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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민네이션 Aug 13. 2018

부정과 사유

마르쿠제1차원적 인간 5장 부정적사유_임경석

20180809_철학아카데미

마르쿠제 일차원적 인간_임경석

제 2부 일차원적 사유_5장 부정적 사유



들어가기


이성의 사유 방식을 긍정적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부정적으로 볼 것인가? 철학사에서는 사실 부정성과 긍정성의 대립이 매우 부단하게 역사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이성은 긍정적인가 아니면 부정적인가? 이것은 매번 논란의 대상이었다.


Episteme라고 하는 인식론의 입장에서 ‘진리’란 무엇인가가 중요한 화두였다.플라톤이나 소크라테스와 반대로 소피스트들은 요즘추세로 보면 다분히 포스트모던적이다.


존재와 비존재를 이야기한 사람은 사실 역사적으로 파르메니데스였다.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모두 있는 것이다와 같이 우리가 생각할 수 없는 것은 없는 것이다라고 말한 것이다. 파르메니데스에게서 비존재는 ‘시뮬라시옹’과 같은 가상현실적인 것이다. 마르쿠제가 파르메니데스에게서 가지고 오는 개념은 이러한 시뮬라시옹과 같은 비존재이다.


68혁명 신좌파의 기원을 이룬 마르쿠제.


저항, 논리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진리일 수 없다’우리의 잘 훈련된 눈과 귀에는 이 명제가 병박하고 어리석거나 도는 이와 반대로 말을 하는 듯이 생각되는 또 하나의 명제인 ‘현실적인 것은 이성적이다’와 마찬가지로 터무니 없어 보인다. 그러나 서구사상의 전통에서 생각하면, 이 두가지 ㅁ여제는 그 전통 이론이 이끌어 왔던 이성의 관념을 도발적으로 간략화한 형태로 나타내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양자는 동일한 개념 내용을 포함한다. 즉 현실과 현실을 이해하려는 사유와는 상반, 대립적인 구조를 표현한다. 직접적인 경험의 세계인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되기 위해서는 그서이 파악되고 변형되고 전복되어야 한다.


주관적 세계와 객관적 세계를 하나의 상반된 대립적인 통일체로 결합시키는 이성, 진리, 실재라는 등식에서는 이성이 파괴적인 힘’ 부정의 힘’이며, 그것은 이론적이고 실천적인 이성으로서 사람들과 사물에 대한 진리 즉, 사람들과 사물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되는 조건을 확증한다. 이론과 실천에 관한 이러한 진라가 주관적인 조건이 아니고 객관적인 조건이라는 것을 논증하려고 하는 시도는 서양사상의 본래부터의 관심사이고 서양사상 논리의 근원이었다. 그 논리는 철학의 전문분야라는 의미에서의 논리가 아니고, 현실을 이성적인 것으로 파악하는데 적합한 사유양식으로서의 논리이다.


기술적인 합리성의 전체주의적 세계는 이성의 관념이 변질한 최신형태이다. 선진 산업문명의 폐쇄된 조작적 세계는 자유와 억압, 생산성과 파괴, 성장과 퇴화의 놀라운 조화를 보여주고 있는데, 이 세계는 특정의 역사적 투기로서의 이성의 관념 속에 미리 그려져 있다. 기술적인 단계와 기술 이전의 단계 사이에는 인간과 자연에 대한 어떤 공통의 개념이 있고, 그 공통의 개념이 서양 전통의 연속성을 표현한다.


다른 양식의 사상은 이 연속체 속에서 상호 충돌하고, 각기 다른 방법으로 사회와 자연을 파악하고 조직하고 변혁한다. 이성의 안정화 추세는 그 파괴적 원리와 충돌하고, 긍정적 사유의 힘은 부정적 사유의 힘과 충돌하여 결국은 선진 산업문명의 성과가 모든 모순에 대한 1차원적 현실의 승리를 이끌어 낸다.


이 충돌은 철학적 사상의 기원 그 자체에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플라톤의 변증법적 이론과 이르스테텔레스의 ‘논리학’organon의 형식 논리와의. 콘트라스트 속에 놀라운 표현이 발견된다.


프랑크푸르트학파와 칼포퍼의 논쟁은 전체적인 혁명인가 아니면 점진적인 개혁인가가 극명한 대칭을 이룬다. 


고전, 이성


고전적 그리스철학에서 이성이란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인가를 구분하는 인식능력인데, 그것은 진실성 그리고 허위성이 우선적으로 존재하는 성질, 실재의 성질이라는 조건 아래서 그러하다. 그리고 이 근거 아래서만 그것은 ‘명제’의 고유한 성질이 된다. 진정한 언설discourse, 진정한 논리는 실제로 ‘존재하는’ 것을 실제로 존재하는 듯이 보이는 것과는 다른 것으로 드러내고 표현한다.


그리고 진리와 실재의 존재 사이의 이러한 등식으로 인해 진리는 하나의 가치가 된다. 그 이유는 존재가 비존재보다 좋은 것이기 때문이다. 후자는 단순한 무가 아니다. 그것은 존재의 가능성이고 존재에 대한 위협인 파괴이다.


