사용되었던 나트륨 등이 대표적인 예인데, 나트륨등은 오렌지빛 한가지만을 낸다. 터널 속에서 경험했던 것처럼 우리는 단색광만이 존재하는 공간에서 색을 구분할 수 없다. 이는 마치 오렌지색 물감 하나만 가지고 있는 팔레트로 그림을 그려야 하는 상황과 같다.



넷플릭스에서 제작한 현대미술가 올라퍼 엘리아슨의 다큐멘터리를 보면 단색광을 사용한 작품이 나온다. 작품을 보면 방 안에 큰 스탠드 위에 조명이 하나 켜 있고 벽에는 수많은 액자들이 걸려있다. 조명은 노란빛을 띠기에 벽도 바닥도 그 속에 있는 사람도 모두 노란색으로 보인다. 벽에 걸린 액자도 조명을 받아 노랗게 보이는데, 액자 속에는 각 행마다 흰색부터 검은색까지 각기 다른 밝기의 흑백 면들로 채워져 있다.  



작가는 벽 가까이에서 성큼성큼 걸어 나와 방 한가운데 있는 백열전구의 스위치를 당겨서 켠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나타난다. 흑백인 줄 알았던 액자 속 면들이 빨강, 노랑, 초록, 파랑 등 다양한 색으로 변하는 것이다. 모두 단색 광원에서 나오는 노란색만을 반사할 수밖에 없어 흑백으로 보였던 액자가 여러 가지 다양한 색을 품은 전구의 빛을 받아 본래의 색을 반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처음엔 흑백으로만 보였던 프레임 속 이미지들이 백열전구를 켠 순간 다양한 색으로 보인다 (출처:넷플릭스)




이 현상을 본 보통의 우리는 ‘단색광이 특수한 빛이기에 원래의 색이 보이지 않았다’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원래의 색’또는 '원래의 빛' 역시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우리는 단지 너무나 익숙한 태양광이라는 절대적 빛의 기준이 존재하기에 다양한 빛의 색은 무시한 채, 그냥 물체 자체가 색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일 뿐이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태양으로부터 온 빛이 너무나도 풍부한 색을 포함한 빛이었기에, 우리는 지구 상의 다양한 물체들이 반사하는 아름답고 풍부한 색을 볼 수 있었던 것이다. 만약 태양빛이 나트륨 등과 같은 단색광이었다면, 우리는 백열전구가 발명되기까지 수천수만 년간 ‘색상’이라는 존재를 모르고 살았을지도 모른다. 만약 그랬다면 인류는 그 시점에 역사상 그 어떤 것보다 대단한 인지적, 문화적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물론 인류가 오랜 기간 단색 광속에 살아왔다면 진화 과정에서 색상을 인지하는 기능이 퇴화했을 가능성이 더 클지도 모르겠다.)



다행스럽게도 태양빛은 거의 모든 영역의 빛을 골고루 머금고 있는 아주 풍성한 빛이다. 물감으로 친다면 이 세상 모든 것을 표현할 수 있는 수천 수백만 가지 색의 물감이 담긴 초호화 팔레트라고 보면 된다. 빨간색부터 보라색까지 모든 파장의 빛이 풍부하고 고르게 분포되어 있을 뿐 아니라 눈으로 인지할 수 있는 영역인 가시광선의 바깥 적외선과 자외선까지도 모두 포함하고 있다. 빛의 팔레트가 풍성한 색을 갖추고 있다는 것은 , 이 세상이라는 캔버스에 훨씬 아름답고 풍성한 색으로 그림을 그릴 수 있음을 의미한다. 맑은 날 태양 빛 아래 온 세상이 보다 아름답게 보이는 것은 단지 기분 탓이 아니다.




