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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무리 Dec 24. 2015

<달아 달아 밝은 달아, 묘진전> : 숭고 그 지독한

어떤, 여성과 낯선 이야기 : 1 

 

<사진1 : 영화 ‘왕후 심청’의 심청> 
<사진 2 : 묘진전 예고편의 진홍>


 여기에 두 개의 기념비가 있다. 하나는 ‘아비’를 대신에 목숨을 바친 소녀에게 바쳐진 비석이다. 이 비석에는 ‘효녀 심 씨’라는 이름이 적혀있다. 다른 하나는 다 죽어가는 ‘지아비’를 위해 생살을 가르고 피를 먹여 살린 아낙에게 바쳐진 것이다. 이 비석에는 ‘권 씨 여인’이라고 적혀있다. 이 두 여인은 각각 ‘심청전’의 심청과 창작 웹툰 ‘묘진전’의 진홍이다. 사람들은 두 사람의 행실을 들어 그녀들을 효녀와 열부로 칭송한다. 국가는 이들을 기리기 위해 보상으로 거대한 건축물을 세워준다. 두고두고 사람들 입에 오르내릴 여인들이나  이 기념비에는 정작 ‘청’이라는 이름도 ‘진홍’이라는 이름도 찾아볼 수 없다. 그렇다면 이 기념비는 차라리 ‘심 씨’ 가문이나 ‘권 씨’ 가문에 바쳐진 것이라고 보는 것이 옳을 지도 모르겠다. 이제 우리는 이 여인들에게 바쳐진 숭고함을 달리 볼 필요가 있어 보인다. 나는 이 글에서 최인훈의 ‘달아 달아 밝은 달아’와 젤리빈의 ‘묘진전’을 통해 숭고함에 감추어졌던 비밀을 폭로해볼까 한다. 


<사진 3 : 영화 ‘왕후 심청’ 속 용궁>


    심청이의 이야기부터 시작하자. 우리가 흔히 아는 심청이는 눈먼 아비를 대신해 인당수에 퐁당 뛰어드는 여인이다. 그녀의 효심은 용왕마저 감동시켜 그녀는 연꽃을 타고 살아나 조선의 왕후가 된다. 하지만 과연 심청이가 진정으로 효녀였을까? 최인훈 선생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 ‘달아 달아 밝은 달아’의 심청은 사실 아버지의 개안을 위해 스스로 인당수에 뛰어드는 아이가 아니다. 심청이는 300냥에 청국의 홍등가로 팔려간다. 심청이를  판 사람은 다름 아니라 아버지인 심봉사다. 또한  ‘달아 달아 밝은 달아’에서 심청이가 물에 뛰어드는 이유는 홍등가로 가기 싫어서이다. 심청이가 홍등가로 팔려가지 않고 자살한다면 심봉사는 300냥을 돌려주어야 한다. 하지만 심청이에게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심청이는 우리가 생각하는 효녀와 거리가 있어 보인다. 


  하지만 당시 조선의 현실을 되돌아볼 때 최인훈 선생이 읽어낸 심청이는 꽤나 설득력을 가진다. 가진 땅도 없이 삯바느질로 연명하던 그 시대의 여성인 심청이가 정당한 방법으로 300냥이라는 돈을 벌 수 있을 가능성은 없다. 결국, 그녀가 가진 재산은 ‘신체’뿐이다. 여성의 신체는 대체로 남성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방식으로 소비된다. 이때 누구의 의지로 자신의 신체를 팔게 되느냐는 중요한 문제가 된다. 최인훈 선생은 그것이 심청이 자신의 의지라기보다는 아버지의 의지였다고 생각한다. 300냥이라는 요구만 없었어도 두 부녀는 부족하지만 지금처럼 정답게 살아 갈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심청이는 인당수로 향하는 배를 타고 만다. 이러한 눈으로 심청전을 보면 심청전은 자식을 팔아먹을 수밖에 없었던 현실에서 쓰인 위로 정도로 해석될 수 있다. 자식을 팔아 놓고 자식에게 ‘효’라는 숭고함을 부여하면서 정작 자신들은 자식을 팔아먹는 자신의 행위를 미화시킨 것이다. 한편 심청전에서 ‘봉양’의 문제가 중요하게 제시되지 않는다는 점도 앞의 해석의 근거가 될 수 있다. 유교사회에서 ‘효’의 본질은 부모를 잘 ‘봉양’하는 것이다. 이것은 부모의 생전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부모의 사후까지 책임지는 봉양을 말한다. 제사는 그것을 잘 드러내는 유교적 전통이라 할 수 있다. 때문에 ‘자식이 부모보다 먼저 죽는 것만큼 큰 불효가 없다는 말’의 이면에는 부모의 사후까지 책임져야 하는 자식의 의무가 담겨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심청전에서 누구도 심청이가 살아남아 아버지를 봉양하는 것이 더 큰 효도라고 말리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다. 사람들은 그저 눈물을 훔치며 그녀를 잘 보내주기에 급급할 뿐이다. 


