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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무리 Dec 24. 2015

<매드 맥스> : 여성에서 위대한 인간으로

어떤, 여성과 낯선, 이야기 : 2

<<사진 1 : 매드 맥스 포스터>>




  모래 먼지밖에 남지 않은 지구. 그들에게 유일한 자원이자 구원은 크롬색으로 빛나는 8기통 엔진뿐인 세계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또다시 생존을 위해 달린다. 거친 액션의 대가인 조지 밀러 감독의 오랜만의 시리즈 복귀작인 매드 맥스는 개봉 전 아포칼립스인 세계에서 주인공인 맥스가 얼마나 많은 볼거리를 보여줄지에 대한 관심으로 뜨거웠던 영화였다. 하지만 막상 뚜껑을 열었을 때 환호는 다른 곳에서 터져 나왔다. 그저 땀 냄새나는 소위 ‘할리우드적 영웅 신화’를 그릴 것 같았던 매드 맥스는 인간의 실존이라는 측면에서 관객과 평단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그리고 그 환호의 중심에는 주인공 맥스가 아닌 ‘퓨리오사’로 대표되는 여성들이 존재한다.


<<사진 2 : 매드 맥스에 등장하는 여성들>>



  매드 맥스에는 여러 의미로 매력적인 여성들이 등장한다. 파르라니 깎은 머리에 훤칠한 키, 굳은 표정의 퓨리오사는 소위 ‘걸 크러쉬’를 일으키는 여전사의 전형이다. 몸매가 다 드러나는 옷을 입은 임모탄 조의 다섯 브리더들은 또 얼마나 아름다운가. 이 때문에 어떤 이들은 매드 맥스에 등장하는 여성들 역시 할리우드 영화가 그려왔던 흔한 여성 서사 속 인물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지적하기도 한다. 물론 임모탄 조의 압제에서 벗어나 성공을 거두는 퓨리오사의 모습은 수많은 여성 영웅 신화를 답습하는 것으로 읽힐 수 있다. 하지만 분명 퓨리오사와 브리더들의 탈주는 여성 영웅 신화가 보여주는 것 이상을 함의한다. 이 주장을 펼치기 위해서는 먼저 여성 영웅담에 대해 이해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여성 영웅담에서 흔히 발견할 수 있는 메커니즘은 다음처럼  정리될 수 있다. 우선 훗날 영웅이 되는 주인공은 처음에는 어떤 이유로든 공동체에 속하지 못하는 인물이다. 대체로 이들은 공동체의 일원에 의해 공동체 밖으로 떠밀리거나 혹은 철저히 고립된 채 살아간다. 하지만 곧 공동체에 위기가 닥친다. 이 위기는 공동체의 존립 자체를 흔드는 위기이다. 이때 여성 주인공은 숨겨왔던 능력을 발휘하여 공동체의 위기를 극복한다. 동시에 그녀는 그녀를 공동체에 속하지 못하게 했던 이유를 해결하며 한결 고양된 인물이 된다. 박씨전을 예로 들면 박 씨 부인은 못생긴 외모로  타박받지만 곧 허물을 벗고 아름다운 외모를 찾는다. 한편 공동체의 문제를 해결하고 한결 고양된 인물이 된 여성은 공동체 속으로 ‘귀환’한다. 여기서 바로 남성 영웅담과 여성 영웅담의 차이가 발생한다. 남성 영웅은 문제를 해결하고 공동체 밖에서 혹은 자신이 속한 공동체를 넘어서는 세계를 구축하는 반면에 여성 영웅은 자신을 밖으로 떠밀었던 사회, 즉 남성 중심의 기존 사회로 다시 회귀한다. 이때 여성의 능력이나 여성의 고양은 그저 남성 중심의 공동체에 여성 영웅이 적합한 인물임을  확인받는 정도로 쓰인다. 때문에 일견 한계를 극복하고 자립한 듯 보이는 여성 영웅들은 사실 남성들 사회에서 요구되는 역할을 수행했을 뿐이다. 


