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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무리 Dec 25. 2015

착한, 상품, 좋아요

나쁜 나라 바꾸기 상상 #1

2009년의  크리스마스이브, 명동 인근의 공터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세 청년을 둘러쌌다. 한 명은 삼겹살을 굽고, 다른 한 명은 탬버린을 치고, 또 다른 한 명은 노래를 불렀다. 이 특이한 삼인조도, 그 구경꾼도 모두 일면식도 없이 오직 온라인을 통해 한 자리에 모였다. 이 모든 것은 세 사람이 베스트 댓글(이하 베댓)이 되기 위해 내세웠던 공약으로부터 시작되었던 사건이었다. 또, 페이스북의 ‘좋아요’를더 많이 받기 위해 멋진 셀카를 찍으려다 추락사를 하고, 비극적인 사고 현장에서 도움의 손길에 앞서 핸드폰 촬영을 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자신의 수배전단에 좋아요를 눌렀다가 검거된 우스꽝스러운 이야기도 들린다. 도대체 우리는 왜 이 좋아요 (혹은 추천하기) 버튼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오늘날 신자유주의 사회의 모습을 돌아보자. 3포를 넘어 5포까지, 점점 더 포기하는 것이 많아지는 지금의 삶에서 우리에게 과연 무엇이 남았을까? 끊임없는 자기계발과 경쟁 속에서 인간적인 삶을 계획할 수 있는 안정적인 터전은 끝까지 주어지지 않는다. 하늘 높이 치솟은 집값, 빨라지는 명예퇴직, 연애도 결혼도 육아도 허락하지 않는 오늘날의 현실 속에서 사실상 우리의 삶에 남아있는 것은 없다. 유일하게 남아있는 (혹은 주어지는) 생존경쟁은 오히려 가상적이다. 이유도 목적도 모른 채 트랙을 질주하는 경주마에게 강요된 시합이 자신의 삶의 본질과 무관한 가상적 게임이듯이, 신자유주의가 강요하는 우리의 생존경쟁 또한 마찬가지로 맹목적 게임에 불과하다. 그러나 시장 경쟁이라는 가상의 삶이 실제를 대체한다.


자기계발의 시대에서 시장 경쟁은 스스로를 상품으로, 더 나은 상품으로 만들 것을 요구한다. 시장에 놓인 모든 것은 상품이 되어 소비의 관계에 놓인다. 가격표가 붙여지고, 정체성이 규정된다. 보드리야르가 말하듯이 새로운 소비의 문화는 ‘개인의 완성’과 관련된다. 소비문화에 의해  마음속 깊숙이 자리 잡은 욕망은 겉으로 드러난 상표들의 코드 속에 구체화된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상품의 얼굴을 하고, 나아가 우리는 쇼윈도에 전시된 상품이 되어 가격표가 매겨진다. 그리고 벤츠남, 벤츠녀와 같은 명품이되기를 갈망한다. 더 높은 상품가치를 지니기 위해 자기계발에 매진한다.       


이제 사람은 상품이 된다.



상품성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타인의 시선이다. 시장에서 가치는 수요-공급곡선 위의 희소성으로 결정된다. 사람들이 열망할수록 가치는 증가하고, 외면할수록 가치는 감소한다. 상품가치는 화폐로 표시되어야 하고, 그것은 사람들이 원하는 정도를 말한다. 타인의 인정과 무관한 내면의 가치와 같이 거래될 수 없는 것들은 상품이 될 수 없다. 돈을  주고받는 소비행위는 서로가 가치를 공유하는, 따라서 매우 사회적인 일이다.


페이스북의 좋아요 수는 타인의 시선이 구체화한다. 추천 버튼은화폐가 되고, 게시물들은 소비된다. 이 소비 관계에 의해 개인의 정체성은 점점 더  객관화되어간다. 이전에는 혼자만의 공간이었을 일기장 같은 공간도 친구들과 함께 공유하게 되었으며, 앨범을 열어주기 전까지 보기 힘들었을 온갖 사진들도 실시간으로 공개하게 되었다. 페이스북이 개인정보를 노출시키는 문제를 일으키는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우리는 페이스북을 통해 더 넓은 세계의 더 많은 사람에게 더 세밀한 내면까지 드러내고 있다. 사회적 관계망 서비스(social network service)라는 이름에 걸맞게 우리는 개인의 공간을 부수고, 사회의 부분이 되어 간다.


