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음이 기억나지 않는다

by 민매미

한동안은 그 집 대문에 귀를 대고 어떻게든 그 소리를 들어보겠다며 안간힘을 썼다. 이따금씩 그 집 문이 열릴 때, 순간적으로 커졌다 작아지는 피아노 소리는 시소를 타고 오르내리는 것처럼 심장을 들뜨게 했다. 그 문 앞에만 서면, 머릿속에선 음표들이 제 자리에 안착하며 쉴 새 없이 음계를 그려냈다.


당최 피아노가 있는 우리 집을 놔두고 남의 집 앞에서 이 무슨 바보 같은 짓인지. 그렇다고 압류 딱지가 붙은 집 피아노는 정말 건들고 싶지 않았다. 피아노 소리가 밖으로 새어 나오기라도 하면 뺏길 것만 같은 두려움이 앞섰기에. 그저 다른 사람이 연주하는 소리라도 한 지붕 아래서 들을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지.


저 곡은 무슨 곡일까, 화려한 기교를 내는 사람은 누굴까, 연주에 심취한 표정은 어떨까, 앞으로 전개될 음표들은 어떤 느낌을 자아낼까, 선생님은 그에게서 어떤 가능성을 볼까-

끝없는 질문들이 멜로디처럼 흐르고 흘렀다.


"빚을 다 갚으면 그땐 원 없이 피아노를 칠 수 있어."

현실은 암담했지만 애써 희망적인 말로 위로하는 날이 계속되던 어느 날 오후였다. 매미 소리가 한창일 때 아빠는 안방 TV앞에 무기력하게 누워있었고, 엄마는 슬그머니 내 방으로 들어와 작은 소리로 내게 말했다.


- 어서 갈 준비 해, 아랫집에.

- ..아래? 피아노 학원?!

- 아빠한텐 비밀이야. 원장님한텐 엄마가 잘 말해놨어.

- 아니 엄마가 무슨 돈으로??

- 넌 신경 쓸 거 없어. 넌 그냥 열심히만 하면 돼.

- 엄마...

- 아빠 잠들면 신호줄테니까 조용히 다녀와.


그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어떻게 내 마음을 알았느냐고, 그 돈은 어디서 났냐고, 아빠가 눈치채면 그땐 어떡하냐는 질문들은 모두 꿀꺽 삼켜버렸다. 궁금증을 해소하는 순간 이 모든 게 꿈같이 사라질 것만 같아서. 일단 지금은 나 자신만 생각하기로 했다.


시곗바늘이 속절없이 째깍였다. 하필 이럴 때 쉽사리 잠들지 않는 아빠 때문에 10분이 10년 같이 흘렀다. 아빠가 정말 깊은 잠에 든 건지는 TV 리모컨을 눌러봐야 확인이 가능했다. 드르렁 코를 골며 자고 있다가도 TV가 꺼지는 소리가 들리면 반사적으로 눈을 떠서는, 왜 멀쩡히 보고 있는 TV를 끄냐며 간섭 좀 하지 말라고 불같이 화를 내는 아빠였다. 그렇게 시작한 말싸움은 불 번지듯 커져서 벌떡 일어나 냉수 한 잔을 들이켜고 양반다리로 고쳐 앉아 다시 바락바락 화를 냈었고, 그러다 더 일이 커지면 진탕 술을 마시고 밤새 우리를 괴롭히기도 했다.


하여간 아빠의 잠이 달아나 버리면 모든 것은 수포로 돌아갔다. 아빠 모르게 하고 싶은 것이 있어서 계획을 세웠다가도 잠들지 않은 아빠 때문에 무기력한 포기 속에 더욱 숨죽여 살아야 했다. 그럴 때마다 그놈의 TV와 아빠를 밖으로 내동댕이쳐 버리고 싶었지만, 우린 그에게 대항할 힘이 없었다.

엄마는 너무 여렸고, 나는 너무 어렸다. 귀신보다 무서운, 누구보다 강압적이고 엄격한 사람이, 가난이 만든 괴물이 우리 아빠였다. 여하튼 그의 수면의 질을 체크하는 과정에서 그간 실패를 많이 해왔기에 오늘도 실패할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이대로 포기할 순 없었다.


난 피아노를 쳐야 했고, 엄마는 피아노를 가르쳐야 했다.


엄마는 손을 달달 떨며 아빠의 오른손 아래에 떨궈진 TV 리모컨을 가만히 집어 들었다. 눈을 감고 누워있는 아빠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던 엄마는 결심한 듯 전원 버튼을 눌렀다. 온종일 쉴 새 없이 떠들어대던 TV 화면이 푸슉-하고 사그라들었다. 순식간에 집안이 고요함으로 가득 찼다. 오랜만에 찾아든 평온한 공기인데 등줄기에 흐르는 땀은 별안간 서늘하다.

아빠의 얼굴을 조용히 들여다본다. 곤히 잠든 아이처럼 평온하다. 그렇다고 안심할 순 없다. 들숨과 날숨의 조화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 패턴이 깨어지면 모든 희망은 깨어지니 그 패턴의 흐름을 잘 도와야 한다. 함께 잠들어있는 것처럼 들숨과 날숨을 함께 내쉬어준다.