  한편 위기를 극복한 보상으로 남성 영웅들에게 대체로 미녀나 국가의 통치권이 주어진다. 하지만 공동체로 다시 회귀한 여성 영웅에게 주어지는 보상은 공동체의 ‘숭배’이다. 1장에서도 밝혔듯이 여성들에게 주어지는 숭배는 또 다른 족쇄가 된다. 그뿐만 아니라 이 족쇄는 여성 영웅 당사자에게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를 이루는 여성 전체에게 주어지는 족쇄이다. 여성 영웅이 존재하게 되면서 공동체의 나머지 여성 구성원들에게는 그녀를 닮도록 노력해야 하는 의무가 주어진다. 곧 여성 영웅의 미담을 실천하지 못한 여성들은  손가락질받게 된다. 여성 영웅으로 추앙받는 인물 역시 남은 삶이 녹녹하지 않다. 이제 그녀의 실패는 여성 전체의 실패로 환원된다. 최근 한 여성 앵커의 눈물 섞인 인터뷰는 이 점을 반증한다. 그녀는 ‘나의 실패가 여성의 실패로 비추어질까 봐 죽도록 노력했다’고 자신을 회고했다. 남성 영웅의 실패는 ‘개인’의 비참한 말로일 뿐이다. 하지만 여성 영웅은 그렇지 않다. 이들은 이제 자신의 어깨에 인류로서 여성 전체의 평가를 짊어져야 하는 처지가 된다. 


<<사진 3 : 매드 맥스 포토예고편 : 왜 그녀들은 탈주하는가?>>



  이런 점에서 볼 때 퓨리오사와 브리더들은 여성 영웅담의 주인공들과 그 시작점부터 다르다. 우선 그녀들은 그들이 속한 공동체에서 떠밀린 존재들이 아니다. 오히려 그녀들은 그 사회에서 이미 여성 영웅인 존재였다. 임모탄 조의 열렬한 보살핌을 받았던 브리더들은 물론이고 퓨리오사 역시 임모탄 조가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전사 중 하나였다. 간단히 말해 그들은 지배층의 호사를 누리던 이들이다. 그런 점에서 그녀들이 시타델을 떠난 것은 사회에 속하지 못함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철저히 자의에 의한 것이다. 때문에 우리는 이들의 도망을 탈주라고 명명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이들의 탈주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대답은 간단하다. 앞서 말했듯이 그들은 인간으로서 오롯이 존재하고자 탈주를 선택했다. 남성 중심의 시타델 사회에서 그녀들의 존재가치는 유용함에 있었다. 브리더들은 임모탄 조의 자식을 낳을 수 있기에 유용했고 퓨리오사는 전사로서 임모탄 조의 통치체제를 공고히 한다는 점에서 유용했다. 즉, 그들은 남성들이 권력을 유지함에 있어서 존재 가치를 부여받았다. 때문에 이들이 탈주를 통해 얻고자 했던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이었다. ‘인간으로서 존재함’ 그 차제 말이다. 


<<사진 4 : 도망치는 브리더들과 퓨리오사, 워보이>>


  브리더들이 "우리 아이들을 당신처럼 만들지 않겠다" "우리는 물건이 아니다"라는 말을 남긴 채 떠날 수 있었던 이유도 그것이다. 그들이 최소한의 생활, 어쩌면 그 이상의 것을 보장하는 시타델을 등진 까닭은 역설적이게도 '생존'에 있었다.  소유당하는 존재로 연명하기를 포기하고, 존엄성을 지키며 살기를 원하는 그들은 비장하게 시타델을 떠난다. 자신들을 어떠한 쓸모로 규정한 세상에서 탈주했을 때 그들에게 드리워진 전사로서의 ‘여성’과 어머니로서의 ‘여성’은 모두 사라진다. 좀 더 젠더적 의미로 말했을 때 남성과 여성이라는 이분법으로 지워진 꼬리표는 소멸한다. 그들은 이제 ‘무성(無性)’의 인간이 된다. 비로소 그들은 인간으로서만 존재하기 시작한 것이다. 때문에 “많은 어머니들의 녹색 땅(The green place of many mothers)”으로 가는 그들의 여정은 본격적으로 인간 실존을 찾아가는 여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 


<<사진 5 : 맥스 로카탄스키>>


  그러나 이 여정에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하는 존재가 하나 있다. 그는 바로 ‘맥스 로카탄스키’이다. 매드 맥스의 주인공 맥스는 사실 영화의 도입부를 제외하고는 존재감을 발휘하지 못한다. “많은 어머니들의 녹색 땅을 찾아가는 여정에서도 마찬가지로 그는 갑자기 끼어든 이방인이자 퓨리오사의 여정을 성공시키는데 도움을 주는 조력자일 뿐이다. 할리우드 문법에 따르자면 여성 캐릭터들이 도맡았어야 할 역할을 타이틀롤인 맥스가 담당한다니 개봉 초반 차라리 제목을 바꾸라던 매드 맥스의 팬들의 불평 섞인 목소리가 괜히 나온 것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우리는 곧 맥스가 영화에서 차지하는 위상이 사실 그 조력자의 위치에서 나온다는 점을 발견하게 된다. 이를 주목한 평론가 최지은은 그녀의 칼럼에서 맥스에 대해 다음의 7가지 이유로 찬사를 보낸다. 그는 “쓸데없는 말을 하지 않는다. 듣기는 잘 듣는다.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한다. 알뜰한 살림꾼이다. 살아남고, 살린다. 상대를 존중한다. 잊지 않는다.” 이 찬사에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핵심은 바로 퓨리오사와 브리더들의 혁명의 여정이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가 바로 ‘맥스’라는 ‘남성의 조력’에 있다는 것이다. 