진리를 위한 투쟁은 파괴와의 싸움, 존재의 구제를 요구하는 투쟁이다. 그 노력은 기성 현실을 진실이 아니라고 공경하는 경우에는 그 자체가 파괴적인 것으로 나타난다. 이를 테면 도시국가 아테네와 대립한 소크라테스처럼 진리를 위한 투쟁이 현실을 파괴로부터 구제하는 한, 진리는 인간적인 생존을 책임지고 약속한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인간적인 투기이다. 사람이 실제로 잰조하는 것을 꿰뚫어보고 깨닫도록 훈련되었다면, 그는 진리와 일치하여 행동할 것이다. 인신론은 그 자체가 윤리학ethics이고 윤리학은 인식론epistemology이다.


1세대부터 3세대까지 비판학파들.


부정, 긍정


스스로 상반대립적인 세계의 경험을 방연하는 이러한 마르쿠제의 경험은 결핍과 부정성에 시달리고 끊임없이 파괴의 위협에 시달리고 있으나, 그와 동시에 궁극원인에 따라 구성되 ㄴ하나의 코스모스이기도 한 세계를 드러낸다.상반 대립적인 세계의 경험이 철학적 카테고리의 발전을 이끌어 가는데 따라 철하은 스스로 파괴된 존재론적 분열의 세계인 2차원적 세계로 이행한다. 현상과 실재, 비진실과 진실은 존재론적 조건이다.


이 구별은 추상적인 사유의 장점이나 결점에서 유래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이론과 실천 속에서 사상이 참여하는 세계의 경험에 근거한다. 이세계에는 사람과 사람이 그 자체에 의해, 그리고 그 자체로서 존재하는 존재양식과 이러한 형태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별개의 존재양식이 있다. 후자의 부정적 조건을 극복하는 것이 존재의 과정, 사유의 과정이다. 철학은 대화술에 그 근원을 가지며, 그 ㄴ언설의 세계가 상반대립적인 현실의 사물들에 반으하는 것이다.



진리, 비진리


마르쿠제의 논리에 따르면 우리가 진리라고 생각하는 긍정성의 진리를 다시 돌아볼 수 있는 비진리의 요소들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로고스에 대해서 에로스의 반격’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결국 로고스와 에로스의 결합을 통해서 새로운 세상을 열어가야한다는 것이다.


진리라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서 비진리를 전제하고 그것들을 실천이성의 관점과 기준에서 무엇이 더 현실적합한가를 볼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진리는 동일률에 기준을 두고, 비진리는 모순률에 그 기준을 둔다.


독일의 관념학파와는 다르게 프랑스는 실존주의와 생철학의 계보를 만들어간다.


실증주의, 역사적 변증법


1차원적 인간은 사실 산업사회가 지도하고 있는 실증적인 것, 존재하는 것 자체에만 머무르는 정지된 시간 자체를 비판한다. 사유의 1차원적인 문제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변증법이 필요하다고 마르쿠제가 말한다. 마르쿠제는 마르크스를 통해서 헤겔을 접하면서 변증법이 가지고 있는 역동성에 집중을 한다.


이라한 변증법을 마르쿠제는 인간이 역사 가운데 놓여져 있다는 것과 과거와 현재 사이에서 의미를 발견하는 역사적 변증법으로 발전시키면서 헤겔을 찬야하고 있다. 실증주의는 오직 존재하고 바라보는 것이 전부인것처럼 제시하고 그것이 진리라고 말하는데 역사적 변증법은 비진리처럼 보이는 부정성을 내포하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이것이 1차원적 인간을 벗어나는 길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민네이션, 저항


마르쿠제는 칸트의 순수이성이 가지고 있는 이론적 정합성보다는 실천적으로 현실을 바꿀 수 있는 ‘실천이성’에 더 깊은 관심을 둔다. 그렇기 때문에 플라톤보다는 ‘에로스’에 더 깊은 관심을 두고 프로이트에 더 깊이 다가간다. 우리가 진짜 우리의 욕망에 반하지 않고 움직이게 될 때는 언제인가?이런 고민들을 하게 되는 것이다. 마르쿠제는 1차원적 인간을 만들어내는 산업사회에 대해서 ‘저항정신’을 가지고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원리는 바로 ‘부정적 사유’이다. 이것이 계몽의 변증법에서도 다루고 있는 ‘부정의 변증법’이다. 부정성을 제시하고 그것을 발전시켜서 현실의 비리와 거짓을 가리는 긍정성과 대립할수 있는능력을 말한다.


그런데 이것은 행태주의 관점과 구조주의 관점에서 다시 생각해볼 수 있다. 인간이 개인적인 행동에서 부정성을 가지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어쩌면 구조의 문제일 수 있다. 그런데 구조의 문제를 제대로 진단하지 못하면 인간의 행태에 대해서 의도나 능력으로만 진단하는 실수를 범할 수 있다. 결국 변수는 ‘의도, 능력, 구조, 문화’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그러면 어떤 조직이나 사회를 바꿀 때 인간의 순수한 의도로 회복, 역량강화를 통한 능력상승, 구조변화를 통한 가능성 확대, 문화적 흐름을 바꾸어 내는 전략’을 통해서 자신이 속한 곳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이런 방식의 저항은 매우 합리적이고 체계적이지만, 시간은 오래 걸릴 수 있다. 그리고 계속해서 현실을 분석하고 해석하면서 새로운 대안을 만들어내야 하는 노력이 수반될 수 밖에 없다.


강의가 시작할 무렵의 철학아카데미 옥상에서 잠시 생각하다.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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