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의 정치성: 좋은 감성이 만드는 좋은 정치 chapter. 3
‘사람은 자유를 지향한다.’ 그렇게들 쉽게 말하지만, 현실을 보면 딱히 그런 것 같지도 않다. 사람들은 본인을 종교적 교리에 스스로 포섭시키는가 하면(예수천국 불신지옥!), 가난한 사람들이 부유한 사람들을 위해 투표하는 기이한 현상들도 발생한다. 약한 사람들이 권력의 형태 스스로 복종하는 모습들은 어느 시대에서나, 어떤 장소에서나 발견된다. 이러고도 과연 인간이 자유를 지향한다고 말할 수 있는 걸까? 왜 사람은 예속을 욕망할까?
아니 그전에, 욕망은 어디서부터 발생하는 것일까? 성선설, 성악설 등 우리들의 수많은 욕망을 태어날 때부터의 본성으로 환원해서 설명하고자 했던 노력들을 참 많이 있었다. 욕망은 과연 그렇게 태어날 때부터 주어지는 것일까.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우리는 때로 선하며, 때로 악하다. 그렇게 보면 우리에게 선천적으로 주어진 것은 선과 악이 아니라 오로지 ‘욕망함’ 그 자체라고 생각하는 가장 합리적이다. 때때로 선하며 악하다는 것은 선악이 본성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단지 욕망의 흐름일 뿐이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욕망이 왜 그러한 욕망으로 발현되고 있냐는 것이다. 마치 원한의 감정을 생산하는 일베에게도 사회적(집합적) 맥락이 있듯이, 어떤 욕망과 감성이든 그 맥락이 있다. 우리가 좋은 삶 정치인이 되기 위한 가장 첫 번째 덕목은 바로 욕망의 맥락을 읽는 힘이다. 그리고 더 나은 욕망을 삶 곳곳에서 실현하는 것이 삶 정치의 핵심일 것이다.
현대 한국인들은 어떤 것에 예속돼있으며 어떤 것에 대한 예속을 지향하는가? 혹시 생각나는 게 있으면 지금 한 번 입으로 읊어보자. 종교, 설명이 필요 없는 여전히 유의미한 예속적 집단이다. 노인들로 구성된 극우 성향 시민단체들, 그들은 어떤 합리적인 대화도 원하지 않으면서도 보수 정권에 자발적으로 충성을 바친다. 일베, 원한의 감정에 예속되어 난동 부리는 악당들이다. 종교, 극우단체, 일베. 자, 이 정도면 충분할까? 사실 이렇게 극단적인 경우들만 예를 들어서 우리 자신은 예속인이 아니라고 안심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오히려 예속은 어디에나 있을 것이다. 우린 언제나 부조리한 상황에 묶여 있는 사람들이었고, 사회적 배치들을 고장 내거나 변화시켜 예속으로부터 해방되려고 하기보다는 가장 ‘평범’해지고 싶어 하는 우리가 아니었나. 평범하고 싶다는 말만큼이나 예속의 욕망을 잘 드러내는 말이 없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예속적 감성을 충만하게 가진 사람들이 아니었나 생각해보자. 많은 사람들이 예속을 원한다는 것은 부자유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받아들였다는 뜻이기도 하고, 우리의 관계망이 어딘가 아픈 상태 상태라는 증후이기도 하다. 우릴 아프게 하는 관계 배치는 변화시켜야만 한다.
그러나 더 이상 이런 변화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게 되었다. 예속도 선택할 수 없는 사회가 됐다. 잘 생각해보자. 헬조선을 외치는 사람들이 모두 사회주의자이거나, 구조 개혁론자인 것은 아니다. 그 점을 보면, 오히려 헬조선을 뼈저리게 느끼는 다수의 사람들은 ‘평범한 예속을 지향하는 사람들’이라고 봐야 타당하다. 그들은 그저 평범하게 결혼하고, 애 낳고, 행복하게 일하면서 생존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그 생존의 기반마저 흔들리는 사회이기 때문에 지옥 같다는 말이 나오는 것이다. 그 사람들의 예속을 향한 욕망은 둘째 치고, 심지어 예속되고 싶어도 할 수가 없는 이 비참한 현실이란 참 받아들이기 힘들다. 많은 사람들이 임금노동으로부터 소외되어 잉여가 되어가는 삶. ‘잉여’는 더 이상 농담으로서의 정체성이 아니라, 실질적인 위협이 되는 존재 기반을 나타내는 말이 되었다. 이제는 다른 삶의 방식을 발명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더 많은 일베가 탄생할 것이다. 이러다가 새로운 나치가 탄생하지 않을 거라는 보장을 누가 할 수 있나 싶다.
