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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만식 May 03. 2023

깨어진 세상에서 우리는

노아 바움백_ [오징어와 고래}, 영화에세이


깨어진 세상에서 우리는     

                                                                        

  신앙을 떠나 던지는 질문이 있다. 인생에 관한 질문이다. 삶이란 무엇이고 살아간다는 건 무엇인지? 성경은 세상이 인간의 죄로 인해 깨어졌다고 말한다. 깨어진 세상, 파편화된 세상, 그런 세상에서 우리는 살아간다. 모든 것이 깨어진 상태다 보니 완전한 것은 없고 조각난 형태로 존재한다는 것, 아니 그런 조각들이 우리 주위에 흩뿌려져 있다는 것, 사랑이라는 조각부터 시작해 기쁨, 아름다움, 즐거움, 감사, 설렘, 감탄, 치유, 회복, 아픔, 오해, 슬픔, 상실, 외로움, 두려움 등등의 조각들까지 말이다.      


  아름다운 모습을 잃어버린 세상, 산산이 조각난 세상, 그 조각난 파편으로 우리는 세상을 바라본다. 그런 이유로 우리의 삶은 언제나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는 것, 그런 불안은 현실 속에서 다양한 형태의 모습으로 크고 작은 부작용으로 악순환되어 나타난다는 것, 그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모습이고 그런 세상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이야기라는 것에 안타까운 마음이다. 그래서일까? 인생을 물을 때면 조각 하나로 인생을 정의할 수 없는 문제를 낳는다.     


  노아 바움백 감독의 작품 [오징어와 고래]는 17년간 살던 부부가 이혼하고 그로 인해 혼란을 겪는 사이에서 방황하는 두 아들의 삶을 보여 준다. 아빠 ‘버나드’, 엄마 ‘조안’, 그리고 형 ‘월트’와 동생 ‘프랭크’가 그들이다. 영화는 두 아들 ‘월트’와 ‘프랭크’의 시선으로 전개된다. 단란한 듯 보이지만 불안으로 가득 찬 모습, 삐걱거리는 관계, 상처, 헤어짐 그리고 이어지는 이혼, 나눠진 두 집을 오가며 힘겹게 살게 되는 두 아들의 삶, 그 와중에 우왕좌왕 성장하는 아이들, 그리고 방황, 그 속에서 여전히 서로에게 상처 주며 외도하기 바쁜 엄마와 아빠.      


  한때 유명한 작가였던 아빠 ‘버나드’, 하지만 그 이력은 오래되고 이젠 학생들을 가르치며 삶을 이어가는 신세. 그에 비해 아내 ‘조안’은 인기 있는 작가, 그런 그들 사이에 이미 오랜 세월 깊은 골이 있었음을 영화는 보여 준다. 또 그 책임이 어느 한쪽에게만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큰아들 ’ 월터‘는 엄마의 외도 사실을 알고는 엄마와 거리를 둔다. 막내 프랭크는 자신에게 관심 없는 아빠에게 거리를 둔다. 이혼 후에 별거가 시작되고 양쪽 집을 오가며 생활하는 두 아이의 혼란한 삶에 영화는 집중한다. 공동 육아를 말했지만 삶은 원활하지 않다.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엄마, 아빠는 엄마 아빠대로 살아간다. 평생 부모만 바라오며 살아온 아이들의 삶 그들이 겪는 고통과 아픔과 상실감과 충격에는 그 어떤 관심조차 기울이지 않는다. 


  엄마의 외도, 자신을 따른 학생과의 부적절한 관계를 시도하는 아빠, 그 속에서 두 아들의 삶은 고통의 연속이다. 그 속에서 두 아들은 쉼 없이 성장한다. 성에 관해 눈을 뜬 월터는 여자친구를 사귀고 잠자리에서 실패한다. 막내 프랭크는 자위를 반복하고 맥주, 양주를 마시며 어른 흉내도 낸다. 고통스러워한다. 이들의 모습이 일탈적인 행동이라기보다는 부모 때문이라는 생각에 마음이 무거웠다. 괴로웠다. 무책임한 부모에게 울분이 일어났다. 월터는 자신이 지은 곡이 아닌 곡을 자작곡이라며 거짓말을 하고 공연장에 선다. 막내 프랭크는 술만 아니라 자신의 정액을 도서관과 학교 사물함에 묻히는 일탈을 저지른다. 두 아이의 이런 모습은 과연 누구의 책임일까? 아이들인가? 부모인가?     


