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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만식 Apr 25. 2023

얼굴의 호소

풀 메탈 재킷_1987년


 




  33년 전의 기억이 떠오른다. 유난히 길었던 군시절, 난 그 당시 해군의 주력 군함이었던 DD-H 구축함의 수병이었다. 그걸 자랑스럽게 여기며 동쪽 바다를 지켰던 때를 기억한다. 수심 1,700m 깊이의 바다 위에서 또 굽이치는 파도, 매섭게 부는 바람, 여름과 겨울이면 어김없이 찾아온 태풍에 몸을 맡기며 두려움 없이 생활했던 때가 있었다. 그 어떤 장애물도 장애로 여기지 않았던 때였다.




  가끔은 그런 정신력이 어디서 생겨 났는지 하는 궁금증도 들었다. 돌이켜보면 해군기초군사학교에서 6주 동안 받았던 훈련으로부터 오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하곤 한다. 빨간 모자를 쓴 DI. 그 어떤 감정도 없이 로봇처럼 훈련병을 가르쳤던 들뢰즈가 말하는 전쟁 기계 같던 교관들, 그때의 기억이 어제 일처럼 선명하다. 온갖 두려움(폭력, 폭언, 얼차려)을 무기 삼아 훈련시켰던 기억들, 그것을 당연한 걸로 생각했던 그 당시 나를 떠올린다.




  국토방위수호를 위해 필요한 군인으로 만들기 위해 쏟아냈던 교관들의 가르침과 훈련들이 베트남 전쟁을 배경으로 한 “풀 메탈 재킷”의 훈련병들 그리고 그들을 가르쳤던 교관 하트먼 상사와 오버랩되는 것은 왜일까? 영화의 1부 훈련소 마지막 장면 곧 고문관이었던 로렌스의 극단적인 행동과 하트먼 상사의 죽음은 현실에선 일어나기 힘든 장면일진 모르지만 그럼에도 얼마든지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는 아닐까.




  전쟁은 폭력이다. 그것도 거대한 폭력이다. 거기엔 자국의 이익과 수호와 평화라는 명분을 제시하나 엄밀히 말해 폭력이다. 살인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인류는 문명을 통해 지금에 이르렀다. 문명은 도구를 만들었고 그 도구는 문명을 이끌었다. 인간 삶을 이롭게 하고 문명을 위한다는 목적으로 이어왔다. 하지만 그 결과는 끔찍한 살생을 낳고 말았다. 두 세계대전(1차_1914-1919, 2차_1939-1945)이 그것을 보여주지 않는가.




   전쟁에 영광이 있는가, 진정한 의미의 승리가 있는가, 난 그 어떤 영광도, 의미도, 가치도, 승리도 없다는 입장이다. 어쩌고 저쩌고, 이런저런 명분을 둘러대지만 결국에는 모든 걸 짓밟고 파괴하고 멸망케 하지 않던가. 하트먼 상사의 외침이었던 “자유민주주의 수호”, “공산주의 타도”, “하나님은 자유민주주의를 선택하시고 공산주의를 심판하신다.”는 외침, 하나님 나라가 곧 미국이라는 식의 발언은 어디에서 나온 말인가, 무서운 말, 무서운 생각, 그 근거를 성경에서 찾았다면 그것을 나는,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전쟁 앞에서 나와 너, 우리는 없다는 것. 그 어떤 것도 그저 세계 내 존재하는 존재일 뿐 존재자는 존재하지 않는 상태로 전락한다는 사실에서 끔찍하다는 생각이다. 서구 철학의 사상이었던 존재론이 불러온 결과가 이런 전체주의를 만들지 않았던가! 전쟁과 폭력 앞에서, 그릇된 이데올로기 앞에서 생명은 언제나 소모품으로 전락했다. 그것은 사실이고 현실이었다.




  영화 “풀 메탈 재킷”의 2부 전쟁 장면은 그야말로 전쟁의 참혹함을 있는 그대로 보여줬다. 그래서 더욱 끔찍했다. 소름이 돋았다. “승리”라는 명분 아래 그보다 더 소중하고 가치 있는 존재들을 그 어떤 죄책감 없이 제거해 버렸다. 그 어떤 미안함도, 두려움도 없이 말이다. 2022년 2월 24일에 벌어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전쟁 역시 이런 상황을 보여주지 않았던가. 죄 없는 군인들, 어린아이, 부녀자, 민간인들의 무고한 희생과 끊임없는 죽음이 1년여 날들을 여전히 채우고 있음이 고통스러울 따름이다.




  윤리학을 제일철학이라 말한 에마뉘엘 레비나스는 타인의 의미에 대한 사유를 그의 철학의 제일 과제로 삼았다. 그 일을 평생에 몰두했다. 그는 종교를 어떤 거룩한 신을 만나거나 초월적, 절대적 힘을 경험하는 것만을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얼굴로 다가온 타자에 대한 경험, 나에게 말을 걸어오는 이름 모를 타자를 경험하는 것으로 말한다, 얼굴, 그 얼굴은 고아, 과부, 버려진 사람들 힘없고 약한 사람들의 모습으로 계시하는데 중요한 건 그 얼굴을 외면해선 안 된다고 말한다.




  외면 아닌 나에게 호소하는 그를 대신해서 고통을 짊어지고(대속, 자리바꿈, 대체) 그를 전적으로 책임지는 반응으로 관계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얼굴의 현현”을 그는 “계시”, “신의 현현”이라고 보았다. 타인의 얼굴을 통해 존재를 윤리로 끌어낸 그의 생각이 성경이 말하는 율법의 정신인 사랑의 이중 계명(하나님 사랑, 이웃사랑)이 아닐까?




  살아가면서 항상 드는 생각은, 삶이 곧 전쟁 같다는 것이다. 총칼을 들진 않았어도 영화의 훈련소처럼 끊임없는 인격모독, 무시, 조롱, 왕따(따돌림), 그릇된 가치, 이데올로기, 가스라이팅(세뇌), 살인과 폭력, 불의가 언제나 달려드는 전쟁터, 그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이라는 조금 극단적으로 표현해 드는 생각이다. 그렇다 보니 어느 땐 내가 원하지 않아도 공격자의 위치에 서서 다른 이를 공격할 때도 있고 또 공격을 받는 일도 종종 경험한다.




  그래서일까? 얼굴은 항상 죽음의 가능성에 노출되어 있다는 생각이다.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을 죽이기로 마음먹었다든가(로렌스, 전쟁 기계로서의 군인들의 경우) 마음으로 저주하고 미움으로 대할 경우, 그것은 그 자체로 상대방의 얼굴을 없애버리겠다는 것을 의미하게 된다는 것, 그래서 내게 주어진 힘과 권력,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지 그것을 마음대로 사용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 부지런히, 끊임없이 사랑하고 나 아닌 너와 우리를 더 깊이 생각하는 삶으로 나아가려는 노력, 그런 지고한 삶을 나는 다시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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