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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무리 Dec 25. 2015

<메갈리아> : 나는 타자임을 선언한다

어떤, 여성과 낯선, 이야기 : 3 

<사진1: 보건복지부에서 만든 메르스 대처법>



  2015년 여름, 한국에는 그 이름도 생소한 전염병인 중동 호흡기 증후군, 일명 ‘메르스’가 유행했다. 특히 인터넷상에서 누리꾼들은 낙타와 접촉하지 말라는 낙타유를 마시지 말라는 정부 대처를 패러디하는 것에서부터 삼성병원의 이재용 부회장의 사과문을 ‘사과문의 정석’으로 희화화 하는 데  이르기까지 메르스의 유행 자체를 하나의 콘텐츠로 삼아 다양한 방식으로 향유하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이 중 유독 눈에 띄는 것이 있다. 바로 ‘메갈리아’의 탄생이다. 메갈리아의 굴곡진 탄생을 간추려 말하면 ‘메르스’의 유행은 한국 페미니즘계에 한 획을 그은 ‘매갈리아’라는 사이트를 낳았다. 도대체 전염병이 어찌 된 연유로 페미니즘 낳게 되었단 말인가? 그리고 우리는 메르스가 메갈리아를 낳은 이 현상에서 무엇을 읽어낼 수 있을까?


  모든 것은 단순한 분노에서 시작되었다. 국내 메르스 환자의 확진 이후에도 한참 동안 정부는 정확한 정보를 공개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론 내세웠다. 문제는 메르스가 높은 전염률을 가졌다는 점에 있었다. 메르스의 초기 대응 실패와 정보 비공개 방침은 2차 감염자의 수를 늘렸고 사람들은 정부와 언론을 불신하기 시작했다. 더욱이 확진 환자 중 사망자가 생기자 대중들의 불안감은 분노로 변했다. 그렇게 ‘메르스 갤러리’가 탄생한다. ‘DC 인 사이드’라는 커뮤니티 사이트 내의 메르스 갤러리는 사람들이 메르스에 대한 정보를 공유하고, 정부를 비판하고 그를 통해 다양한 담론을 만들어 내는 장이 된다. 여타 인터넷 커뮤니티가 그러하듯 믿을만한 정보와 루머들은 대중없이 섞여 커뮤니티 사람들에게 퍼진다. 그러던 중  ‘홍콩 모녀’에 관한 이야기가 갤러리의 화두로 떠오른다. 이야기의 요는 ‘메르스 확진자인 모녀가 홍콩 여행에 가겠다고 공항에서 한참을 입씨름을  했다’였다. 곧 메르스 갤러리는 한국 여성이 얼마나 무개념인지, 김치녀들인지에 대한 성토의 장으로 바뀐다. 하지만 이것은 잘못된 정보였다. 상황은 급변한다. 묵묵히 욕을 듣고 있었던 여성들은 한국 남자가 얼마나 무 개념인지, 얼마나 김치남인지에 대해 쏟아낸다. 메르스 갤러리는 싸움터가 되어버린다. 이 갤러리의 양상은 곧 여성을 중심으로 흐르게 된다. 여성들은 살면서 한 번씩 들어봤던 여성 혐오에 대한 이야기의 주체를 남성으로 비틀어 향유하기 시작한다. 꽤나 높은 수위의 글이 쏟아지고 남성들은 당황한다. DC 인 사이드의 관리자는 이런 여성의 분노에 불을 붙인다. 혐오를 자제하고 깨끗한 갤러리 문화를 만들자는 취지에서 ‘김치남’을 금지어로 설정했기 때문이다. 여성들이 수 년을 ‘김치녀’, ‘된장녀’로 불렸음에도 단 한 번도 없었던 규제가 ‘김치남’이 등장함과 무섭게 이루어졌다. 김치녀는 되고 김치남은 왜 안 되느냐고 분노하던 여성들은 곧 혐오의 효과를 깨닫는다. 한 번도 혐오의 주체인 적 없었던 여성들은 이제 혐오에 눈뜬다. 그리고 그들은 혐오만을 위한 새로운 보금자리를 만든다. 오직 ‘혐오에 대한 혐오’를 위한 사이트인 ‘메갈리아’는 이렇게 탄생하게 되었다. 


