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면서 주인공으로 무대를 서는 일이 몇 번이나 있을까. 그것도 독백 무대의 주연으로. 그런 영화 같은 기회가 나에게도 주어졌다.
무대 위 주연 배우는 나, 상대 배역은 피아노.
대사는 베토벤의 작품 < 드레슬러의 행진곡에 의한 9개의 변주곡, 다단조 WoO 63 >으로.
정기연주회에 나갈 채비를 하라는 원장님의 말을 처음 들었을 때, 나는 너무 놀라 까무러칠 뻔했다.
동네 피아노 학원이 여는 학예회쯤으로 생각해선 안 되는 자리. 수많은 음대생들을 배출한 베테랑 선생이 연출하는 정기연주회는 음대 진학을 꿈꾸는 학생들에겐 정말 중요한 연중행사였고, 원장님이 당신 제자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소수의 학생들만 선발되어 참여할 수 있었다. 그런 자리에 나를 뽑았다는 것은 사막 한가운데서 막 퍼올린 샘물을 딱 한 명만 맛보게 해주는 그런 축복 같은 기회였다.
사실 원장님이 건넨 열댓 장의 악보들을 처음 펼쳐 보았을 때 난 잠시 멍해졌었다. 운명교향곡처럼 잘 알려진 작품이 아닌, 베토벤의 변주곡이라니.
1악장부터 10악장까지 모든 악보를 달달 외우고, 15분의 시간 동안 베토벤의 풍부한 서사를 청중들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도록 맹연습해야 했다. 모든 학원생들과 학부모들은 물론, 이 학원 출신 음대 재학생들, 원장님과 친분이 두터운 여러 관계자들 앞에서 나 자신을 증명하려면.
어찌 됐든 피아노의 페달을 밟을 때면 헬륨풍선처럼 마음이 둥실 대며 뜨거워진 혈관들이 너울성 파도처럼 심장에까지 일렁였고, 파도의 고점(高點)에 오른 입꼬리는 종일 오르락내리락 쉴 줄을 몰랐다.
연주회 날 아침은 기도만 흘러나왔다. 아빠가 집에 있으면 맘 편히 연주회를 할 수 없었다. 간절한 마음이 하늘에 닿았는지 아빠는 며칠 낚시를 간다며 일찍 집을 나가주었다.
참 감사한 시작. 모든 것이 수월했다. 이날을 위해 특별히 예약한 미용실에서 헤어와 메이크업을 받고 약수동에 위치한 연주회 장소로 바삐 이동을 했다.
한 달 전 미리 가봉해 놓은 핑크빛 롱 드레스는 귀여운 프릴 소매를 우아하게 달고 대기실 옷걸이에 걸려있었다. 내 몸에 딱 맞춰진 실크 드레스를 입고 노오란 전구들이 달린 대기실 거울 앞에 섰다. 생경하지만 설레는 이 순간.
드라이로 차분히 빗어 넘긴 단발머리, 앳된 중학생을 조숙한 여고생으로 만들어버린 눈 화장과 붉은 입술이 대기실 조명에 은은히 녹아든다. 핑크여도 촌스럽지 않은 색상과 원단이라며 드레스 칭찬을 아낌없이 해주는 사람들. 아, 모든 것이 완벽하다.
대기실 옆 작은 방에선 공연 순서대로 리허설을 시작했다. 시간 관계상 각자 5분 동안만 손가락의 긴장을 푸는 시간을 가졌다. 컨디션은 좋았고, 그동안 여러 번 손가락이 꼬였던 부분만 반복 연습하며 완벽히 리허설을 마쳤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열정을 피아노에 쏟아부었나. 나는 주어진 환경에서 최선을 다했고, 오늘도 잘 해낼 수 있다. 될성부른 떡잎처럼 오늘의 연주를 아름답게 완성하자!
이렇게 나 자신을 응원하며 호명 소리에 맞춰 무대로 향했다.
피아노를 비춘 조명이 햇살처럼 따스하다.
