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에서 보낸 어느 날의 상념 3
일상적으로 시간의 특성은 새로운 것이 나타날 때 이전 것은 사라진다는 것이다. 시간은 흘러가고 사건들은 나타나자마자 지나가버린다. 그거나 그것은 외양일 뿐이다. 돌과 흙과 바람, 우주의 먼지들, 그리고 꿈틀거리는 신체들. 이것들은 외부만이 아니라 각각의 내부를 가지고 있다. 거기서는 아무것도 사라지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우리 기억 속에서 시간은 소멸하지 않은 채로 남아있다.
지난여름, 뜨거운 햇살을 받으며 유럽에서 여행을 했다. 이번이 두 번째 유럽여행인지라 처음과 같은 설렘이 없으면 어쩌지 하던 걱정은 어디로 가고, 43일의 짧지 않은 여정 동안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첫 도착지인 스톡홀름에서부터 수하물이 연착되고, 영국 브라이튼의 이름 모를 언덕에서 길을 잃고, 독일의 작은 마을에서 비를 맞으며 워크캠프를 하고, 체코 프라하에서 외로움에 엉엉 울던 사건들이 있었다. 그렇지만 이렇다 할 큰 문제적 사건은 또 아니었다.
나는 별 탈 없이 한국으로 돌아왔고, 개강을 하고 평소와 같이 수업을 듣고 친구들과 둘러앉아 치막피나 시켜먹으며 일상으로 돌아왔다. 무더운 여름에 떠난 여행이었는데 시간은 빠르게 흘러 벌써 첫 눈도 내렸고 종강이 다가온다. 벌써 6개월쯤 지났으니 잊기에 충분한 시간이다.
그러나 여전히 나에게 여행의 시간이 남아있다.
여행의 기억은 과거를 보존하여 현재로 연장하면서 예측 불가능한 미래를 개방하는 지속 그 자체이다. 이러한 여행의 기억의 지속은 과거에 그대로 멈춰있는 것이 아니라 연속적이고 계속적으로 질적 변화를 한다. 과거에 했던 행동을 그대로 하더라도 어떻게 과거와 같을 수 있을 까. 지속된 여행의 기억이 현재를 새롭게 하며 새로운 변화로 나아가게 한다. 여행이 끝나고 나면 여행 이전의 나 자신을 반복하면서도 그때의 나 자신과 달라지는 신비한 경험을 하게 된다.
지난해의 유럽 여행과 다르게 이번 해엔 워크캠프를 하면서 다양한 국가의 친구들과 시간을 보냈다. 2주의 시간을 함께 보내면서 캠프 멤버들과 웃고 울었고, 나는 온통 미성년자인 캠프 친구들 중에 헤어질 때 가장 먼저 우는 ‘베이비’가 되었다. 그대로 남아 여전히 내 삶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
짬이 날 때마다 책을 읽던 동생들로부터 영향을 받아 책을 읽고 인상 깊은 구절들을 받아 적기 시작했고, 자기 전에 시집을 읽게 되었다. 좀 더 많은 이야기를 진솔하고 자연스럽게 하고 싶어져 영어도 더 열심히 공부하게 되고, 영어로 영화도 보고 음악도 들으며 나의 문화 자본의 영역도 넓혔다. 이번엔 특히 독일에서 시간을 많이 보낸 터라 독일어도 새롭게 배워보고 싶은 욕심도 생겼다. 언어를 게임처럼 쉽게 배우는 어플리케이션을 하면서 습관처럼 기억을 되짚어보곤 한다.
이러한 변화들이 사실 엄청 새로운 것은 아니다. 독일어를 공부하기 시작한 것은 확실히 새로운 이벤트이긴 하지만, 그 외의 활동들은 글쎄, 고개를 갸웃거리게 된다. 여행 이전에도 책을 ( 많진 않지만 ) 읽긴 읽었고, 영어 공부도 다양한 방식으로 하곤 했다. 원래 영화도 좋아해 신작이 나오면 꼭 영화관에 가고, 좋아하는 노래를 반복해서 듣는 ‘덕후’였기도 하다.
그럼에도 여행 후에 스스로 많이 변화하고 성장했다 여기는 이유는 이번 여행이 이러한 행동에 연료가 되었기 때문이다. 과거의 여행을 되새김질하는 행위만으로도 현재와 일상에 새로운 자극이 되기 때문이다. 더 이상 예전의 활동들은 그때의 의미만을 가지진 않는다. 새롭게 추가된 여행의 경험이 일상을 두텁게 한다. 그리고 나를 중독된 사람처럼 또 다른 여행을 꿈꾸게 하고, 새로운 여행 계획을 세우게 한다.
기억의 지속의 정도 차이는 보존된 과거를 얼마나 현재로 연장하느냐, 즉이전 것과 이후 것을 얼마나 상호 침투시키고 수축하느냐는 기억의 강도에 따라 결정된다.
물질과 기억에는 3가지 종류의 기억이 등장한다. 신체적 기억, 심리적 기억, 존재론적 기억이 그것이다. 존재론적 기억은 잠재적으로 존속하는 과거 전체로서의 순수 기억이고, 이 기억이 심리적 표상의 수준으로 회상되는 것이 심리적 기억, 신체적 운동의 수준으로 회상되는 것이 신체적 기억이다.
