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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무리 Dec 30. 2015

일베: 문화가 정치로!

문화의 정치성: 좋은 감성이 만드는 좋은 정치 chapter. 2 

 0. 감성으로 정치하기


 지난 챕터(문화의 정치성: 좋은 감성이 만드는 좋은 정치 chapter. 1)를 통해서 단지 흥미롭고 감동적인 것 정도로 소비하던 문화 속에 정치적인 이야기들이 숨어져 있다는 것을 살펴보았다. 그렇지만 삶 정치는 꼭 원피스나 스타크래프트 같은 대서사 작품에서만 드러나는 건 아니다. 우리가 SNS 같은 각종 인터넷 플랫폼을 이용하는 모습에서도 정치성이 숨겨져 있다. 물론 계속 얘기하지만, 그것은 문재인과 안철수가 싸운다든가, 김무성이 막말을 쏟아낸다든가 하는 제도 정치 이야기가 마구 오가기 때문만은 아니다. 친구의 어떤 글에 ‘좋아요’를 누를 것인가도 정치이고, 어떤 글을 ‘리트윗’하는가도 정치다. 삶 속에서 어떤 선택을 하고, 어떤 표현을 할 것인가가 모두 정치이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은 똑똑하고 이성적인 사람들(철학자들)만이 정치를 하는 것이라고, 우매한 대중은 정치를 하지 말아야 한다며 ‘철인정치’를 주장했다. 이런 생각은 우리나라에도 쭉 이어져 와서 어떤 민족의 지도자가 나타나 우릴 구원해주길 바라는, 훌륭한 성품을 가진 인격이 우릴 대표하여 정치해주기를 바라는 열망으로 표현되고 있다. 과거 안철수에 대한 청년들의 열망, 노인세대의 박정희-박근혜(산업화)에 대한 열망! 이렇듯 우리는 정치는 ‘훌륭한 무언가’가 지배해야 하는 것처럼 여겨지기 쉽다. 그러나 문화 속에서 정치가 있다는 말을 조금만 풀면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어떤 감정을 가지는가 자체가 정치를 생산한다.” 문화는 어떤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논리에 기반을 두어서만 생산되는 것이 아니라, 감정을 승화시키고 감정의 흐름을 타면서 만들어진다. 논리는 그 이후에 생긴다. 우리가 사실 무언가 옳다고 말하는 것도 어떤 감정과 욕망의 표현 이상이 아니다. 가령 ‘살인은 나쁘다’의 논리적 근거가 존재하는가? 천부인권? 그런 어려운 말을 쓰지 않아도 단지 인간이 죽고 싶어 하지 않기 때문에 살인은 나쁜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 죽은 상태가 아니라, 산 상태로 함께 살고 싶기 때문에 살인을 금지한다. 우리의 감정이 곧 정치적 논리를 생산하는 가장 중요한 기반이라는 것이다.


 어려운 얘기가 아니다. 일베를 보자. 디씨인사이드(이하 디씨)의 일간 베스트를 저장하던 ‘일간 베스트 저장소’의 정치 게시판이 지금 우리가 일베라고 부르는 것이 되었다. 디씨가 재미를 추구하는 사이트라, 일베 역시 재미있게 노는 것에서부터 시작했다. 그러나 그들의 비틀어진 ‘어떤 마음’이 그들을 지나치게 공격적으로 만들었다. 민주화, 기존 윤리체계, 대안 운동들 전반에 욕설을 배설하며 사람들에게 충격을 줄 뿐 아니라, 호남 사람들과 사회적 약자들(성소수자, 여성, 이주민, 장애인, 노인 등)에 대한 무자비하고 차별적인 공격을 가해 다른 사람들 마음에 상처를 주기 시작했다.


 일베는 도대체 왜 그러는 걸까? 스스로를 일베충이라고 비하하고, 욕설을 배설하고, 약자를 괴롭히며 재미를 찾는 그들을 이해하는 건 꽤 지난한 과정 같다. 그러나 이해해보면, 이들도 어떤 ‘실패’에 결과물이라는 걸 알게 된다. 실패로 인한 좌절감으로 원한을 만들고, 원한을 폭력적인 정치로 이어간 그들의 모습을 한 번 살펴보자.


