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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수민 라이트랩 Dec 09. 2019

조명의 진수는 화장실에 있다

빛과 공간에 대한 이야기 (1)



나는 괜찮은 공간이나 건축물에 가면 꼭 화장실을 방문하는 버릇이 있다. 예전에 만났던 누군가는 화장실을 방문하여 그곳의 위생상태를 통해 그 공간 또는 기업을 평가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또 다른 누군가는 장애인 화장실의 유무나 기저귀 교환대 같은 화장실의 편의 시설을 보고 공간이 가진 배려의 수준을 판단하기도 한다. 나는 조금 다른 기준으로 화장실을 방문하는데 그것은 화장실의 조명을 보기 위해서다. 화장실 조명을 보면 그 공간의 조명설계 수준을 알 수 있다.




화장실 조명을 보면 그 공간의 조명설계 수준을 알 수 있다.




화장실 조명에 감동받은 일 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곳은 작고 사소한 공간이었다. 신혼여행 당시 경유를 위해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공항에 들렸을 때였다. 다른 공항들에 비해 지은 지 오래된 공항이기도 했고, 경유를 위해 작은 비행기로 갈아타는 상황이라 공항에서도 가장 외진 구역의 게이트 옆 작은 화장실을 들리게 되었다. 공항에서는 가장 작고 볼품없는 화장실이었을 텐데 난 그곳의 조명을 보고 반해버렸다. 화려해서가 아니었다.  20제곱미터 정도의 작은 공간에 얼추 세어보아도 형광등 6개 정도가 전부인 화장실 조명이었다.



이 곳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 상상을 한번 해볼 필요가 있다. 만약 당신에게 세면대와 소변기, 양변기가 놓인 화장실에 형광등 6개를 주고 빛을 밝히라고 하면 어떻게 조명을 배치하겠는가? 가장 쉽게 생각할 수 있는 방법은 화장실의 정 중앙일 것이다. 조명도 몇 개 없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빛의 효율이 떨어지는 것을 차단해야겠다고 마음먹었을 것이고, 효율을 높일 수 있는 반짝이는 반사판이 달린 등기구를 사용할 것이다.




효율을 가장 높일 수 있도록 반짝이는 반사판으로 가진 파라보릭 루버 형광등




물론 이와 같은 방식은 화장실 바닥면의 조도를 최대한 올릴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인 조명방식이 맞다. 하지만 그것은 바닥면 조도를 기준으로 한 수치적인 효율이고, 사람이 화장실을 사용하고 빛을 인지하는 방식은 고려되지 않은 방식이다. 형광등이 외부에 노출될 경우, 사람의 눈은 눈부심으로 인해 동공이 축소되며, 오히려 공간을 더 어둡게 인식하게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대부분 벽면에 붙어있는 세면대와 소변기를 사용할 때에는 정작 사용자의 몸이 그림자를 만들어 사용 공간은 더 어둡게 보일 수밖에 없는 조명방식이다.



다시 암스테르담으로 돌아가자면, 암스테르담 공항의 화장실은 전혀 다른 방법으로 형광등을 배치했다. 모든 조명은 벽 조명으로, 그것도 효율이 낮은 램프가 노출되지 않고 안쪽으로 파 넣는 간접조명 방식을 택했다. 램프의 높이와 배치도 정확하여 그림자 하나 없는, 마치 조명 교과서에 나올 듯한 디테일의 조명이었다. 복도를 제외한 화장실 천장에는 그 흔한 다운라이트 하나 없었다. 분명 이 방식을 선택할 경우 빛의 산술적 효율은 많이 떨어지기에, 빛 효율과 바닥면의 조도를 따지는 구태의연한 기준으로는 절대 나올 수 없는 조명 설계였다.