  메갈리아의 탄생은 혐오의 시대 탄생을 알리는 서막과도 같았다. 분노라는 사소한 출발은 혐오로 이어졌다. 이들의 혐오의 논리는 재미난 바탕에서 이루어진다. 나는 그것을 ‘타자하기’라고 말하고 싶다. 메갈리아의 여성들은 스스로가 타자임을 너무 잘 안다. 이들이 주목한 타자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김치녀와 같이 남성에게 욕을 먹는 여성 그리고 다른 하나는 김치녀가 되지 않기 위해 코르셋을 입고 사는 여성이다. 대체로 메르스 갤러리의 여성들은 자신이 후자로 살아왔다고 말한다. 매일 같이 메갈리아에는 남성이 그들을 어떤 방식으로 타자로 만들었고 그래서 어떠한 코르셋을 입었는지에 대한 경험담이 쏟아진다. 코르셋을 입고 살았다는 것을 깨달았으니 ‘코르셋을 벗을’ 차례이다. 이들이 코르셋을 벗는 방식은 간단하다. 바로 앞서 말한 ‘타자하기’이다. 그들은 코르셋을 입은 타자에서 벗어나 김치녀가 되기를 선택한다. 남성이 극도로 혐오하는 대상인 김치녀를 여성들은 소위 ‘승리자’라고 칭송한다. 그녀들에게 김치녀는 명품백을 살 정도로 경제력을 갖춘 여성임과 동시에 자신을 존중하는 남성을 만나는 능력 있는 여성이다.


  메갈리안의 ‘타자하기’는 기존의 남성 사회에 여성을 타자로 만들던 전략을 무력화시킨다. 남성들이 유지했던 ‘이름 붙이기, 혐오하기 숭배하기’ 전략은 메갈리안의 ‘타자하기’ 안에서 그 효력을 잃는다. 더 나아가 메갈리안이 타자임을 선언하는 순간 여성은 남성 사회에서의 유기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한다. 유기에 대한 두려움이 없는 여성은 이제 남성들에게 두려움의 존재가 된다. 이들은 손쉽게 남성의 언어를 전유한다. 이전에 여성이라면 꺼림칙하게 여겼을 과격한 욕에서부터 성적 언어들과 희롱은 남성을 대상으로 하여 여성의 발화를 통해 이루어진다. 이제 남성은 중심에서 내려와 또 다른 타자가 되어버린다. 혐오의 메커니즘은 앞에서 말했던 남성의 타자화 전략을 그대로 답습한다. 여성은 남성을 ‘싸튀충’, ‘한남충’등으로 이름 붙인다. 이들을 ‘혐오하며’, 몇몇 개념 있는 남성들을 ‘유니콘남’이라고 말하며 숭배한다. 이제 메갈리아의 땅에서는 ‘타자’와 ‘타자의 타자’들만이 존재한다. 


  한편 메갈리안의 ‘혐오’에서 우리는 독특한 성질을 발견할 수 있다. 메갈리안의 ‘혐오’는 아이러니하게도 젠더 간의 소통을 가능하게 했다. 본래 소통이라는 것은 타인과 의미를 공유하는 과정이다. 상식적으로 혐오는 남성과 여성 간의 지독한 단절을 가져와야 했다. 하지만 메갈리안 이후의 여성 담론을 볼 때 혐오가 지니는 소통의 효과는 강력했다. 메갈리안의 ‘혐오’를 욕하던 남성들은 이내 그것이 곧 자신들이 여성을 다룬 방식이 내포한 혐오성을 의미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극우 여성주의자인 일베에서조차 ‘그동안 여자들이 우리를 볼 때 이 정도로 더럽게 느껴졌을까?’와 같은 자성의 목소리가 나온다. 혐오가 소통의 효과를  가져올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메갈리안이 선택한 혐오의 방식이 ‘미러링’이기 때문이다. 미러링은 쉽게 말해 ‘그대로 보여주기’이다. 이들이 미러링을 택한 이유는 대화가 통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동안의 여성들은 여성 혐오의 행태가 얼마나 부당한가를 아무리 이성적으로 설득하려 했다. 하지만 그것은 통하지 않았다. 말해도 들어주지 않으니 여성들은 이제 당한 대로 갚아주는 방식을 택한다. 그러다 보니 남성들은 메갈리안이 생산하는 혐오의 내용에 비난을 가할 수 없다. 메갈리안이 생산하는 게시글의 내용이 얼마나 저질인지, 불쾌한 것인지 욕하는 것은 자신들이 얼마나 폭력적으로 여성을 대하였는지에 대한 폭로와도 같기 때문이다. 기존의 사회가 지니고 있던 폭력적인 것들을 그래도 전유하는 방식의 혐오는 남성들을 자가당착에 빠지게 한다. 