베츙이 코스프레


 1. 일베, 잉여들의 좌절


 일베는 어디로부터 유희를 얻는 걸까? 운영자 새부에 의하면 “금기를 위반하고, 권위를 조롱하며” 유희를 얻는다고 한다. 민주화 같이 비판의 성역을 공격함으로써 쾌감을 느끼고, 정부와 국가 등 권위들을 모두 조롱하며 재미를 느끼는 그들의 모습을 보면 확실히 그럴싸해 보이는 주장이다. 게다가 일베는 세상을 조롱할 뿐만 아니라 스스로를 비하하기까지 하니 정말 그 금기 깨기의 성역은 없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단지 금기 깨기가 일베가 찾는 재미일까? 그렇게 치면 금기 깨기를 유희 삼는 모든 사이트들과 별다른 차이가 없다. 금기 깨기는 수단일 뿐이고, 일베의 근본적인 유희는 다른 것 아닐까? 정치인이나 민주화 등을 욕하는 빈도보다 소수자에 대한 욕설 횟수가 2~3배가 더 많다는 점을 보면, 사실 그들이 느끼고 있는 쾌락은 금기를 깨면서 느끼는 쾌락이 아니라 약자에 대한 우월감을 느끼고 그들의 고통을 보며 유희를 찾는 ‘사디즘’에 가깝다. 단순한 금기 깨기라면 굳이 약자에게 폭력을 가할 필요가 없다. 오히려 이런 약자에 대한 폭력이 일베가 추구하는 재미의 본질적인 면이라고 생각하는 게 타당하다.


 일베는 기존의 가치체계를 뒤집고, 모든 도덕을 파괴한다. 이것은 소수자를 공격하기 위한 일종의 사전작업이다. 이 지점에서 일베를 단순한 또라이 정도로 치부하고 말면 쉽지만,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그 이면이다. 그들이 이렇게 하는, 할 수 있는 이유는 그들 바깥의 세상이 더 이상 느껴왔던 원한의 감정을 참지 않아도 되게 만들었거나 참을 수 없게 만들어서가 아닐까? 일베는 어떤 도덕성도 받아들이지 않고 오로지 약자에게 분풀이만 해댄다. 도덕성을 받아들일 수 없는 이유는 이미 그 도덕성이 자기모순을 드러내며 위선적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너희도 그렇게 하지 못하면서 왜 그런 도덕성을 외쳐? 거봐 어차피 안 돼.” 일베가 공공선과 공중도덕을 중요시했던 노무현 정권을 극도로 혐오하는 이유도 여기 있다. 일베의 상당수는 노무현 정권 때 청년기를 보냈거나, 노무현 정권의 지지자였다. 일베를 인터뷰를 보면, 진보 진영의 지지자였다가 회의를 느끼고 일베를 시작한 사람들이 꽤 많은 게 그 반증일 것이다. 노무현 정권은 신자유주의를 비판하는 맥락에서 보수당을 뚫고 권력을 잡았지만, 결국 신자유주의적인 정책을 반복하고 말았다. 바로 그런 실패, 그리고 모순에 좌절한 사람들이 모인 것이 일베인 것이다. 물론 노무현은 하나의 사례에 불과할 것이다. 일베 개개인의 사회적 좌절감을 느낀 계기적 사건이 존재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일베 안에서 사회적 실패의 대표로 조롱받고 있다는 인상은 지울 수가 없다. 그러므로 노무현 같은 사람들은 일베가 모두 배제하고 공격할 대상이 된다. 일베가 대안을 추구하고, 선한 변화를 모색하는 모든 세력에 대한 냉소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은 실패와 위선에 대한 좌절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래서 진보 진영에 대한 안티 정도로 끝날 뿐, 난 일베가 대안을 얘기하는 장면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사실 실패했다고 해서 모두가 좌절로 빠지는 것도 아니고 일베가 되는 것도 아니다. 일베의 핵심적인 차이점은 좌절감에 대한 대응으로 부조리한 현실을 본인과 동일시 선택한다는 것에 있다. 부조리는 변화의 대상이 아니라 어쩔 수 없는 유일한 사실(팩트, fact)이다. 유일한 사실이라는 것은 그 외의 세상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환상에 빠졌다는 얘기다. 마치 국정교과서만이 올바를 것이라는 대통령의 기대처럼 말이다. 절망적인 현상의 원인에 대해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사람들은 변화에 대한 긍정적인 마음보다는 두려움과 원한의 감정을 만들어내어 세상에 반응한다. 잘 모르기 때문에 본인이 믿는 것과 믿게 되고, 두려움과 원한의 감정은 본인보다 약한 사람들을 향해서 분노로 배설된다. 화가 나 어쩔 줄 몰라 난동 부리는 아이. 그런 아이들이 모여 서로 위로하며 거짓된 세계를 구축하는 모습. 그게 지금 일베의 모습이다.