빛의 팔레트가 풍성한 색을 갖추고 있다는 것은, 이 세상이라는 캔버스에 훨씬 아름답고 풍성한 색으로 그림을 그릴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인류의 문명이 만들어낸 인공광은 놀라운 발견이지만, 태양빛만큼 풍부한 파장의 빛을 머금고 있지는 못하다. 그나마 태양과 같이 열을 발생시키며 빛을 내는 전구나 할로겐, 메탈할라이드 등은 부족하지만 완만한 파장 범위의 빛을 머금고 있다. 하지만 형광램프는 품고 있는 빛의 파장의 범위가 들쑥날쑥하다. 그만큼 그 빛 아래 보이는 물체가 왜곡될 여지가 많음을 의미한다.  주광색이라고 이름 붙어있지만 겉으로 보이는 램프의 색만 태양빛과 유사할 뿐, 실제로는 가장 태양빛과 닮지 않은 조명이 형광등이다. 형광등 밑에서는 왜 모든 것들이 예뻐 보이지 않았을까. 답은 다음 그래프에서 쉽게 파악할 수 있다.



태양빛, LED, 백열전구, 형광등이 가진 빛의 파장을 나타낸 그래프. 비교 불가한 풍성한 파장의 태양빛과, 빛의 분포가 적거나 고르지 않은 인공광원의 차이를 볼 수 있다.



LED는 많은 부분 보완하여 다양한 빛을 가진 대체 광원이다. 색온도에 따라 품은 빛이 영역이 다르기도 하지만 기술력을 계속 보완해 나감에 따라 점점 가지고 있는 빛의 품질을 발전시키고 있다. 하지만 이는 무조건 LED조명 전체의 좋아짐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같은 전력량과 색온도를 가진 LED 램프도 어떻게 만드느냐에 따라 풍성한 빛을 품어 좋은 색의 빛을 보여줄 수도 있고, 왜곡된 빛을 품어 좋지 않은 빛환경을 만들 수도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빛이 가진 색의 풍성함의 정도, 다른 방식으로 말하면 이 빛이 사람이 색을 얼마큼 태양빛에 가깝게 인지할 수 있는지를 나타내는 척도가 필요했다. 이를 숫자로 나타낸 것을 연색성이라고 한다. 연색성은 CRI(Color Rendering Index) 또는 Ra로 표기되며 100에 가까울수록 태양광과 유사한 색의 인지가 가능한 광원임을 의미한다. 빛이 가진 팔레트의 물감이 얼마나 풍성한지를 나타내는 지수라고 보면 이해하기 편하다. 일반적으로 Ra80이면 좋은 연색성을 가진 광원이라 이야기하며, 특히 촬영 등 색에 민감한 곳에는 Ra90 이상의 높은 연색성을 가진 조명이 사용된다.



카페 창가에 놓인 딸기 케이크가 왜 그렇게 예뻐 보였는지, 집에서는 아무리 사진을 찍어도 왜 예쁘게 나오지 않는지, 옷은 왜 집에서 입었을 때와 바깥에서 볼 때의 색이 그렇게 다른지 이제는 알 수 있을 것이다. 반대로 생각하면 우리 카페의 조명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매장의 조명을 고를 때 무엇을 살펴봐야 하는지, 집의 조명은 어떻게 바꿔보면 좋을지에 대한 대답도 이를 통해 얻을 수 있다.



우리가 능동적으로 물체를 보고 있는 것 같지만 우리는 어딘가에서 출발한 빛이 물체에 맞아 반사되는 것을 감지하는 것뿐이다. 좋은 물체와 공간을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물체와 공간을 비추는 빛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다. 전력량과 효율을 넘어 진짜 더 좋은 빛은 좋은 공간과 제품, 나아가서 좋은 삶을 만나는 근본이 된다.



물체는 색을 가지고 있지 않다. 우리 삶 속에 너무나 당연하고 익숙한 것들이 존재할 때, 우리는 대상을 객관화해서 보기 어려운 상황에 놓이곤 한다. 만유인력이 그러했고, 상대성이론이 그러했다. 하지만 그 익숙함을 벗어나 조금 더 새로운 시각으로 우리가 사는 세상을 바라보려 노력할 때, 그것이 결과적으로는 우리 삶을 한 단계 나아지게 만드는 원동력이 된다고 믿는다.











   

매거진의 이전글 조명의 진수는 화장실에 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