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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무리 Dec 25. 2015

사회적 경제: 시장이 사회적으로, 사회가 시장적으로?

나쁜 나라 바꾸기 상상 #2

지식인 사회에서 자본주의는 언제나 적대의 대상이었다. 사상의 역사를 살펴보았을 때, 보수는 과거의 인간적 사회를 파괴한다는 이유로, 진보는 계급적 억압의 구조를 이유로 자본주의를 비난하였다. 그리고 자본주의의 극복을 꿈꾸었다. 보수는 사회를 보호하고자 했고, 진보는 사회를 혁명하고자 했다. 긴 시간 동안 자본주의 사회는 지칠 줄 모르고 성장해갔고, 지쳐 버린 자본주의 반대 진영은 ‘대안’이란 새로운 희망을 꿈꾸게 되었다.  그중, 사회적 경제가 최근 대안으로 각광받고 있다. 


사회적 경제를 대안으로 삼는 이들은, 경제 세계를 사회적인 요소로, 인간적인 따듯함으로 물들이자고 외친다. 이기적이고 공격적인 침팬지와 달리 공동체적이고 평화적인 보노보의 모습을 지향하자는 보노보 혁명과 같은 구호를 외친다. 이윤을 추구하는 기존의 경제질서와 달리 가치를 추구하는 경제적 주체를 만드는 것이 그 핵심이다. 기업도 사회의 일원임을 강조하는 기업의 사회적 책임(CSR), 경제적 방식으로 사회적 가치를 추구하는 사회적 기업, 소유가 아닌 사용을 추구하는 공유경제 등이 그 구체적 모습을 이룬다. 특히나 한국 사회에선 사회적 기업법이제정되어 국가적으로 사회적 기업의 설립을 지원하고, 협동조합법이 제정된 이후로 협동조합 설립으로 대안을 추구하는 사회적 운동이 활발히 전개되고 있다. 그런데 과연 사회적 경제가 자본주의의 대안이 될 수 있을까? 


                                                   


작년 10월에 보도되었던 한병철 베를린예술대 교수의 <친절마저 상품이 된 시대, 혁명은 없다>라는 반박문은 ‘대안경제’에 대해 조금 더 반성해볼 것을 촉구한다. 그는 다음과 같이 새로운 통치체제를 분석한다. 신자유주의 체제의 통치기술의 핵심은 과거에 자유를 억압하던 것과 반대로 사람들이 자유를 누리게 하는데 있다. 체제 안에서 자유롭게, 욕망하고, 그 욕망을 충족하면서 통치는 안정적으로 유지된다. “신자유주의는 억압받는 노동자로부터, 스스로를 경영하는 자유로운 경영자(자기-경영자)를 만들어 …… 계급투쟁을 자기 스스로와의 내적 싸움으로” 바꾼다. 그리하여 “오늘날에는 누구나 스스로를 착취하는 노동자다. 누구나 주인이면서 동시에 노예다. 오늘날 실패하는 사람은 스스로를 탓하고 부끄러워한다. 사회가 아닌 자신을 문제로 여긴다. …… 사회를 변화시키는 대신 자기 스스로에게 폭력을 행사한다.”        


  

 여성 모델의 거식증은 변화를 자신에게  강요하며 스스로에게 상처를 주는 대표적 사례이다.



그래서 새로운 자본주의의 통치질서 속에서 사회적 경제(상품으로서의 공산주의)는어떤 의미를 가질 것인가? 그에 따르면 우리의 희망과 달리, “나눔 경제는 결국 우리 삶을 전체적으로 상품화하게 될 것이다.” 돈이 없는 사람은 공유에 접근이 배제되며, 나눔은 평점을 위해 베풀어진다. 아니, 새로운 전망 속에선 베풂이 아니라 상품이 된다.


