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망한 작가가 망할 작가에게2
누구나 그런 시절이 있지 않나?
'밤을 잊은 그대에게' 정도의 라디오 프로에 엽서를 쓰고
선생님의 강요로 국군 아저씨께 위문 편지를 쓰고
TV 속 반짝이는 연예인에게 편지를 썼던,
지금은 모두 인터넷을 통한 접근이 가능해져서
더 이상 아날로그적 관찰이 불가능해진 그런 열정말이다.
소풍을 가는 버스 안에서도 창밖의 풍경에 감성이 돋아
수첩을 꺼내 시처럼 보이는(!) 글을 끄적이곤 했던 이른바 문학소녀였던 나는
매번 한걸음 더 넘치는 짓을 일삼곤 했다.
이를테면 라디오 디제이가 연결하는 전화에 낙점이 되어 내 목소리가 전파를 탄다 거나
국군 아저씨와 나누던 위문 편지가 결국 연애편지가 된다 거나
드라마 주인공에게 한없이 감정이입이 되어
남주를 주인공으로 한 팬픽 유사한 꽁뜨를 써서
말로만 '오빠'를 외쳐대던 팬 클럽 동지들을 열광케 하는 일 말이다.
그런데 난 빼도박도 못할 ENFP이지만 극강의 E는 못되는지라
결국 내 이름을 전면에 세우지는 못하고
해미가 되었다가, 창정이가 되었다가, 도영이 같은 필명(!)으로 막을 내리곤 했다.
팬픽 따위는 아예 저세상일 처럼 여기며
딱 부러지게 자기 이름 하나로 꿋꿋이 매일의 글을 갈고 닦았을
공모 당선자들에게는 상상도 못할 병신 짓임이 분명한 일이었지만
난 그냥 어떤 서툰 글도 재밌었고,
다른 사람들의 가벼운 즐거움에도 깊이 공감하는 극강의 F였으며
내 글에 빠져 읽고 또 읽는 제1호 독자였음을 고백한다.
그래서 결국은 써야 할 글은 구석에 쳐박아두고
청소만 열심히 해대는 회피형 인간 같은 심리의 소유자였을 수도 있겠다.
어느 날 갑자기 집안 대청소를 시작하면 주변에는 내가 뭔가를 쓰기 시작한다는 신호가 되었다.
대청소가 다 끝났다고 글쓰기에 바로 들어가는 것도 아니다.
이제 글 소재가 될만한 자료를 수집하기 시작하거나
뭔가 잘 풀리지 않으면 책장을 뒤져 미뤄뒀던 소설책을 읽기 시작한다.
머리 속 어느 구석이 꽉 막히거나 풀리지 않은 실타래들이 뒤엉켜 있으면
난 영화를 보거나 소설책을 읽는 따위로 뇌청소를 하는 습관이 있었다.
그러다 번쩍! 하고 뭔가가 떠오르면 거기서부터 꼬리에 꼬리를 무슨 상상력이 발동되지만
대부분은 영화에 빠지고, 소설에 빠지고, 내 감정에 빠져 깊은 수면에 빠져들고 만다.
그렇게 방청소하고, 뇌청소하고, 자료조사에 시간을 뺏겨
결국 마지노선에 다다르면 글 쓰기는 속도가 붙고
이거 말고 뭐 딴 거 없을까로 고민하던 다소 못 미치는 자료를 바탕으로
뚝딱 과제가 마무리된다.
그리고 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