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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미 Mar 16. 2020

딱, 한 걸음의 양으로

Q. 꿈을 향해 계속 해나갈 수 있는 힘은 어디서 올까?


                                                                                                                                              



 작업실 벨르몽에서 집까지 자전거 거리는 1시간 40분으로 나온다. 벨르몽 앞에 자전거 '따릉이'가 있고 양재천과 한강으로 통하는 동선이라 자전거로 집에 갈 생각을 여러 번 했었다. 하지만 자전거를 타는 습관이 전혀 없어 집까지 자전거를 타고 간다는 게 까마득하게 느껴졌다. 봄에는 양재천에 꽃이 예쁘다고 하길래, 여름에는 대중교통이 찝찝해서, 가을엔 하늘이 예뻐서.. 타볼까? 사계절 내내 머릿속에서 이유를 세며 나중으로 미루기만 했다. 오늘은 꼭 자전거로 와보는 거야, 하고 작정한 날의 의지도 끝까지 도달할 엄두가 안 나 꾸깃꾸깃 접어버리기 일쑤였다. 페달 한 번 돌려보지 못하고 1년 하고도 4개월이 지나갔다.            



그림책을 만들겠다는 꿈을 오랫동안 가지고 있었다. 많은 그림책을 볼 때마다 내 그림책을 상상하곤 한다. 더 미루지 말고 그림책을 만들자고 큰 결심을 했던 작년. 하던 일들을 내려놓고 그림책 만드는 것을 우선순위에 두었다. 아름다운 그림, 철학적인 스토리를 가진 그림책을 만들어 '이탈리아 볼로냐 그림책 페어'에 참가하는 것! 이라고 목표도 세웠다. 저 멀리서 빛나는 꿈이 원동력이 되어 나를 이끌어 줄 거라고 믿고.


하지만 먼 꿈에 묶인 나는 오히려 단 한 장의 그림을 완성하기도 어려웠다. 평소엔 남은 종이 귀퉁이나 노트에도 슥슥 그리기도 하고 조금 어수선한 상황이나 장소에서도 가볍게 그릴 때가 많았다. 그런데 목표만을 생각하니 아무도 없는 고요한 시간을 선택해 꼭 책상 위에서만, 그림책 규격 사이즈의 고급 종이를 펼치고 원화 작업에 들어간다. 무언가 엄청나게 창의적이고, 번뜩할 만한 아이디어가 종이 위에 나타나길 기다리면서. 내가 걸어서 갈 생각보다 꿈이 나에게 와주길, 게으른 바람을 안고서 정작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로 꿈을 바라보기만 하는 날들.

한 장, 한 장의 그림이 오늘을 위한 그림이 아니라 멀리 둔 꿈을 위한 것이니 부족해 보일 수밖에 없었다. 이 그림으로 볼로냐에 갈 수 있겠어?! 하는 질책이 이어지고 손이 움직이기 전에 머리로만 미리 계산하는 날이 늘어갔다.                     






잠깐 걷기에도 녹아내릴 듯 뜨거운 여름날이었다. 이글이글 타던 해가 저녁 하늘에 스며드는 늦은 오후, 벨르몽에서 역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하늘이 아름다워서 그랬나? 아니면 너무 배가 불러서 소화가 필요했던가? 눈앞의 따릉이 자전거를 보자 결제를 하고 올라탔다. 이미 페달을 밟기 시작하며 생각했다. 더운데? 어디까지 가려고? 딱 한 정거장인 ‘양재 시민의 숲 역’까지만 가보자- 벨르몽에서 이어지는 양재천을 따라 쭉 페달을 밟았다. 

도로 아래의 천을 따라 달리니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벨르몽 옥상에 올라 까치발을 들고 빌딩을 피해서 봐야 하는 먼 노을빛은 아주 낮은 곳까지 부드럽고 잔잔하게 깔리는 것이었다. 졸졸졸 얕은 물 위로 반짝반짝 흐르고, 꽃잎과 잎이 포개지는 틈 하나하나를 비집고, 자전거 핸들을 은빛으로 윤을 냈다. 편안한 옷차림으로 하늘을 보며 느릿느릿 걷는 아주머니, 할머니의 손을 잡고 들꽃을 구경하는 아이, 혀를 길게 빼고서 총총 리듬감 있게 뛰는 멍멍이. 퇴근길 빼곡히 서 있는 차들도, 경쟁하듯 높은 기업 빌딩도 이곳에서 몰라도 되는 일이었다. 가까이 두고도 이 풍경을 모르고, 산으로 들로 멀리 떠날 생각만 했다니 억울할 지경이었다.


 페달의 움직임이 자연스럽게 익을 무렵, 생각보다 빨리 시민의 숲에 도착했다. 나는 이 기분을 좀 더 유지하고 싶어서 그대로 양재천을 따라가다 가까운 전철역 근처에 자전거를 반납하고, 대중교통으로 집에 들어갔다. 짧은 거리지만 한 번 타보니 재미가 붙어 일주일 뒤 나는 또 자전거로 퇴근을 했다. 시민의 숲 부근까지, 그다음엔 양재천에서 한강으로 이어지기 직전인 개포지구까지, 그다음엔 한강으로 그대로 이어져 잠실까지. 조금씩 자연스럽게 갈 수 있는 거리가 늘어났다. 타기 전에 ‘꼭 집까지 가자!’ 하는 목표는 전혀 없었다. ‘갈 수 있는 데까지만 가보자-’로 늘 시작했는데                                               




막상 페달을 밟다 보니 멈추는 것보다 달리는 게
더 익숙해져서 점점 멀리 갈 수 있게 되었다.