드레스 자락을 살짝 들어 올려 페달 위로 발을 가져다 댔다.
그랜드 피아노 건반들을 한번 쓱 훑어본다.
깊은숨을 크게 들이쉬었다가 내쉰다.
양손이 첫 음의 위치로 자리한다.
모두가 숨죽여 내 연주의 시작을 기다린다.
오직 나와 피아노만이 존재하는 세상이 시작되었다.
웅장하고 비장한 서막이 열리고
변주곡의 주된 멜로디가 곡의 흐름을 납득시킨다.
섬세하고 예민한 영혼이 깃든 감정의 소용돌이,
슬픔과 기쁨의 교차 행진이 연달아 이어지며
베토벤의 서사가 점차 화려해진다.
만개한 꽃들에 날아드는 벌들처럼.
부단히 달려온 템포는 이제 8악장의 장애물을 넘어갈 차례.
매번 나의 손가락들을 넘어지게 만들었던 그 장애물 코스를 리허설 때처럼 단숨에 훌쩍 뛰어넘었다.
큰 산을 넘어와 바람을 맞는 이처럼 웃음이 난다.
이제 10악장 엔딩씬에 다다랐다.
클라이맥스를 향해 손가락이 빠른 질주를 시작한다.
자동화 시스템처럼 돌아가는 자신 있는 부분이다.
그동안의 걱정은 모두 해소되었다.
이젠 주인공을 향한 갈채소리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그 순간,
시야가 피아노를 벗어나며
모든 것이 선명해진다.
퓨즈가 나간 것처럼 다 멈췄다.
흰 백지처럼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다.
피아노 건반들은 모두 검은색으로만 보인다.
다시 음을 잡아본다. 이 음이 아니다.
다시 또 음계를 되짚어본다. 이 음도 아니다.
큰일 났다. 음계들 사이에서 정신이 정신을 못 차린다.
애써 올려보는 손가락들이 미련하고 가련하다.
머릿속을 헤매는 눈알들의 움직임이 무의미해진다.
서늘한 땀방울이 이마를 타고 흐른다.
지금은 땀이 흐르는 걸 느끼는 것마저 사치다.
이제 더는 방법이 없어서 객석 쪽을 바라봤다.
- 이 다음이 뭐였죠??
마지막 희망인 원장님을 향해 다급히 입모양을 내본다.
이제 제발 악보를 가져다 달라고 간절한 눈길도 보내본다.
원장님은 말이 없다. 그저 나를 뚫어져라 응시할 뿐.
무책임한 양손이 무릎 위로 먼저 내려왔다.
아무래도 이 무대를 완성하지 못할 것 같다.
눈을 질끈 감고 자신에게 묻는다.
넌 도대체 무엇을 연주하고 있었느냐고.
말이 없는 베토벤에게 묻는다.
열 개의 화폭에 수많은 음표들로 무얼 그리고 싶었느냐고.
그 순간,
나를 바라보고 앉아 있는 이들의 눈동자가
캄캄한 밤하늘 속에서 초롱거렸다.
그 눈동자들이 별처럼 영롱하게 빛나며
알 수 없는 음표들을 다시 그려내기 시작했고
산산조각 났던 악보가 전광석화 같이 반짝였다.
다시 음을 잡아본다.
드디어 맞았다!
어디선가 안도의 숨소리가 들려왔다.
꼭 그날이 계기는 아니었지만,
그로부터 얼마 후 나는 더 이상 피아노학원에 나가지 않게 되었다.
뭐,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게 된 이유도 있었고, 그날에 보았던 별들이 자꾸만 떠올라 건반을 누르는 게 자신이 없어졌다.
그냥 나는 피아노가 좋았던 거고, 우리 집은 피아노 전공을 시킬만한 형편도 아니었고, 더 이상 아빠를 속여서도, 엄마를 속상하게 만들어서도 안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태 핑계가 많은 걸 보니 결국 그날이 계기가 맞나 보다.
1997.11. 8.(토) 오후 5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