이제 막 자전거 바퀴를 굴리기 시작한 사람처럼, 아빠의 콧구멍 바퀴가 슬슬 굴러가며 점점 속도를 낸다. 자전거는 곧 오토바이가 되고, 오토바이는 곧 자동차가 되며, 자동차는 이내 곧 덤프트럭이 되었다가, 덤프트럭은 마침내 항구에서 출항을 앞둔 대형선박이 되었다. 그렇게 드디어 숙면의 길로 접어든, 출항의 배에 올라탄 아빠를 소리 없는 아우성으로 진심 가득히 축하해 주었다.


오, 드디어 잠을 주무시는군요!

아빠, 푹 주무세요. 모처럼 좋은 꿈도 많이 많이 꾸시고요.

그래야 내가 원 없이 피아노를 칠 수 있으니까.






나는 엄마의 출발 신호를 듣자마자 현관문을 슬며시 여닫고 팔을 세차게 뻗어 크게 만세를 했다. 세상 모든 자유를 품에 안고 집에서 열댓 개밖에 안 되는 계단들을 공기보다 빠르게 지나쳐 내려왔다.

이윽고 그 집 문 앞에 다다르자 또다시 마음이 시소를 탄다. 이러다간 심장이 터질 것만 같다. 잠시 과호흡 같은 것이 찾아왔지만 들숨날숨 몇 번으로 가라앉혔다.

그리고는 그토록 당기고 싶었던 그 집, 피아노 학원 문을 이제 힘차게 잡아당겨 본다!


"왔니? 저 안쪽 방으로."


원장님 말 한마디에 학원을 가득 메운 피아노 소리가 일제히 나에게 달려들어 고막을 진동시켰다. 음계들의 환영 인사에 바보같이 다리에 힘이 풀려 맥없이 벽을 붙잡고 섰다가 실내화로 갈아 신고 그 방으로 들어갔다. 월세 받던 집주인이 내 피아노 선생님이 되다니. 이 무슨 영화 같은!

애써 덤덤한 표정을 지으며 피아노 앞에 앉았다. 흑과 백이 교차하는 건반을 보며 무궁한 설렘과 뜻 모를 슬픔 같은 것이 혼란스럽게 교차했다. 이제 이 건반을 누를 자격이 생겼다는 기쁨은 도무지 말로는 표현이 안될 정도로 사그라들지 않았다.


검지 손가락 하나를 들어 가장 눈에 들어오는 건반 하나를 눌러본다.


띵- - - -


그 모든 음들을 잠식시키고 오로지 한 음만 공중부양하듯 붕- 떠오른다. 다시 같은 음을 눌렀다 뗐다 하는데 이번엔 이상하게 웃음이 나온다. 그때부터 건반음과 웃음들이 교차하며 도레미파솔라시도들이 자꾸자꾸 만들어졌다.

이 감격적인 터칭이 생소하면서도 퍽 감사하다. 건반의 소리가 각자 만들어 내는 아름다운 선율의 조화로움, 작은 손가락 열개가 만들어 나가는 음계들과 한 곡의 완성, 사락거리며 악보들이 넘어가는 소리, 피아노 건반 끄트머리와 선생님의 볼펜 끝이 만나 박자를 맞추는 소리!


이 모든 것들이 아름답다.

감사하다.

행복하다.




그날 밤, 그날의 수업을 다시 떠올려본다.

모든 것이 완벽했다.


종일 원 없이 눌러본 검은색과 흰색 건반들. 하농으로 시작한 손가락들의 준비운동, 체르니의 곡들은 어쩜 이렇게 아름다운 봄꽃 같은지! 다시 봄으로 돌아가 벚꽃들 앞에서 피아노를 연주하고 싶어졌다.

원장 선생님의 단호한 어조의 인텔리함, 자연스럽게 흐르는 세심한 교양미. 잘했어하며 내 오른쪽 어깨를 툭- 건드려 준 그 따뜻한 손길.


어느 날 원장 선생님은 꼭대기층 집으로 나를 초대했다. 선생님이 건넨 따뜻한 고구마를 먹으면서 따뜻한 가을을 마주했다. 그리고선 옥상에서 키운 봉숭아 꽃으로 내 양손 새끼손가락들을 손수 물들여 주셨다. 봉숭아로 물들인 손가락으로 피아노 건반을 누를 때마다 꽃봉오리가 툭- 하고 터지듯 제법 귀여운 웃음소리가 났다.


그렇게 나는 물들고 또 물들었다. 온 세상 예술을 다 끌어안은 것처럼 그렇게 피아노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때때로 옆방의 피아노 소리와 맹렬한 경쟁을 펼치면서, 서로의 연주를 주거니 받거니 하며 얼굴 없는 경쟁으로 온 시간을 불사 지르면서.


그렇게 매일이 오늘만 같기를 소망하며 또 하루를 살아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