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채우는 건 결국 소소한 것들.
짧아진 머리칼에 부는 바람이 다정했던 오늘.
오전부터 좋아하는 북카페에서 밀린 원고를 쓰다가
사군자 수업에 조금 늦게 도착해 가까스로 홍매화를 완성했다.
수업을 마친 후, 선생님이 데려간 맛집에서
양갈비와 생맥주로 입호강을 하고
낮보다 짓궂은 바람을 헤치며 시 수업이 열리는
출판콘텐츠센터로 부지런히 발을 옮겼다.
예전부터 좋아한 이정하 시인님의 귀한 이야기들을 받아 적고 사람들과 낭독하고 웃다 보니
시간이 금방 흘러, 다음 주를 기약하고 좋아하는
노래 들으며 집으로 가는 길.
하루가 이렇게 좋아하는 것들로 가득 차있는데
최근의 나는, 무엇이 그토록 힘들었던 걸까.
문득 떠오른 생각으로 길에서 일기를 쓴다.
어쩔 수 없이 잃어야 하는 것들이 낸 구멍만
들여다보느라 살갗에 닿는 귀한 것들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 너무 작아 시시하다고 여겼을지 모른다.
정작 이 소소한 것들이 내 삶을 채우는 것들인데.
내가 보낸 이 하루는, 30대엔 좋아하는 일들로만
채우고 싶었던 20대의 내가 넘어지고 노력하며
만든 결실인 것이다.
그것을 잊자마자 보란 듯 일상이 흔들렸다.
어째서 익숙함은 나태함과 함께 오는 걸까.
수습되지 않은 감정과 사라지는 것들에게
미안한 일이지만 나는 나부터 좀 행복해져야겠다.
청춘을 바쳐 만들어 놓은 꿈같은 일상을 시시하다 했으니 과거의 나에게도 사과할 거고.
스스로를 그림자에 가둬두기엔 날씨도
너무 좋지 않나. 예상보다 금세 괜찮아질 것 같다.
간혹 무너질 때도 있겠지만 일단 지금은
저 화사한 빛으로 나가 소중한 일상을 누려야겠다.
" 나의 우울아,
지난 계절 동안 너로 인해 충분히 아파한 것 같아.
잘 지내지 못해서 미안했는데 이제 너를 두고 잘 지낼 거라서 미안해. "
#03. 세 번째 번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