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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만식 Apr 25. 2023

죽음을 향해 가는 존재

홍상수 감독_[강변호텔, 2018]

죽음을 향해 가는 존재     

                                                                          

   죽음이란 무엇인지를 생각한다. 죽음이란 무엇인가? 죽음을 피할 수 있는가? 죽음에서 자유로운 존재란 없다. 인간 역시 예외일 수 없다. 죽음은 우리 주변에 널려 있다. 아니 가까이 있다. 죽음을 피할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다. 죽음을 피하려는 것 자체가 헛것이다. 세상을 태어난 이상 죽는 것은 정해진 이치다. 누구든 죽음을 피할 순 없다. 누가 죽음에서 벗어날 수 있겠는가! '생의철학'을 말한 독일의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는 인간을 가리켜, “죽음을 향해 가는 존재”라고 말했다. 죽음을 맞이하는 방향으로 가는 존재가 우리 인간이라는 것이다. 그에게 죽음은 두려운 대상이 아니었다. 그저 과정이자 기회로 주어지는 것이었다. 그저 내던져진 세상에서 세상의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존재로 살아가는 것이 인간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과연 죽음을 그렇게 순순히 받아들이며 살아갈 수 있을까? 인간은 죽음을 피하고 싶어 한다. 자신의 생명뿐 아니라 가까이에 있는 가족들, 이웃들, 친구들의 죽음조차도 피하고 싶어 한다. 하이데거의 말처럼, “죽음을 향해 가는 존재”라 할지라도 기쁘게 두려워하는 마음 하나 없이 죽음을 향해 내달리며 갈 수 있는 이들이 어디 있겠는가?     

 

  홍상수 감독의 [강변 호텔, 2018]에서 주인공 영환을 본다. 그는 시인이었다. 초췌한 노인의 모습, 눈 쌓인 강변 호텔에 머물며 지내고 있는 그의 행색에서 쓸쓸함이 느껴진다. 어딘지 모를 몸의 불편함, 그 불편함이 표정에 가득하다. 양말을 신는 그의 무거운 모습에서 죽음이 느껴졌다. 자신의 두 아들(경수, 병수)과의 만남이 있음을 알리고 만나기 위해 움직이지만 서로의 만남이 시작부터 엇갈려 버린다. 그런 그들의 모습에서 답답함이 느껴졌다. 아마도 오랜 세월 그들의 만남이 이런 엇갈린 세월이었음을 보여주는 듯했다. 만남이 이어졌지만 어딘지 모를 불편함이 그들 사이에서도 느껴졌다. 알고 보니 아버지 영환이 젊은 날 아내와 어린 두 아들을 버리고 집을 나가 버렸던 것. 무슨 염치로 미안함도 없이 이제 와 두 아들을 호텔로 부른 것인지, 영화는 중간의 모든 이야기를 제공하지 않는다. 그저 지금의 상황에 집중한다. 어색한 대화는 이어지고, 그사이 같은 호텔에 투숙하는 두 여인(상희, 연주)의 이야기를 영화는 풀어간다. 공교롭게도 식사를 위해 두 여인이 찾아간 식당에 두 아들과 아버지 영환이 있는 것을 보게 되고 그들도 그곳에서 밥을 먹게 된다. 그리고 그곳에서 시인 영환의 마지막 자작시를 그녀들은 듣게 된다. 그리고는 그 날밤, 영환은 죽음을 맞게 된다.    

  

   영화의 주인공인 영환은, 자기의 죽음을 알고 있었던 것일까? 영화는 그러한 죽음을 주인공 영환이 알고 있는 것과 같은 암시를 계속해서 보여준다. “흑백의 배경”, “몸의 불편함”, “강”, “말라가는 식물”, “용서를 구하는 듯한 표현”, “두 아들과 만남” 그리고 “대화”, “두 여인에게 고마움을 표현하는 행동들”, “집으로 돌아가는 불길한 암시” 등등. 이윽고 그러한 암시들은 결국 피할 수 없는 죽음으로 영환에게 찾아왔음을 영화는 이야기한다. 조금도 후회함 없는 삶을 살았노라는 영환의 말들, 미안한 마음도 있지만 어쩔 수 없었다는 자기변명과도 같은 말들이 이해되거나 받아들여지지 않고 그저 변명처럼 느껴졌다. 무책임한 남편, 무책임한 아버지 그 자체라는 생각, 이런 생각이 나만의 생각일까? 하이데거의 말처럼, 인간이 “죽음을 향해 가는 존재”라면, 한번 사는 삶에 대한 의미 자체를 무겁게 두며 살아가지 않았을까? 그저 나의 이익과 욕망에만 사로잡혀 모든 소중한 것을 해체하고 살아가는 행동은 하지 않았을 것이란 생각이다. 오히려 그 반대로 책임을 다하는 삶, 책임을 지는 삶을 살기 위해 몸부림을 치며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다.     


  그런 차원에서 ‘빛의 화가’라 불리는 렘브란트의 인생은 그 자체로 훌륭했다. 그의 삶에는 언제나 죽음의 그림자로 가득했다. 1634년 아내와 결혼식을 올리고 행복한 삶을 살았지만, 그의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다. 아내가 낳은 아이 셋이 얼마 살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그리고 아내 역시 세상을 떠나고 만다. 자신 곁에 유일하게 남아 있던 넷째 아들 역시 자신보다 먼저 보내고 그 뒤를 따라 렘브란트 역시 죽음을 맞이한다. 그가 남긴 작품인 자화상[제욱시스로 분장한 자화상, 1668년]에는 웃고 있는 그의 모습이 남아 있다. 이마에 굵은 주름을 만들고서 볼품없는 모습을 한껏 드러내고는 히죽대는 그림이다. 이 작품에서 자신을 화가 제욱시스로 표현한다. 히죽대며 웃고 있는 렘브란트 앞에는 이미 죽음의 사자가 찾아온 상태임을 그림에서 암시한다. 렘브란트는 죽음의 사자가 곁에 와 있음에도 두려워하는 기색 없이 죽음을 기쁘게 맞이하며 그림 속에 자신을 담은 것이다. “죽음을 기억하라(Memento Mori)”는 전도서의 말씀을 생각한다. 우리의 육체는 힘을 잃고 마침내 죽음에 이르게 된다는 사실을, 유한한 우리의 삶, 그 삶은 반드시 마침표가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 사실을 기억하는 삶은 그러기에 되는대로 살아가는 삶과는 달리 하나님의 섭리와 주권을 인정하며 매일의 삶 속에서, 자리에서 성실과 진리와 사랑으로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삶인 것을 기억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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