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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매미

P는 또래보단 키가 큰 편이고 안경을 썼다. 광대뼈 없이 각진 턱에 날카로운 눈매는 예민해 보였지만, 작은 눈이 반달을 이루며 웃을 때면 제법 귀여웠다.

나는 P를 제일 가깝게 생각했다. 유머러스한 P와 함께 있으면 어려운 상황들이 금세 잊혀졌다. 같은 반 친구 중엔 가장 잘 맞는 친구, 늘 공감을 잘해주고 내 얘길 잘 들어주는 친구가 P였다.

기회가 된다면 우리 집에 초대하고 싶은 친구였다. 오랜 고민 끝에 엄마에게 어렵게 말했다.


- 엄마, 우리 집에.. 친구.. 데려와도 돼?

- 친구..? 누구??

- 응.. 나랑 제일 친한 P..

- --- 그래, 대신 P만 뎃고 와."


전에 살던 빌라에서는 절대 들을 수 없었던 대답이었다. 여러 도움으로 우리 집은 빚을 거의 다 갚았고, 집안 살림 곳곳 붙었던 빨간 압류 딱지를 떼고 아파트로 이사를 올 수 있었다. 물론, 이 아파트 역시 우리 집 사정을 안타깝게 여겼던 친척이 살게 해 줬기에 가능했던 일이지만.


여튼 친구를 우리 집에 데려오는 건 7살 때 이후로 처음 있는 일이었다. 기분 좋게도 P는 흔쾌히 우리 집에 오겠다고 했다. 비록 동생과 같이 쓰는 거실 겸용 작은 방이지만 "여긴 내 방이야." 하면서 보여줄 공간이 있다는 것이 무척 행복했다.






우리 집에 온 P는 이곳저곳을 둘러봤다. 소중한 내 피아노 건반도 눌러보고, 어릴 적 사진들이 담긴 앨범도 보여주고, 내 책상서랍도 열어서는 구구절절 사연 읊어가며 구경시켜 주고, 이제 막 꾸미기 시작한 다이어리도 공개하기도 하면서.

정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놀았고, 그러다 학원 갈 시간이 가까워지자 함께 집을 나섰다. 한참 아파트 언덕을 함께 걸어 내려오던 P가 다소 들뜬 표정으로 나에게 물었다.


- 야, 우리 저기 포장마차에서 떡볶이 먹을래?

- 떡볶이? 나 지금 돈 없는데.

- 나한테 있어, 오천 원. 이걸로 배 터지게 먹자!"


P에게서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제안이었다. 가깝긴 했어도 서로 집안 사정에 대해선 말을 아꼈다. 사춘기 중학생 소녀들에겐 사소한 것 하나가 자존심을 지키는 일이었기에. 많은 시간을 함께하며 나만큼은 아니지만 P도 형편이 넉넉한 건 아니라는 건 어느 정도 눈치를 채고 있었다.

그렇기에 친하긴 했어도 서로 뭘 사 먹자는 말은 거의 해본 적이 없었고, P가 P의 돈으로 누구에게 뭘 사준다는 말조차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오늘은 P가 먼저 떡볶이를 사준다고 하다니! 이 얼마나 정말 듣던 중 반가운 소리인지!!


친한 친구와 오붓하게 떡볶이를 먹을 생각에 발걸음이 가벼웠다. 오늘은 우리 집에 친구가 놀러 온 기쁘고도 기쁜 날. 기분이 너무 좋아서 손뼉을 치며 포장마차에 입성해 호호 입김 불어가며 맛있는 떡볶이를 신나게 먹었다.

허파와 내장 섞어 야무지게 순대를 시키고, 방금 기름에 맛깔나게 튀겨낸 오징어 튀김도 시키고, 뜨끈뜨끈하고 시원한 오뎅국물도 종이컵에 가득 담아 후루룩 마시면서.

이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떡볶이를 사이좋게 나눠먹었다.


- P 니 덕분에 기분이 좋네. 나 진짜 이렇게 맛있는 떡볶이 처음이야!

- 하하.. 뭘 이런 걸 가지고. 그렇게 맛있어?

- 응! 우리 담에 또 같이 오자! 우리 집에도 또 놀러 오고!

- 그래그래. 근데 나 학원 늦었다, 오늘은 늦으면 안 되는데.