담배 피는 고 노무현 대통령


2. 나치와 일베: 파시즘으로 무기력함을 극복하라


 나치와 일베는 매우 닮았다. 나치가 어떻게 수많은 대중을 이끌고 집권했는가 하면 꼭 나오는 분석이 바로 독일 당시 정권 바이마르 공화국의 경제 대응 실패다. 대공황을 겪고 있던 세계 경제에서 1차 세계 대전 패전 국가로 수많은 빚을 지게 된 독일은 엄청난 경제적 아픔을 겪고 있었다. 바이마르 공화국은 이런 현실에 대해 적절한 대응을 실패했다. 이 ‘실패’는 대중에게 좌절감을 선사하고, 이 좌절감은 파쇼적인 대중을 만들어냈다. 파시즘은 챕터 1에서도 말했지만 강렬하고 통합적인 힘에 대한 대중의 열망을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에 대중이 파쇼적이라는 것은 절망적인 현실을 구제할 아주 강력한 공동체적 힘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힘을 얻은 게 나치다.


 나치는 단 한 번도 절반 이상의 득표를 얻은 적이 없다. 처음에 히틀러와 나치는 주변부에 있는 소수당이었다. 그러나 파쇼적 대중에 힘입고, 많은 대중들이 정치에 무관심해진 틈을 타서 결국 집권당으로 성장한 것이다. 소수였던 처음의 나치는 지금의 일베와 굉장히 유사하다. 일베도 지금은 겉으로는 상식적인 사람들에 의해 주변화 되어 있지만, 세월호 사건으로 단식하던 농성장 주변에 나와 폭식 투쟁을 벌였던 사건을 생각해보면 이들이 거리로 현실로 나와 정치적인 힘을 발휘하는 건 시간문제다.


 혹시 그렇다면 일베에게도 경제적인 실패의 배경이 있을까? 디씨와 일베를 관통하는 단 하나의 용어가 있다면 그것은 ‘잉여’일 것이다. 지금 일상에서 할 일 없거나 시간이 붕 뜨는 걸 잉여 상태로 부르지만, 사회적으로 넓게 살펴보면 진짜 할 수 있는 ‘일’이 없어  배제당하는 잉여들이 존재한다. 임금노동으로부터 배제된 자들. 기술이 발달하면 굳이 인간이 노동하지 않아도 되는 분야들이 드러나게 마련이다. 그래서 노동자들이 임금노동의 가능성 자체로부터 소외되는 현상이 ‘잉여’ 현상의 전모일 것이다. 취업대란도 이런 관점에서 넓게 보지 않으면 사실 사회적 해결이 불가능하다. 일베가 잉여와 루저의 감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일베의 박정희와 산업화에 대한 무궁한 찬양은 이런 잉여를 생산하는 사회 구조에 대한 절망감을 바탕으로 한다고 볼 수 있다.


 게다가 마치 나치가 유태인을 공격하고 학살했듯, 일베는 끊임없이 소수자들을 찾아다니며 공격하고 괴롭힌다. 한 편으로는 중심화된 힘에 대한 찬양을 하며, 다른 편에서는 약한 이들을 배제하고 추방하는 것. 이 양태는 파시즘의 전형이다. “무기력함과 좌절감을 파시즘으로 극복하라!” 일베와 나치는 소외됐다는 허한 감성에 끊임없이 국가와 통합된 힘을 집어넣고 본인의 정체성을 형성해나간다. 그리고 결국 끊임없이 원한을 생산하는 악마로 스스로를 위치시키고 부조리한 세상을 몸소 재현한다. 


나치 정권의 국민들


3. 문제는 감성이야!


 일베의 경우를 쭉 살펴보면서 느꼈겠지만, 사실 우리가 어떤 정치성을 가지게 되는 것은 굉장히 감성적인 출발점을 둔다. 좌절했거나, 두렵거나, 분노하거나 등등. 고대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이라고 다를까? 그가 원하던 이데아 세계에 대한 동경은 인간의 또 다른 감성이 만들어낸 논리 체계는 아닐까? 일베와 나치처럼 원한의 정치를 생산하는 것뿐만 아니라, 유럽 중세시대처럼 종교의 정치를 만들거나, 조선시대처럼 완벽한 유학 질서로 중앙집권적 국가를 만들려고 했던 것이나 분명 어떤 감성적 출발을 전제하고 있을 것이다. “바보야, 문제는 경제야!”(빌 클린턴의 선거구호), “바보야, 문제는 정치경제학이야!”(슬라보예 지젝)보다 더 근본적으로 “바보야, 문제는 감성이야!”를 외쳐야 하는 시대가 오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좋은 정치를 하고 싶다면 우선 좋은 감성, 좋은 욕망을 갖게 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랬을 때 최소한 일베와 나치를 우리가 반복하지 않을 것 아니겠는가.


                                                                                                                             by 심기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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