우리는 흔히 암기를 기억의 전부라고 생각하는데 베르그송은 이것을 기억이라기보다는 습관이라고 본다. 예컨대 단어나 노래 가사를 암기하는 것은 자전거 타기를 배우거나 힙합 춤을 습득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동일한 노력의 반복을 통해서 신체에 습관을 형성하는 것이다. 이 신체적 기억을 ‘습관-기억’이라 부르는데, 이것은 반복할수록 점점 더 분명하게 새겨지는 주름처럼 과거의 경험을 신체 안에 자동화된 행위 도식으로 축적한다. 신체적 기억으로 형성된 기억은 다시 떠올릴 때도 의식적인 상기의 노력 없이 자동적인 행동으로 재생할 수 있다.
반면 베르그송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기억이라고 보는 것은, 일상적인 삶의 자연적인 흐름에 따라 겪게 되는 세세한 모든 경험들을 각각의 고유한 장소와 날짜를 간직한 채로 굳이 외우고자 하는 아무런 노력 없이 저절로 보존되었다가 현재 상황의 자극이나 요청에 따라 즉각적인 행동이 아닌 이미지의 형태로 자유롭게 떠올릴 수 있는 기억이다. 이를 ‘이미지-기억’이라고 하는데, 이 기억이야 말로 현재와 과거 사이를 왕복 운동하면서 현재 상황의 요구에 맞게 유용한 과거의 기억들을 수축하는 현실적 의식의 작동방식을 잘 보여준다. 말하자면 이미지-기억은 순수 기억과 기억 이미지의 양극단을 왕복 운동하는 심리적 기억이다.
나는 새로운 여행을 떠날 때 꼭 향수를 산다. 여행을 떠나기 전에 꼭 치르는 나만의 의식이라고 볼 수 있다. 새로 사는 향수의 기준은 여행지와 어울릴 것, 계절에 알맞게 진할 것. 이 기준에 적합한 향수를 찾아 그루누이마냥여러 향수를 떠돌며 시향 한다. 이 여정은 꼭 알맞은 향수를 찾을 때까지 계속된다.
이번 여행도 예외는 아니었다. 햇살이 뜨거운 유럽이니까 덥거나 텁텁하지 않을 것, 6월의 마지막부터 8월의 처음을 함께 하니까 상큼하고 가벼운 것으로 하자. 그래서 Clean Air가 최종적으로 선택되었다. 처음 써보는 브랜드에 설레는 가슴을 안고 출발 편 비행기를 탔다.
그리고 마지막 기준이 있다. 나는 변덕이 심하고 실증이 잘 나는 편이라 평소엔 향수는 가장 작은 30ml나 50ml를 구매한다. 심지어 그 작은 병을 다 쓰기도 전에 질려버려 방향제로 전락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여행지로 떠나면서 향수를 살 때는 다르다. 가장 용량이 큰 제품을 사야 한다. 이건 참 탁월한 선택이었다. 언제든 향수를 뿌리면 그때의 기억으로 돌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번 여행 내내 새로운 향수를 뿌리며 그 장소와 시간에 대한 기억을 남겼다. 여행을 하면서 뿌린 향수는 적당히 상큼하고 과일내가 나서 항상 달콤한 여행인 것 같은 마취제 역할을 했고, 싱그러운 풀 냄새와 물기 어린 향이라 외롭거나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향수 냄새를 맡으면 마음이 편안해졌다.
특히 기억에 생생한 것은 베를린의 일요일이었다. 파비엔의 집 근처에서 열리는 마켓이 있어 가벼운 차림으로 산책을 갔다 수박과 파인애플을 투박하게 썰어 컵에 담아서 팔았고, 과일을 보면 못 지나치는 나는 당연히 사 먹었다. 유난히 좋은 햇볕에 사람들이 잔디밭에 자유롭게 앉아서 시간을 보냈다. 피크닉 도시락을 싸온 무리도 있었고, 사이다나 와인을 따서 마시는 무리도 있었다. 아티스트가 반인 베를린 답게 약간의 공간만 있어도 버스킹을 하는 사람들이 들어섰다. 나는 이러한 사람들 사이에 자연스럽게 섞여 플리마켓을 구경하고 노래에 맞춰 흥얼거리며 잉여로운 주말을 보냈다.
지난 여행이 그리울 때마다 새로 산 향수를 뿌렸다. 영상을 돌려 보듯 눈 앞에 베를린이 보인다.
이 향수의 향기가 나의 여름이었고, 나의 여행이었다.
고전 철학서인 <물질과 기억>의 내용을 나의 경험에 적용하고, 살아있는 현재로 이해하기 위해 애썼다. 어렵고 복잡한 철학서를 사랑하는 여행과 연결 지어 보니 지루함을 사라지고 호기심이 남았다.
고전 철학서와 여행의 시간과 기억이 교훈을 주었다. 현재를 고립시키지 않기, 현재를 과거와 더불어 직조하기, 다가올 미래를 낯설어하지 않기. 결국 시간의 연속성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야 말로 <물질과 기억>이 전해주는 미덕을 내면화하는 것이다. 나의 여행은 계속되고 있고, 끝나지 않는다.
*참고문헌
<물질과 기억, 반복과 차이의 운동>, 김재희 베르그송,
<물질과 기억, 시간의 지층을 탐험하는 이미지와 기억의 미학>, 황수영, 2006.
by 혜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