일몰에 소박하게 빛나는 풍경들에 감탄하면서 양재천을 천천히 달리다 보면 한강으로 넘어가는 구간부터는 완전하게 깔린 어둠을 달리게 된다. 나는 그냥 같은 자세로 페달만 돌렸을 뿐인데 나를 둘러싼 풍경의 색감과 형체가 바뀌고 그것들을 피부로 오롯이 느낄 수 있다. 아직은 멀리 있는 한강 바람이 마중 나와 나를 통과하면, 여름날 저녁 바람이 어찌 그렇게 시원할 수 있는지! 달리는 동안은 더위를 느낄 새 없다. 어느 순간 다리가 자동으로 페달을 돌리는 것처럼 밀고 나간다는 인지가 없을 만큼 가볍게 속도가 붙는다.


그렇게 달려 잠실 한강 공원으로 들어서면 양재천의 평화와는 또 다른 평화가 느껴진다. 너울너울 불빛이 녹는 한강을 바라보며 잔디 위에서 저녁의 여유를 즐기는 사람들을 본다. 자전거에 잠깐 내려 벤치에 앉아 바라보는 한강은 이전에 내가 보던 한강과는 다르게 다가온다. ‘자전거 타고 오길 정말 잘했어! 여기까지 오다니!’ 스스로가 그렇게 멋질 수가. 머릿속으로 늘 생각만 하던 목표까지 가지 않아도 충분히 만족하고 뿌듯할 수 있다. 그 희열을 느낀 후로 일주일에 한두 번씩은 벨르몽에서 잠실까지 자전거를 타고 오며 여름과 가을을 보냈다. 


제법 쌀쌀해진 늦가을의 어느 저녁, 나는 잠실 한강 공원에서 멈추는 것을 깜빡하고 페달을 꾸준히 밟아 이어진 길을 계속 달리게 되었다. 광나루 한강 공원을 지나며 생각지 못한 언덕을 처음 마주하고 애먹기도 했지만 언덕 위에서 한강의 반대편까지 내려다보이는 야경을 만났고, 내리막길의 짜릿함도 느낄 수 있었다. 그렇게 계획에 없이 자전거를 타고 동네까지 도착했다. 시민의 숲까지 딱 한 정거장만 가자고 했던 걸음이 이렇게 멀리까지 데리고 온 거다. 달리지 않았다면 볼 수 없었던 풍경까지 누리면서. 


목표를 잡아두고 ‘해야지, 해야지.’ 생각만 할 땐 한 발자국도 갈 수가 없었는데 목표와 상관없이 매일 조금씩 하던 것이 습관이 되고, 속도가 붙어 그 뒤엔 자연스럽게 목표에 가 있는 걸, 보았다.         







 20대에 원하던 꿈을 서른 살에 이뤘다.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하고 내 이름의 책을 쓰는 것. 맨땅에서 시작하던 그때보다 왜 지금이 더 어려울까? 그때는 꿈을 위해 필요한 것으로만 삶을 계획하지 않았다. 나는 그냥 그날 그리고 싶은 것을 그리거나 쓰고 싶은 걸 썼다. 그게 내일로 이어질 거라는 생각을 하지 못하고 그 순간에 할 수 있을 만큼에만 충실했다. 그런 하루가 쌓여가고 일 년이 지날 즈음 작은 엽서를 만들었고 그러다 노트도 만들고, 청첩장도 만들고, 그렇게 작업물이 쌓이니 어렵지 않게 책을 만들 수 있었다. 조금씩 매일 이어지는 일은 흐르듯이 자연스럽다.

그런 과정이 나에게 다시 필요하다. 종이를 펼쳤다. 이번엔 고급 종이와 재료 말고 쉽게 쓰고 버려도 되는 A4용지와 연필로 자유롭게 드로잉을 했다. 나는 그냥 오늘 표현할 수 있는 정도의 그림만 그릴 거다. 볼로냐 그림책 페어에 못 갈 수도 있고 그림책을 만들 수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매일 조금씩 하는 과정 안에서 만나는 작은 기쁨들이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어가는 원동력이 되어줄 것이다.     





저 먼 꿈에 닿았을 때만 성공의 희열이 있는 게 아니다. 책이 나왔을 때 당연히 기뻤지만 그만큼의 기쁨이, 작은 엽서를 만들었을 때도 분명히 있었다. 아마 꿈을 이루는 것만 중요했다면, 과정의 희열은 덜 했을 거고 밀고 나갈 힘이 떨어져 흐지부지 관뒀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멀리에 있는 꿈을 향해 달리는 게 아니라, 
하루하루 한 걸음의 양만 걸으면 된다. 



그렇게 조금씩, 천천히라도 가보았으면 좋겠다. 끝까지 갈 힘이 내게 없더라도, 가는 도중에 만난 예상치 못한 기쁨들과 풍경이 순간순간의 희열이 되어 페달에 힘을 실어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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