SNS에서 사람들에게 보이는 모습에   신경을 쓰며 자기도 모르게 스스로를 잡아먹고 있을지도 모른다.


 

       2013년 겨울, 김연아의 피겨무대를 중계하는 한국과 서양의 다른 모습이 논란이 된 적이 있다. 서양의 해설자가 무대의 아름다움을 전달하려 노력하는 반면, 한국의 해설은 각 기술이 몇 점짜리인지를 전하는 데 모든 노력을 기울였기 때문이었다. 아름다움이란 굉장히 주관적인 것이다. 주관적 감상을 전달하기 위해 온갖 형용사들이 고안되었음에도 차마 그 마음을 다 담아내지 못한다. 때문에 객관적 심사를 위해서 심사위원들은 점수의 기준을 정했다. 나비 같은 날갯짓도, 실크의 잔물결도 숫자로 바뀌어 채점된다. 이 점수는 완벽하게 객관적으로 그 사람의 평가의 정도를 나타내지만, 평가자의 심정은 전혀 담아내지 않는다. 아름다움의 질적인 면은 고스란히 사라진 채, 양적인 비교만이 남는다.




       이것이 바로 소비의 구조가 가진 문제이다. 객관화되고, 상품화되는 사이, 우리가 지닌 결코 드러낼 수 없는 고유의 영역은 어느새 사라지고, 오직 표면적인 가치만이 남는다. 김연아의 피겨가 보여준 아름다움이 단지 메달과 점수만으로 표현될 수 없듯이, 우리는 남들이 보는 것 이상의 존재이다. 내면의 아름다움은 우리의 본질이다. 근대의 격변기에서 인류는 도덕의 전제로부터 벗어나고자 발버둥 쳤다. 그들은 인간은 자유로운 존재이고, 남들과 비교될 수 없는 고유한 인격을 가진 존재라 여겼다. 세상이 강요하는 도덕의 틀 안에 끼워 맞추려는 사회적 압력을 폭압으로 여기고자유, 완전한 자유를 갈망했다. 그 갈망이 최고조에 달했던 68 혁명의 시기에 사람들은 거리로 나와 모든 종류의 억압에 맞섰다. “금지하는 것을 금지하라!”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겠다는 것이 그들의 요구였다.


68 혁명


 

그 결과 우리는 자유롭다. 많은 이들의 지적처럼 현대 사회는 억압을 통해 통치하지 않는다. 그러나 무엇이든 꿈꿀 수 있는 자유는 온전히 어떠한 상품에 대한 욕망으로 이어진다. 우리의 자유는 소비의 자유이며, 우리는 소비자로서 존재한다. 보드리야르의 말처럼 소비자는 완전한 사회적 존재다. 소비자로서 꿈꾸는 모든 욕망은 시장의 질서를 따른다. 상품이 나를 나타내고, 나 또한 상품이 된다. 모든 것이 시장 속의 상품이란 것에 아무런 의문이나 거부도 없이 더 좋은 상품을 갖기 위해, 그래서 더 좋은 상품이 되기 위한 1분 1초 단위의 자기경영을 한다.

착한 상품이란 완벽히 정합적인 말이다. 도덕이 사회의 틀 속에 개인을 끼워 맞추듯, 상품은 수요라는 공공의 질서에 자신을 최선을 다해 끼워 맞춘다. 사람들의 좋아요를 받기 위해선 자신이란 상품을 다듬어야 한다. 자신은 품질관리의 대상이 된다. 이렇게 인간은 사라지고 상품만이 남는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소비의 주체가 아닌 소비의 대상이 되어버린다. 그 결과 우리의 삶은 시시포스와 같은 공허한 고통의 연속으로 채워진다. 끝없이 자기 계발하고, 경쟁하고, 돈을 좇으며, 소비한다. 그 사이에 버려지는 것은 타인과 무관 한나 고유의 공간, 자신의 주인된 본래의 모습이다.


현대사회의 고독은 군중 속의 고독과 같은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의 소외이다. 우리는 자신의 모습을 타인의 시선에서, 사회 속의 가치에서 찾기 때문에 그것과 무관한 자신만의 삶의 영역을 잃어버린 상실의 문제이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착한 상품이 되는 것으로는 이 고독을 끝낼 수 없다. 인간은 시장에서 벗어난 삶의 영역을 필요로 한다.


                                                                                                                          by 한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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