<<사진 6 : 퓨리오사가 총을 쏘게 어깨를 내어주는 맥스>>


  맥스가 택한 자세는 ‘공감’과 ‘공존’이다. 흔한 남녀 주인공들처럼 사랑에 빠지는 것도 아니다. 두 사람은 철저히 파트너 관계를 유지한다. 이들은 함께 권력의 상징이자 약자를 쉽게 소모하는 사회를 대표하는 임모탄을 함께 쓰러트린다. 하지만 그는 리더의 자리를 퓨리오사에게 넘겨준다. 그리고 또 다른 여정을 향해 떠난다. 떠나는 자의 뒷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최지은의 말을 빌려 묘사하자면 그는 어찌 보면 야만의 세계에서 누구보다 훌륭한 신사이다. 일찍이 서구 페미니즘의 성서라 불리는 보부아르의 『제2의 성』의 마지막 문장은 이러하다. “이 주어진 현실 세계를 자유가 지배하도록 하는 것이 인간에게 주어진 임무다. 이 숭고한 승리를 쟁취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남녀가 그 자연의 구별을 초월해서 분명히 우애를 확립하는 것이 필요하다.” 즉, 보부아르는 여성이 압제를 벗어나 인간으로서의 자유를 얻는 데에는 남녀 간의 공존과 우애가 필요하다는 것을 역설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매드 맥스에서 맥스와 여성들이 보여준 동행을 통해 꽤나 모범적인 우애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이제 우리 세계의 이야기로 눈을 돌려 보자 여전히 우리 사회에서는 많은 여성 영웅 신화가 쓰이고 있다. 2015년 11월호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에서는 이라크 쿠르드 여성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쿠드르 족 여성이 사회의 다방면에서 활동하며 IS의 여성 혐오와 대조적인 여성 해방을 이루는 것 같지만 그 이면에는 또 다른 여성 혐오와 박해가 중첩된다는 내용이다.  이처럼 우리 사회의 도처에서는 수많은 여성신화들이 쓰이고 있다. 그것이 여성 해방을 나타낸다고 우리는 자부해왔다. 하지만 여성 신화가 세워지는 한 켠에서 현대를 살아가는 수많은 브리더들은 ‘아팠다’. 누군가는 숭배가 주는 감정의 크기가 너무 커서 그들은 그 아픔을 쉽게 잊었을 것이다. 누군가는 매드 맥스의 여성들처럼 인간으로서의 자신을 찾기 위해 탈주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탈주하기 시작한 이들에게 영화는 말한다. 그대가 ‘사람답게’ 설 수 있는 것은 타지에 있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는 곳은 바로 여기다. 많은 어머니들의 녹색 땅이 사라졌음을 알았을 때 퓨리오사가 시타델로 눈을 돌렸던 것처럼 그대들이 발 디딘 곳에 눈을 돌려라. 그리고 또 다른 맥스들과 그대가 사는 시타델에 균열을 내라. 그것이 바로 인간이 인간으로서 더 나은 삶의 방향으로 나아가는 길임을 잊지 말라고 말이다. 


<참고문헌>

1. 단행본

-Beauvoir, Simone de, .이희영 역, 『제 2의 성』, 서울: 동서문화사, 2014.

2. 기사 및 인터넷 자료.

- 라효진, 「‘매드 맥스’는 왜 입소문의 주인공이 되었나」, 오마이뉴스, 2015.05.30. (2015. 12. 20 검색) http://entertain.naver.com/read?oid=047&aid=0002089409

- 최지은, 「[매드 맥스] : 분노의 도로 ④ 맥스에게 배우는 문명인의 자세」, Ize, 2015.05.26. (2015. 12. 17 검색) http://ize.co.kr/articleView.html?no=2015052512267210335&type=&

- 황효진, 「[매드 맥스] : 분노의 도로 ①퓨리오사, 위대한 인간.」, Ize, 2015.05.26. (2015. 12. 17 검색) http://www.ize.co.kr/articleView.html?no=2015052513447260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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