<사진 3 : 맥심 9월호 표지>


  그러므로 ‘혐오’라는 수단을 문제 삼는 것은 메갈리아에서 진정으로 보아야 하는 것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혹은 보기 싫었기 때문에 나온 것으로 여겨진다. 그들이 무엇을 수단으로 삼았는지를 욕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항상 기존의 질서를 무너트리는 일은 정도의 차이를 보일 뿐 폭력적인 양상을 띤다. 우리가 메갈리아의 혐오에서 진정으로 보아야 하는 것은 메갈리안이 혐오를 하게 된 이유이다. 강명석은 메르스 갤러리가 메갈리아의 싹을 품고 태동하고 있던 시기에 ‘메르스 갤러리에 들어간 남자가 알게 된 것’이라는 칼럼을 쓴다. 그가 지적한 점은 여성들의 분노의 기저에는 공포가 자리하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 사회에서 여성 혐오는 그저 가치관을 규제하는 정도를 벗어난다. 여성은 당연하다는 듯이 범죄의 피해자가 된다. 10명의 강력범죄 피해자 중 9명이 여성, 강간, 살인 등의 대상이 여성 피해자인 것은 그렇게 놀랍지 않은 결과이다. 심지어 대중매체는 이것을 콘텐츠로 삼아 돈벌이를 한다. 남성을 위한 잡지 맥심에서는 여성 강간을 얼마나 영웅적으로 그리며 향유했는가. 메갈리아를 만든 분노는 자신의 안위를 걱정해야 하는 사회에 대한 분노와 동일시된다. 때문에 분명 남성들이 해왔던 여성 혐오와 메갈리안이 선택한 여혐혐은 그 메커니즘과 이유부터 확연한 차이를 보였던 것이다. 


  물론 메갈리아가 안고 있는 문제들은 많다. 일차적으로 그들이 수단으로 삼은 ‘혐오’가 언제까지 수단으로써만 유효할 수 있을지가 걱정이다. 혐오를 통해 이뤄낸 쾌거도 많지만, 이것이 지속될 경우 여혐혐은 그 의미가 본래의 의미가 퇴색된 채 그저 남혐이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이는 불과 얼마 전 메갈리아 내부에서 일어난 ‘게이’ 혐오 문제에서 불거지기도 했다. 혐오의 대상을 ‘남성’으로 할 것인지, 남성의 여성 혐오로 할 것인지, 그리고 본질적으로  ‘여성 혐오’를 어디까지 볼 것 인지도 문제다. 메갈리안의 사용자들은 각각 다른 기준과 잣대를 가진다. 그리고 이는 메갈리아 안에서도 거대 담론이 되어서 팽팽한 의견 충돌을 거치는 중이다. 


<사진 4 : 장동민의 발언으로 나온 구호 go wild, speak louder, think hard>



  하지만 분명한 것은 메갈리아를 통해 우리 사회의 여성들은 그들의 방식으로 언어를 전유하고 남성 권력에 균열을 주는 법을 터득했다는 것이다. 남성들이 항상 여성을 XX녀라고 호명하는 사이 그것이 아님을 밝히는 여성의 대답은 공허했다. 여성들의 논리적 대답에 콧방귀도 뀌지 않던 남성들이 혐오에 부들부들 떨었던 것은 사실이다. 인정하고 싶진 않겠지만 분명 메갈리아의 분노는 승리했다. 알아듣지 못하는 이들에게 알아듣게 했다는 점에서 심지어 그들은 젠더 간의 소통까지 가능하게 했다. 글을 마치면서 생각해본다. 메갈리아의 소통은 혐오이고 그것은 우리에게 불쾌감을 주었다. 하지만 때로는 감정이 많은 것을 아니 모든 것을 설명할 때도 있다. 메갈리아의 탄생에서 우리가 진정으로 깨달은 바는 바로 메갈리아가 주는 ‘불편함’ 그 자체가 아니었을까?


<참고문헌>

1. 단행본

-Beauvoir, Simone de, 이희영 역, 『제 2의 성』, 서울: 동서문화사, 2014.

2. 기사 및 인터넷 자료.

- 강명석, 「메르스 갤러리에 들어간 남자가 알게 된 것」, Ize, 2015.06.10. (2015. 12. 02 검색) http://ize.co.kr/articleView.html?no=2015060711047226519

- 백승호, 「메르스 갤러리에서 '남성 혐오'가 쏟아져 나온 까닭」, The huffington post , 2015.06.07. (2015. 12. 20 검색) http://www.huffingtonpost.kr/seungho-baek/story_b_7516330.html


                                                                                                                   by 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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