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133. 정국 - Dreamer
매년 월드컵 시기가 되면 축구뿐 아니라 그 시절의 공간, 향기, 사람들이 같이 떠오른다.
2002년엔 초등학생이었고, 2006년엔 고등학생, 2010년엔 영화관에서 첫사랑과, 2014년엔 친구들과 맥주집에서 지켜봤다. 2018년엔 직장인의 신분으로 밤새 축구경기 보고 힘겹게 출근했던 기억이 난다. 4년마다 돌아오는 전 세계의 행사는 한 나라를 들썩이곤 한다. 마치 인생에서 4년마다 두꺼운 책갈피 하나씩 끼워 넣는 듯한 기분.
그리고 2022년, 바로 어제 한국 축구는 월드컵 일정을 모두 마쳤다. 축구인 입장에서 즐겁고 좋은 기억 가득한 뜨거운 2022년 12월을 기념하고자 글을 쓴다. 오늘 수플레는 나와 한국 축구에 대한 이야기다.
우리나라 축구 감독 자리는 독이 든 성배로 불린다. 한국 축구를 결정하는 가장 주요한 자리이지만, 그만큼 부담도 크고 수명이 짧다. 몇 경기만 부진해도 경질되고 교체된다. 특히 4년 이상 지도한 감독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 유명한 히딩크도 불과 2년만 맡았었다) 수명이 짧다 보니 감독의 색을 입힐 수 없었고, 발전이 없었다. 이를 뒤늦게 깨달은 한국축구협회는 2018년, 포르투갈 출신의 벤투 감독을 선임한다.
벤투 감독의 축구 철학 역시도 숱한 위기가 많았다. 월드컵 10회 진출의 업적은 이뤘지만 답답한 경기력이 나오면 축구팬들은 참지 않았다. 월드컵 직전 평가전에선 '이강인'을 외치며, 선수 기용까지 문제를 삼았으니까. 그렇게 불신을 갖고 월드컵은 막을 올렸다.
막상 뚜껑을 열어본 월드컵 성적은 기대 이상이었다. 16강 진출. 한국 역사 상 세 번째 위업이고, 2010년에 이어 12년 만에 이뤄낸 업적이었다. 단체 스포츠가 전 세계에서 16등 안에 들어간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군다나 유럽과 남미가 강국인 축구 세계에서 변방국인 아시아 세 국가(한국, 이란, 일본)가 16강에 진출한 최초의 월드컵이기도 했다.
경기 결과도 놀랍지만, 과정이 더 놀라웠다. 한국 축구 스타일은 투박하고 거친 모습이 대부분이었다. 세밀한 패스나 정교한 슛이 아니라, 키 큰 공격수를 향한 높은 크로스와 두 줄 수비, 낮은 점유율, 투지와 끈기로 승부를 보는 축구 스타일이었다. 하지만 이번 대회에선 축구 강팀의 면모를 여실히 드러냈다. 섬세한 패스와 약속된 플레이, 나아가 수비-미드필더-공격수를 거치는 빌드업까지. 놀라웠다.
이에 선수들의 끈기까지 더해지니, 지켜보는 내내 박수 칠 수밖에 없었다. 팬들은 한계에 맞서 끊임없이 노력하는 선수들을 원했고 그를 보여줬다. 아쉽지만 그럼에도 마지막 패배에 웃으며 박수 칠 수 있었던 월드컵이었다.
https://youtu.be/jEdfjuG0Fx4
Look who we are we are the dreamers
우리가 누군지 봐, 우린 꿈꾸는 사람들이야
We make it happen 'cause we believe it
우린 이뤄낼거야, 우린 믿으니까
Look who we are we are the dreamers
우리가 누군지 봐, 우린 꿈꾸는 사람들이야
We make it happen 'cause we can see it
우린 해낼거야, 우린 볼 수 있으니까
(사실 한국인 최초 월드컵 개막식과 공식주제가를 부른 정국이 16강 진출보다도 더 놀랍다ㅎㅎ) 정국의 노래 가사처럼 우리나라는 이번 대회에서 Dreamer 였고 그 꿈을 이뤄냈다.
축구에서 인생의 여러 모습을 배우곤 하는데, 이번 월드컵을 통해선 끈기와 고집스러운 신념에 대해 느낀다. 주변의 시선과 핀잔에 의해 벤투 감독이 전술을 바꿨다면, 우린 이전과 같은 처참한 결과를 받았을거라 확신한다. 옳다고 믿는 것을 오랜 기간 이끌어가고, 그 과정에서 보이는 긍정적인 변화를 캐치하는 자세. 그 결과는 성공이라는 것을 또다시 느낀다. 아쉽지만 이번을 끝으로 한국을 떠나는 벤투의 앞날을 응원한다.
한 때는 월드컵 기간에만 축구를 보고, 욕하고 평가하는 사람들을 고깝게 바라본 적이 있었다. 평소엔 관심 없는 사람들이 그 몇 경기만 보고 선수를 판단하고 욕을 하다니. 평생 축구만 해온 선수들에겐 큰 상처가 아닐까 싶었다. 다만 나이가 들며 이런 마음은 조금 잦아들었는데 그만큼 축구가 모든 사람들에게 즐거운, 가장 인기 있는 스포츠라는 반증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월드컵은 봐야지."
라며 졸린 눈 비비며 축구를 보는 엄마와 골이 터진 순간 카톡이 터지고, 아파트마다 비명과 소음에도 모두가 이해하는 그런 날. 공놀이 하나로 전 세계가 들썩이고 그 순간 고민과 걱정을 잊는 날. 스포츠의 선한 영향력이자 내가 축구를 사랑하는 이유다.
우리나라의 여정은 끝났지만 아직 월드컵은 일주일 넘게 남아있다. 한국 경기만큼 가슴졸일 일은 없겠지만 남은 경기도 잘 챙겨볼 예정이다. 먼 훗날 2022년을 이야기할 때, 우린 축구 이야기를 먼저 꺼내지 않을까.
“2022년? 그 때 우리나라는 9%의 확률을 100%로 만들었어.”
한 껏 기다렸던 첫 눈이 무색하게, 온 나라가 뜨거웠던 2022년의 12월을 보내며. 올해의 마지막 수플레 글도 마친다. 모두들 가슴 뜨거운 연말 맞이하시길.
수요일의 플레이리스트(줄여서 수플레)'는 다섯 명의 브런치 작가가 매주 수요일마다 본인의 에세이가 담긴 음악을 소개하는 읽고 쓰는 라디오입니다. 잠들기 전 이름 모를 누군가가 추천해주는 노래를 듣고 싶으셨던 분들, 즐겨 듣는 노래에 다른 누군가는 어떤 이야기를 담고 있을까 궁금해본 적이 있으신 분들이라면 매주 조금은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려주시지 않을까 싶어요.
물론 음악에 조예가 깊거나 전문적으로 음악에 대해서 잘 아는 '음. 잘. 알'들은 아닙니다. 그저 음악을 좋아하고 혼자만 듣기엔 아까운 나의 플레이리스트를 나누고 싶어 하는 사람들일 뿐이죠. 비가 오는 날엔 비 오는 날 듣기 좋은 음악을, 너무 추워서 어딘가에 숨고 싶을 땐 숨어 듣기 좋은 음악을 한 편의 글과 함께 나눠보려고 합니다. 글에 담긴 노래를 들으며 천천히 읽어 내려가시길 추천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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