그래서 주장하는 것이다. 우리는 좋은 삶의 정치인이 되어야 한다고. 평범하게 기존의 악습과 부조리에 예속되는 삶이 아니라 배치를 조금씩 변화시켜 좋은 감성을 만들어내고, 그 감성이 계속 변화를 추구하게 만들어 구조 자체를 바꿔나가야 한다. 삶 정치를 위해 지나간 철학자들이 만들어놓았던 개념을 이용해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살펴보려고 한다. 스피노자, 들뢰즈, 가타리가 우리의 친구가 되기 위하여 기다리고 있다.
삶 정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파시즘, 또는 빠른 속도에만 빠지지 않는 것이다. 다양한 순간 발생하는 정치의 장을 인식하고, 그 장에서 우리가 신중하게 선택해야 함을 자각하는 일이다. 가령 이런 순간을 생각해보자. 명절에 큰집으로 내려가면 언제나 부엌에서 일하는 것은 여성이다. 그런 광경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여성들이 명절에 죽어라 일하는 것은 굉장히 당연하다. 그러나 우리가 삶 정치를 지향하는 사람들이라면 이 순간 발생하는 정치의 장을 인식할 수 있어야 한다. 여성의 가사노동은 당연한 것인가? 그렇지 않다면 우린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정치의 장을 인식한다면 우린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된다.
질 들뢰즈는 세상을 영원히 변할 수 없이 고정된 구조로 보는 것이 아니라 흐름으로 인식할 것을 주장한다. 우리가 같은 것을 같지 않다고 재인식에 실패할 때, 비로소 새로운 인식이 성공할 수 있다. 그(와 펠릭스 가타리)의 개념을 차용하자면, 우리의 인식이 탈코드화되어야만 재코드화할 수 있고, 더 근본적으로는 탈영토화한 것만이 재영토화할 수 있다. 갑자기 낯선 말들을 써서 당황스럽겠지만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니다. 공장 노동자 두용이는 기계적인 노동을 반복하는 공장에 가면 그저 익숙한 자기의 일터로 인식하겠지만, 자유롭게 살던 사람 기용이는 그 공장을 가면 답답하고 비인간적인 감옥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이때 두용이는 그저 영토에서 습관화된 삶을 사는 것이겠지만, 기용이는 공장에 대해 기존의 인식을 재인식하는 것에 실패하고 새로운 인식을 얻은 것이다. 어떤 것이 더 좋은가 하는 가치판단은 쉽사리 내리기 어렵겠지만, 기용이는 기존에 없었던 새로운 시각으로 삶을 사유하여 행동할 수 있는 가능성을 얻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그 새로움에서 변화는 시작한다.
삶 속의 정치를 발견하고 미시적인 변화를 이끌어내려면 들뢰즈가 제시하는 대로, ‘습관’이 되지 말고 ‘사유’로 세상을 대해야 하는 것 아닐까. 문화든 사람이든 단지 소비하거나 스쳐 지나가거나 하지 않고 사유한다면 우리 삶을 더 깊게 이해하며 변화를 시작해나갈 수 있을 것이다.
욕망은 세속의 이해와는 다르게 개인적인 삶으로부터만 발생하는 무언가가 아니다. 사실 욕망이라는 것은 공동체를 통해서 발생한다. 여기서 공동체라는 것은 단지 윤리적인 의미를 뛰어넘어, 여러 개체들의 묶음, 즉 집합을 의미한다. 집합을 통해서 욕망이 만들어진다고? 가령 이런 것이다. 본인이 재미없다고 느끼는 모임에 내가 사랑하는 남성이 온다고 생각해보자. 남성이 온 뒤의 나의 마음 상태와 그 전은 매우 다를 것이다. 단지 특이점이 하나 늘어났을 뿐인데 내가 하고 싶은 일, 말하고 싶은 것이 모두 뒤틀어져 변화하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욕망이 변화한 것이다.