눈부심이 차단되니 실제로 생각보다 공간이 어두워 보이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실제 눈이 닿는 벽면이 가장 밝았으며 사용성이 중요한 세면대와 변기에는 충실히 조명을 하고 있는 방식을 택했다. 한쪽 벽 끝으로 붙인 조명은 사용자가 손을 씻을 때 자신의 그림자가 세면대에 떨어지지 않도록 막는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암스테르담, 그것도 공항의 가장 구석진 조그만 화장실에서 좋다고 사진을 찍어대는 나



유럽의 좋은 공항이니까 그렇지 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는 단순히 한 두 사람이 똑똑해서 가능했다고 하는 정도로 넘어가기엔 수많은 부분에 있어서의 역할이 필요해야 가능하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알고 있다. 우선 조명 디자이너의 빛에 대한 이해는 당연하다 치더라도, 공항의 작은 화장실까지 이렇게 세심하게 바라볼 수 있는 프로젝트의 디테일, 그냥 조명 몇 개 더 넣어 쉽게 해결할 수도 있는 일을 디자인적 접근으로 끝까지 최소한의 조명을 쓰기 위해 고민한 흔적, 빛을 수치적 기준과 단순 효율만으로 판단하지 않는 기준과 제도의 성숙함, 이러한 조명방식을 이해하고 승인한 관련 담당자들의 수준까지 모두 부럽고 대단했다.



유럽이니까 가능했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은 그렇지 않은 공간도 많기 때문이다. 심지어 더 의미 있고 상징적이며 많은 자본이 투입되어 만든 공간임에도 한참 부족한 빛을 가진 화장실도 많다. 아쉬움을 넘어 한심함(?)까지 느꼈던 곳이 다름 아닌 런던의 테이트모던 현대미술관이었다. 현대미술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런던에서 꼭 들린다는 그곳. 그렇게 멋진 건축과 기가 막히게 멋진 작품들을 가지고 있는 미술관임에도 불구하고 그곳에서 방문한 화장실의 조명은 수준 이하였다.



런던의 테이트모던은 화력발전소를 현대미술관으로 변화시킨 것으로 유명하다.




현대미술에서 '빛'하면 빼놓을 수 없는 올라퍼 엘리아슨의 멋진 작품을 막 보고 다음 전시관으로 이동하기 전 들렸던 화장실이었다. 그곳의 빛은 방금 작품에서 받은 감동을 모두 날려버릴 만큼 실망스러웠다. 어정쩡한 위치에 파여있는 홈 속 형광램프는 커버도 없이 바깥으로 램프가 모두 노출되어 공간을 오히려 더 어두워 보이게 할 뿐 아니라 청소가 어려운 검은색 무광 타일의 지저분함을 그대로 반사해 사용자에게 보여주고 있었다. 세면대와 소변기 위의 조명은 사용할 때 내 머리 바로 위에서 그림자를 만드는 가장 좋지 않은 위치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마저도 주광색 전구색이 구분되지도 못한 채 섞여서 끼워져 있었다.




여기가 런던의 테이트 모던인지, 어느 노래방 옆 화장실인지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의 화장실



멋진 테이트모던의 건축과 실내공간, 콘크리트 원형 계단과 창문, 멋진 작품들까지 사실 테이트모던은 분명 현재 세계에서 가장 핫하고 멋진 현대미술관 중 하나라는 것에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당연히 대부분의 공간은 쉼 없이 셔터를 누를 만큼 멋진 공간이었다. 하지만 적어도 이 곳의 화장실만큼은 왜 이 정도 공간의 건축에서 이 정도의 화장실밖에 만들 수 없었는지에 대한 아쉬움이 남았다.



단지 좋은 건축 안에 들어갔다고 해서, 비싼 돈을 들여 좋은 타일과 기구를 썼다고 해서 좋은 화장실이 되는 건 아니다. 화장실은 그 다른 어떤 공간보다 명확한 기능을 가진 특성뿐 아니라 사용자의 동선과 시선이 다양하며 공간이 가진 특유의 반사율 높은 마감재, 모든 빛을 그대로 반사하는 거울이 반드시 있다. 그리고 외부의 창이 없거나 있더라도 창으로서의 역할이 제한되는 등 공간의 성격이 남다르다. 또한 메인 공간이 가진 설계의 자유로움과 힘을 싣을 수 있는 자본력 등이 떨어지는 공간이기도 하다. 어찌 보면 그렇기 때문에 설계의 수준과 고민의 흔적을 보여줄 수 있는 핵심적인 공간이 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또 그래서 어디보다 화장실은 재미있는 공간이 되기도 한다.



조명의 진수는 화장실에 있다. 누구나 하루에 수 없이 가게 되는 화장실에서 오늘은 한번 고개를 들어 천장을 쳐다보는 것을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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