  이 봉양의 문제는 만일 심청이가 남자아이였다면 과연 인당수에 빠지게 되었을까는 의문으로 이어진다. 내가 생각하건대 아마 심청이가 아들이었다면, 그를 팔자라는 이야기가 나왔을 때 가장 먼저 노발대발할 사람은 심봉사였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심청이의 인신 공양은 효도와 권력의 관계에 대한 문제로  치환될 수 있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아버지는 부모라는 이름의 권력이다. 가문에서 2인자가 있다면 그것은 어머니가 아니라 아들이다. 16살의 어린 딸이 물에 빠질 것인지, 아닌지를 결정하는 권력을 가진 것은 아버지이다. 심청이가 아무리 굳은 의지를 갖췄다고 해도 심봉사가 말렸다면 심청이가 배에 탈 수 있는 가능성은 크지 않았을 것이다. 이는 바꾸어 말하면 심청이가 아무리 인당수에 빠지기 싫었어도 심봉사가 심청이를 보내고-최인훈 선생에 따르면 팔아넘기고- 눈을 뜨겠다는 강한 의지를 가진 이상 그녀는 그녀를 망망대해로 이끄는 배에 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더 나아가 그 아버지로 대표되는 권력은 심청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그녀를 효녀로 만들 수 있다. 심청이 효녀가 되어야만 눈을 뜨기 위해 딸을 팔았다는 비난에서 보다 자유로울 수 있기 때문이다.


<사진 4 : 열녀문을 바라보는 진홍 >


  한편 묘진전의 진홍은 권력이 ‘숭고미’를 탄생시키는 모습을 보다 명료하게 보여주는 인물이다. 묘진전에서 진홍은 처음부터 열녀가 아니었다. 오히려 두말하면 입이 아플 정도의 악녀로 그녀는 묘사된다. 그녀가 열녀가 된 것은 그녀 스스로 열녀가 되기를 선택했기 때문이다. 선택의 이유는 오직 권력을 가지기 위해서이다. 남편의 사랑을 얻고, 그를 통해 가문에서 자신의 권력을 차지하고 자신을 깔보던 이들을 깔아뭉개기 위해 그녀는 열녀의 탈을 쓴다. 자신이 후에 가질 권력을 위해서라면 남편의 고름을 빨고, 제 살을 갈라서 피를 먹이는 일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녀의 가면극은 완벽해서 그녀를 천시하던 시댁 사람들은 그녀의 행위를 칭송해마지않는다. 그리고 곧 그녀가 그토록 원하던 열녀문을 국가에서 세워준다. 진홍에게 열녀문이라는 것은 비로소 시댁의 일원으로 인정받는 것이며 이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이 가질 수 있는 힘을 얻었다는 것의 증명이었다. 