  영화의 결론에 이르러 월터는 상담사와 마주한다.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 있느냐는 말에 어릴 적 ‘자연사 박물관에 갔을 때’라고 답한다. 거대한 오징어와 거대한 고래가 싸우는 모형이 있는 곳, 그 모습을 보고 두려워했다고 말한다. 하지만 엄마의 말을 듣고 덜 무서웠다고 말한다. 그때 “아빠도 곁에 있었느냐”라는 상담사의 질문에 그는 “모른다”라고 답한다. 영화 [오징어와 고래]는 앙숙 관계인 오징어와 고래처럼 부부의 관계가 이미 오래전부터 금이 가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월터는 그것을 어릴 적부터 알았던 것 같다. 알았기에 오징어와 고래의 모형을 보고 두려워했던 건 아닌지 모르겠다. 마지막 장면은 형 월터가 급히 뛰어서 자연사 박물관에 이르러 어릴 적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오징어와 고래] 모형 앞에 선 모습, 그것을 당당히 바라보는 모습으로 맺는다. 이제는 더는 무서워하지 않겠다는, 두려워 떨지 않겠다는, 당당히 맞서서 이겨내겠다는 의지를 보여 주려는 건 아닌지, 피하지 않고 당당히 맞서려는 월터의 모습에서 그들의 희망을 내다본다.   

   

  프란치스코회 신부이자 뛰어난 영성 작가인 리처드 로어는 상처와 아픔에 대해 이런 말을 했다. “상처는 전환되지 않으면 전이된다.” 이 말은 누군가 치유되지 않은 상처 때문에 아픈 말과 행동을 할 때면 그것을 나를 향한 공격이라고 받아들이지 말라는 것이다. 만약 그 말과 행동을 나를 향한 공격이라고 받아들이면 그 사람의 상처가 나에게 전이되지만 반대로 그것이 그의 상처 때문이라고 생각한다면 그 상처가 나에게 전이되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깨어진 세상에서 살아가는 이상 우리는 아프다. 사람은 누구나 아프다. 우리 중에 아프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나에겐 아무런 문제가 없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왜 그럴까? 상처 없는 사람, 상처받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산다는 것은 상처받는 일이다. 누구든지 넘어질 수 있고, 깨어질 수 있고, 실패할 수 있고, 두려워할 수 있고, 상실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영화 [오징어와 고래]는 세상의 가정 그리고 부부, 자녀들을 향해 참된 가정은, 그 가족의 모습은 어떠해야 하는지, 또 온전한 부부, 부모와 자녀의 모습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를 우리에게 도전한다. 깨어진 세상, 파편화된 세상, 무엇으로도 돌이킬 수 없는 희망 없는 세상일지라도 희망은 있다고!! 희망은 포기하지 않고 노력하려는 의지에서 반드시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외치려는 듯 보인다. 절망의 조각, 낙심의 조각, 포기의 조각이 아닌 우리의 노력, 우리의 시도, 우리의 저항, 우리의 수고, 우리의 애씀이 절망을 이겨내고 상실을 극복하고 포기와 낙심 그리고 단절을 원래의 모습으로 회복할 수 있다는 외침 말이다.      


  난 깨어진 세상에서 우리가 사는 목적과 살아가야 하는 이유는 그저 마음이 이끌고, 감정이 이끌고, 생각과 상황이 이끌고 세상이 이끄는 대로가 아니라 하나 됨을 이루기 위한 또 사랑받고 사랑하기 위한 데 그 이유와 목적이 있음을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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