- 그럼 이제 가자. 오늘 정말 즐겁고 고마웠어! 얼른 조심히 가, P야~

- 어~~ 내일 학교에서 봐!


기분 좋은 인사. 여느 때보다도 둥둥거리는 구름처럼 한껏 들뜬 오후였다.

학원을 마치고 집에 와서 내 책상에 앉기 전까지는, 그때까진 참 괜찮은 하루였다.






없어졌다. 내 방 책상 수학 문제집 위에 올려놓았던 그 돈이. 그날 아침 아빠한테 받은 용돈 오천 원을 분명 그곳에 두었는데. 어느 순간 감쪽같이 사라지고 없었다.


나는 손이 덜덜 떨려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친구를 의심하고 있다는 죄책감은 하루의 기분을 모두 망쳐놓았다. 선명하게 피어오르는 P의 웃는 얼굴과 까르르 웃는 목소리.

오늘은 정말 좋았던 시간뿐이었는데, 어떻게 된 게 나라는 인간은 가장 친한 친구를 의심하고 있는 걸까. 화상을 입은 것 같이 얼굴이 화끈거렸다.


아냐, 아닐 거야. 내가 지금 미쳐도 한참 미친 거야. 이 거지 같은 생각을 친구가 알면 얼마나 황당하겠어. 제발 내가 병신같이 잃어버린 거라고, 내가 어딘가 다 써버리고 착각한 거라고, 처음부터 거기에 돈을 놓은 적은 없었다고 나를 자책하면서 자라나는 생각을 도려내고 또 도려냈다.


하지만 그러기엔 우리 집에서 P와 보냈던 시간들이 너무나도 생생했다. 둘이 한참 잘 놀다가 배에 신호가 오는 통에 나는 잠시 화장실을 다녀왔었다. 바닥에서 일어나면서 책상 의자를 붙잡고 일어났었고, 그러면서 올려다본 책상 위에는 분명 오천 원이 있었다. 확실한 건, 화장실 가기 전까지는 그 자리에 오천 원이 있었다.

최면술에 빠진 사람처럼 스스로 무의식을 거슬러 올라가 본다. 한번, 두 번.. 반복적으로... 밤새도록. 친구를 방에 두고 화장실에 다녀온 후 마주했던 친구의 얼굴과 행동들을 떠올려본다. 눈을 감고는 틀린 그림 찾기를 하듯이 아주 작은 부분이라도 놓칠 새라 무의식 속에 달라진 것은 없었는지 그때의 조각난 기억을 모으고 또 모아 본다.


모든 기억을 긁어모아 하나의 그림을 완성했을 때, 친구 P가 내 돈을 가져간 것이 확실했다.


현재로선 그녀가 가장 유력한 용의자이긴 하지만, 나는 그녀를 용서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어차피 나는 돈에 대한 욕심은 포기한 지 오래였다. 나는 오래도록 가난한 생활에 익숙해졌기에 돈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라 생각했다.

당장에 필요한 물건도 없었다. 그래서 그 오천 원을 친구가 가져갔다고 하더라도 뭐 그럴 수도 있지 하고 넘겨버리면 될 일이었다. 그녀는 나의 가장 친한 친구니까. 한 번도 하지 않았던 행동을 오늘 했던 P였지만, 그녀는 그 돈을 나를 위해 사용했으니까. 그렇지만 왜 그대로 호주머니 속에 꽁꽁 숨겨 가져가지 않고 나와 같이 뭘 먹을 생각을 한 건지에 대해 수만 번을 그녀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심증만이 가득한 용의자 P. 그녀는 내 친구이기에 체포영장 없이 내사 중인 사건의 용의자가 되었다. 아니 어쩌면 내가 먹어치웠던 떡볶이와 순대, 튀김, 오뎅국물이 그 모든 증거의 집합체일지도.


오천 원어치의 증거물 제1호. 어차피 불구속될 사람이고, 직접적인 증거 또한 없으며, 나는 P를 참 좋아했다. 나는 P가 나에게 사실대로 말하기 전까진 아무렇지 않은 듯 행동하기로 마음먹었다. 설령 나쁜 맘으로 가져갔다고 할지라도 친구사이에 오천 원은 묻을 수 있는 범행동기였다.


어찌 됐든 나는, 선량한 마음을 애써 품고, 그 집합체 증거물들을 그대로 뱃속에 품고 다음날 학교에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