원피스의 주인공 루피와 그 친구들이 모이는 과정을 잘 살펴보면 단지 수적인 획일적인 강력함이 아니라 이들은 모두 특이한 성격을 발휘하며 개성 있는 힘을 발휘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들의 자율적인 공동체를 슬프게 만드는 자신의 단점을 줄이고, 공동체에 기여할 수 있는 힘을 더욱 강력하게 만드는 그들의 모습은 특이함을 환대하는 집합이 얼마나 큰 힘을 가지게 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예시다. 우리가 어떤 집합을 갖는가가, 나아가 내가 사랑받고 사랑할 수 있는 집합을 가질 수 있는가가 내게 긍정적인 욕망들을 끌어낼 수 있는 아주 중요한 요인이 된다.
‘특이화 과정을 거치는 집합들의 욕망(주체성) 생산’이라는 개념은 펠릭스 가타리의 개념이다. 그는 좋은 집합을 갖는 일을 굉장히 중요시했다. 재판도 공동체적인 성찰이 이뤄지지 않는다면 파시즘과 다를 바 없다며 강하게 비판하기도 했던 가타리는 표면적인 관계들의 변화도 중요하지만, 그 변화를 이끌어 내는 주체성과 욕망이 어떻게 생산될 수 있는가를 고민하다가 그러한 개념을 창안해낼 수 있었다. 그의 개념에 따르면, 좋은 집합을 갖는 것, 좋은 환경(배치)을 갖는 것이 좋은 정치의 기반이 된다.
3. 스피노자: 삶을 기쁨으로 이끌어라
사유를 통해서 상황을 새롭게 인식하며(들뢰즈), 집합을 통해서 욕망을 생산한다(가타리). 우리가 헬조선을 탈출하기 위한 새로운 삶 정치를 기획하기 위해 새겨야 할 중요한 이야기들이다. 그리고 여기에 마지막으로, 그 모든 변화가 기쁨을 향하는 과정이어야 한다는 스피노자의 이야기를 덧붙이고 싶다.
스피노자에 의하면 생명체에게는 코나투스라는 본성이 존재한다. 코나투스는 자기 보존의 욕구를 의미한다. 쉽게 얘기하면, 큰 위협 없이 계속 살아가고 싶은 욕구가 코나투스다. 삶의 에너지라고 부를 수도 있겠다. 인간의 이 에너지는 기쁨과 슬픔이라는 두 가지 방향으로 움직인다. 기쁨은 이 코나투스가 활발하고 긍정적으로 작동할 때의 모습이며, 슬픔은 코나투스가 죽어가는 상태다. 당연히 생명체의 목표는 기쁨을 추구하는 것이다.
사회든 개인이든 변화하는 과정은 아플 수 있다. 그러나 그 과정에 우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쁨의 에너지를 만들어야 하며, 그 기쁨의 에너지로 막힌 벽들을 뚫어내야 한다. 그리고, 스피노자가 알려주는 기쁨을 얻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사랑이다.
4. 좋은 문화를 갖자, 좋은 정치를 시작하자
아파서 청춘인 게 아니라, 정치를 몰라서 아픈 것이다. 헬조선을 다루는 어른들은 그저 청년들에게 미안하다고 하고, 기성세대가 잘못했지만 청춘이니 견뎌보자는 위로를 건넨다. 그러나 헬조선의 현실은 당연히 어른들에게 마찬가지로 놓여 있다. 청년들에게 좋지 못한 사회 현실이, 어른들에게는 특별히 좋을 것이 없다. 서른 살에 명예퇴직을 하며, 심지어는 스물네 살에도 명예퇴직을 한다는 기사를 보자. 더 이상 어른들도 임금노동의 불확실성에서 자유롭지 않다.
일베는 온몸으로 좌절감과 원한을 내뿜고 다니는 망나니가 되었으며, 극우 성향의 노인단체들은 거리로 나와 소수자를 공격하고 변화를 추구하는 사람들을 자랑스럽게 탄압하는 시국이다. 많은 사람들이 임금노동으로부터 소외되어 자기 가치 실현의 기반을 잃고 있는 절망적인 현실. 이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다시 정치일 수밖에 없다. 다시 그들을 사랑과 환대의 공동체로 복귀시키고, 기쁨의 집합을 생성하여 변화를 논의하는 것. 그런 삶 정치란 우리가 해야 할, 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 그러나 정치는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제도 정치만이 정치가 아니다. 정치는 곳곳에서 발생하며 우리는 언제나 선택의 기로에 놓여 있다. 좋은 집합을 갖는 것, 그것만큼 우리에게 절실한 과제가 있을까. 그러므로 헬조선을 탈출하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이것밖에는 없다. “좋은 문화를 갖자, 좋은 정치를 시작하자.”
by 심기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