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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만식 Apr 25. 2023

아픈 이들, 아픈 세상 끌어안기

데일러 쉐리던 감독_ [윈드 리버]

아픈 이들아픈 세상 끌어안기     

            

                                                           

  최근에 서경대 심리상담학과 김태경 교수의 책, [용서하지 않을 권리]를 읽었다. 우리 사회에서 일어난 강력 범죄에 관한 책이다. 우리는 인생에서 뜻하지 않은 일을 경험한다. 그것이 자연재해인 경우도 있고 질병인 경우도 있다. 그런 경우 우리는 어떻게 위로해 줄 수 있을까? 재난과 질병이 남겨준 후유증은 심각하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심각한 후유증을 남기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인간에 의해 자행된 강력 범죄라는 것, 그 범죄의 수위가 끔찍할수록 피해자 또는 그 가족이 겪는 고통은 몇 달, 몇 년이 아닌 평생을 간다고 한다. 강력 범죄 특히 살인은 적게는 1명에서 많게는 6~7명가량의 생존자를 남긴다고 하니, 그런 경우 우리는 그들을 어떻게 위로해 줄 수 있을까? 가족들의 심리적 안녕을 심각하게 위협한 사건이다 보니 남은 가족들을 가리켜 유족이 아닌 “살인사건 생존자”라 한다.     

 

  데일러 쉐리던 감독의 작품, [윈드 리버(Wind River)]에서도 이런 부분이 유독 눈에 들어온다. 미 서부 와이오밍주 인디언 보호구역인 윈드 리버에서 죽은 한 소녀의 시신을 발견한 사건으로부터 영화의 이야기는 시작한다. 주검으로 발견된 소녀는 왜 눈 위에서 얼어 죽은 것일까? 그것도 피를 흘린 채 말이다. 부검 결과, “눈썹 밑에 깊은 열상이 있고 갈비뼈 두 대 손상, 복사뼈 위까지 동상, 살인으로 기소해도 충분하다”는 검사관의 사인 결과가 나왔다. 더 나아가서는 “폐결핵”, 죽은 소녀의 최종 사인 결과였다. 그녀의 이름은 나탈리 핸슨, 사건을 풀어가는 야생동물 사냥꾼 코리의 죽은 딸, 에밀리의 절친한 친구였다. 안타까운 것은 사냥꾼 코리의 딸 역시 3년 전, 같은 모습으로 죽었다는 사실, 이런 일이 빈번히 윈드 리버, 이곳에서 계속해 일어나고 있었음을 이 영화는 고발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슬픔을 감히 이해할 수 있을까? 그 고통을 짐작이나 할 수 있을까? 그 고통을 알 수 없다. 아니 그 무엇으로도 표현할 수 없다. 특히 타살에 의한 경우엔 남은 가족들이 겪을 트라우마, 즉 강력한 분노, 복수심, 신념과 가치체계의 붕괴, 사회적 철수와 고립, 비난, 과도한 죄의식, 공포와 자살 관념 등등, 그것을 누가 알겠는가? 그런 경우 우리 사회는 어떻게 도울 수 있을까? 영화에서도 이런 고통은 남겨진 가족들에게 그대로 나타난다. 죽은 딸로 인한 부모들의 고통 말이다. 사냥꾼 코리의 전처인 아내의 모습에서(이미 죽은 지 3년이 되었는데도 여전히 고통 속에 있는) 또 눈 위에서 피 흘린 채 죽은 소녀(나탈리 핸슨) 엄마의 극단적인 자해 행위에서 남겨진 이들의 고통을 본다. “피의 복수”가 일어나는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을까? 창세기 34장의 세겜 성 추장에게 강간을 당한 디나를 위해 시므온과 레위가 벌인 피의 복수가 그 가족이 겪었을 고통을 보여주는 듯하다.     


  소녀를 죽인 범인을 찾기 위해 나선 사냥꾼 코디와 신입 FBI 요원 제인 그리고 그곳의 경찰서장인 벤이 돋보인다. 결국 사건의 진범과 공범이 있는 굴착 공사장 인부들의 숙소를 찾은 주인공들과 광산 직원들 사이의 총격전이 벌어지고 희생자들이 발생한다. 경찰서장 벤과 그의 동료들은 그 자리에서 총에 맞아 숨지고 FBI 요원 제인 역시 가슴에 총격을 입지만 다행히 살아난다. 총격을 가했던 광산 직원들은 이 사건의 공범들인데 이들은 사냥꾼 코리가 쏜 총에 맞아 결국 죽는다. 그러나 소녀를 강간하고 그녀의 남자 친구까지 죽인 진범인 피터는 술에 취한 채 가까스로 그 자리를 피해 도망치지만, 사냥꾼 코리에게 끝내 붙잡혀 그가 죽인 소녀처럼 똑같은 방법으로 죽음을 맞는다.     

 

  “인과응보”, “권선징악”이 떠올랐다. 세상사에서 언제나 악이 지고 선이 이겼으면 좋겠는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나의 기대와는 달리 세상의 일이 그러하지 않으니....., 불의한 일로 인해 지금도 눈물 흘리며 가슴 아파하는 이들이 우리 곁에 있다. “받은 만큼 돌려주면 된다”지만 그 말 역시 뜻대로 되지 않는 세상이 아니던가! 물론 “돌려주면 된다”해서 돌려준 들, 돌아오는 것이 있을까도 의문이다. 법의 공정한 시행이 꼭 필요한 이유라 하겠다. 물론 그 이전에 이러한 일들이 발생하지 않아야겠지만 말이다. “강자만이 살아남을 수 있다”라는 사냥꾼 코리의 마지막 멘트가 마음을 무겁게 한다. FBI 요원 제인에게 “당신은 강자여서 살아남은 것”이라는 코리의 말이 약육강식 같은 인디언 보호구역, 그리고 그녀가 겪었던 죽음의 상황에 극한 해 표현한 말 같지 않아서다. 그와 같은 세상, 그런 세상을 사는 오늘 우리에게도 던지는 말, 그리고 질문 같아서다.  

    

  영화 안의 작은 세상 인디언 보호구역인 “윈드 리버”, 그와 닮은 이 세상, 그러기에 영화의 이야기는 단순히 영화에만 멈추지 않는다, 미국의 오랜 역사 속에서 죽은 제3, 제4, 제5.6.7.8......... 의 에밀리, 나탈리 핸슨은 지금도 모든 땅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피의 복수가 답일까? 피의 복수만이 진정한 해답이 될 수 있을까? 어디까지 이해하고 수용하고 받아들일 수 있을까? 헤밍웨이의 장편소설 제목으로 더 잘 알려진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는 존 던의 시 제목이다. 존 던이 살던 시대에 전염병이 심해 참 많은 사람이 죽었다. 그때마다 교회 종이 울렸다. 교회의 종소리가 들릴 때마다 존 던은 누가 죽었는지를 궁금해하곤 했는데 어느 날. 존 던 자신이 그 전염병에 걸려 병석에 눕게 된다. 그제야 그는 누군가의 죽음을 알리는 종소리가 사실은 우리 모두를 위한 애도의 종소리임을 깨닫고 이 시를 지었다고 한다.     


  우리의 삶은 어떤 식으로든 서로 연결되어 있다. 서로 연결된 운명 공동체가 “인류”다. 단순히 영화의 이야기만이 아니라 오늘 나의 이야기, 우리의 이야기라는 것, [윈드 리버]를 보고 든 답 없는 생각이다. 그저 아픈 이웃, 아픈 세상을 끌어안아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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