칼 폴라니는 그의 저서 <거대한 전환>에서 시장과 분리된 사회와 그 사회를 잠식해오는 시장의 위협을 이야기한다. 시장이 사회의 영역을 잠식하면서 ‘악마의 맷돌’처럼 인간사회를 짓이겨버린다. 인간적 사회는 그 구성원을 보호하며 삶의 터전을 구성한다. 그 속에서 살아가는 안정된 사람들에게 일이란 삶을 꾸려가기 위해 필요한 행위였다. 그리고 그것들은 사회라는 삶의 터전 속에서 찾아낼 수 있었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시장질서는 결핍되고, 갈망하는 일꾼을 원했다. 그래서 아프리카에선 바나나 나무가 베어져 원주민들로 하여금 먹을 것을 찾아 헤매도록 만들었으며, 영국에선 엔클로져로 농민들을 도시로 쫓아내었다. 이제야 사람들은 결핍되고 갈망하는 존재가 되었으며, 시장 속 일자리에 매달려 살아가게 되었다.


역사를 비교해볼 때, 시장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굉장한 물질적 보상이 주어졌다. 적어도 산업화에 성공해, 경제성장을 이루어 낸 한국과 같은 사회의 일원들에게 이는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이 새로운 삶의 형태는 물질적 보상과 함께 인간적 피폐를 가져왔다. 시장의 장점은 경쟁이 가져오는 효율성에 있고, 시장 경쟁은 적자생존이라는 사회적 다윈주의로 이어졌는데, 인위적이고 부패한 권력의 지배로부터 벗어나, 능력에 따라 번성하거나 도태하는 자율시장의 조정 작용(수요-공급 곡선)에 따라 사회가 발전할 것이라는 전망을 갖고 있었다. 자본주의 반대자들이 이러한 생각을 격렬히 거부한 이유 중 하나는 그렇다면 시장에서 도태한 사람들은 어떻게 되느냐는 것이었다. 하층 노동자나 빈민층처럼 자본주의 사회에서 ‘잘 나가지 못하는’ 사람들은 도태되는 이들인가? 그렇다면 이들이 도태되는 것은 비참하게 죽어가는 것을 뜻하는가? 이러한 질문 앞에서 적자생존이라는 생각은 우월한 유전자만 남고, 열등한 유전자는 사라져야 한다는 우생학적인 모습을 드러낸다. 


이윤이 아니라 사람을 위하여!



폴라니는 시장이 사회를 잠식했을 때의 파괴적 모습을 목격하고, 그 원인을 거짓된 상품들에게서 찾는다. 상품이 될 수 없는 상품들을 시장에서 분리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역동적으로 팽창하는 시장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통행금지 구역을 만들어 사회라는 인간적 삶의 기반을 보호하는 것이다. 이러한 탈상품화(de-commodification)는 복지사회의 핵심적인 가치로 이어졌다. 의료, 주거, 교육 등등의 삶의 기반을 이루는 것들은 ‘사람답게 살 수 있도록’ 보호되어야 한다. 어느 누구도 인간으로서의 삶의 존엄함이 침해되어선 안 되는 것이다. 그것이 지켜지는 사회의 보호를 통해 사람들은 각자 인간으로서 갖는 평등함을 시장의 경쟁 속에서도 누릴 수 있게 된다.       



                                           

그러나 한병철 교수의 분석과 같이 사회적 경제는 삶의 영역을 시장 속 상품으로 바꾸어 낸다. 사회적인 것들에 경제적 가치를 부여한다는 선의의 기획 속에서 사회적 가치는 경제적 가치로 바뀌고 만다. ‘혁명을 판다’는 어떤 도발적인 책의 제목처럼 값을 매길 수 없던 것들에 값이 매겨지고, ‘모든 것’은 시장 속에서 충족되게 된다. 시장의 극복조차 시장 속에서 구할 수 있는 상품이 되어버리고 만다. 폴라니가 역설한 것은 사회의 모든 것이 시장의 일부가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의 삶을 보호하는 사회라는 것은 본래 시장의 바깥에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시장이 이 사회를 잠식하지 못하도록 보호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사회적 경제는 시장을 인간적으로 바꾸려 한다. 그러나 시장이어선 안 되는 삶의 영역을 지키는 것은 또 다른 몫인 것이다. 그것이 사회적 경제의 이름으로 시장 밖 삶의 영역을 시장 속으로 끌어당기는 것을 경고해야 할 이유이다.


*한병철 교수의 원글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660120.html


                                                                                                                                              by 한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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