<사진 5 : 열녀문의 내용>


  하지만 열녀문을 바라본 진홍의 얼굴은 일그러진다. ‘정기창의 며느리이며 권호의 여식이며 정요송의 아내인 권씨 여인. 비석을 가득 채운 글자들 중에는 진홍, 자신의 이름 두 자는 없었다.’ 열녀문이 세워졌다고 벌어지는 잔치에서조차 그녀는 얼굴을 보일 수 없었다. 그것이 열녀의 미덕이었기 때문이다. 진홍은 비로소 그토록 가지길 원했던 권력이, 열녀에게 주어지는 숭고함이 실은 족쇄임을 깨닫는다. 권력이 족쇄라면 탐나지 않는다. 진홍은 가면을 벗어던진다. 그리고 자신을 농락했던 남성의 권력을 철저히 파괴하려고 마음을 먹는다. 본래 악녀였던 진홍은 그녀의 어둠이 만들어낸 미물에게 자신의 영혼을 주어버린다. 자신의 악함이 만들어낸 미물에게 자신을 팔아버린다. 슬프게도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여성이 권력은 가질 수 있는 것은 열녀문을 통해 만들어진 숭고함이거나 악마에게 영혼을 파는 방법으로 얻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두 이야기는 입을 모아 말한다. 효녀도 열부도 결국 남성의 권력이 만드는 것이라고. 남성 권력이 요구하는 덕목을 순순히 받아들일 때 심청이 같은 선인으로 여성은 칭송받는다고, 설령 진홍과 같이 지독한 악녀일지라도 그것에 순종할 때 여성은 열녀가 될 수 있다고 말이다. 남성 위주의 가부장제 국가를 유지할 때 그것은 남성의 의지만으로는 불가능하다. 모든 여성이 언제까지나 부당함을 참고 살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남성들은 여성들 스스로가 가부장제 권력에 부역하도록 만들 필요가 있었다. 열녀와 효부는 그러한 필요에서 만들어진 효과적인 제도였다. 숭고함과 찬양으로 치장된 효녀와 열부라는 제도의 도입은 비합리적인 처사에 대한 여성의 불평을 막았다. 또한, 이는 조선사회에서의 여성 인권의 사각지대를 만들었다. 숭고함이라는 견고한 울타리 속에서 여성들은 스스로를 희생시켰다. 여성의 수절도, 남편을 따라 자결하는 것도, 부모를 위해 육체를 훼손하는 것도 모두 그 울타리 안에서 행해진 것이다. 그리고 숭고함이라는 지독한 족쇄는 여전히 여성들의 발목을 옥죄고 있다. 심청과 진홍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우리 사회에서 여전히 생성되는 숭고함을 돌아볼 필요를 느껴야 한다. 여성의 아름다움에 대한 찬양이, 넓은 이해심에 대한 찬양이, 모성에 대한 찬양이 모두 남성과 여성의 권력관계에서 만들어진 이데올로기일 뿐이다. 때문에 한 여성학자가 말했던 것처럼 숭고함이 족쇄인 세상에서 ‘여성들은 매일 아침 거울 앞에 설 때마다 거울을 깨끗이 닦고 거울을 노려볼’ 필요가 있음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참고문헌>

1. 단행본

-Beauvoir, Simone de .이희영 역, 『제 2의 성』, 서울: 동서문화사, 2014.

-주디스 버틀러, 초현준 역, 『젠더 트러블 : 페미니즘과 전체성의 전복』, 문학동네, 2010.

-최인훈, 「달아달아 밝은 달아」,『옛날 엣적에 훠어이 훠이』,文學과 知性社, 1989.

-김주현, 『외모꾸미기 미학과 페미니즘』, 서울:책세상, 2009.

2. 기사 및 인터넷 자료.

- 남민영, 「빛을 잃지 않는 법 : 『묘진전』의 작가 젤리빈 」, Acomics, 2015.10.06. (2015. 12. 20 검색) http://acomics.co.kr/archives/30946

- 젤리빈, 『묘진전』, 다음 웹툰,  2013. 11.21-2015.10.26, http://webtoon.daum.net/webtoon/view/godstory 


                                                                                                                                                           by 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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