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철학일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낭만민네이션 Aug 13. 2018

욕망과 요구

몸과 사회의 변증법

#1. 들어가기

태어나면서 들었던 이야기는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다'였다. 삶의 대부분의 시간들이 욕망을 분출하고 실현하는 과정이라고 보는 시대에 태어나다 보니 나 역시 욕망 자체가 핵심인줄 알았다. 그래서 욕망을 절제하는 금욕주의를 택하거나 아니면 욕망을 자유롭게 표출하는 자유주의의 길 밖에 없는 줄 알았다. 그런데 어느시점이 지나서 욕망이 줄어드는 시기가 찾아왔다. 그것이 인간이 나이를 먹어서 욕망이 줄어들었나?라고 생각하기도 했지만 어느정도 시간이 지나고, 인간에 대해서 알아가다가 보니깐 그게 아니었다.


#2. 몸과 정신

인간의 몸 자체는 스피노자가 이야기하는대로 살아가기 위한 생명의 활동인 '코나투스'로 가득하다. 생육하고 번성하기 위한 인간의 몸은 동물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의 두뇌는 그렇지 않다. 인간의 두되는 언어를 습득할 수 있고 문화를 즐길수도 있고, 상상력을 발휘해서 없는 것들을 만들어내기도 하면 같은 인간 동류에 대해서 존경심을 가지기도 하고, 신의 존재를 염원하기도 한다. 두뇌 자체는 생물학적으로 몸에 속하지만 두뇌가 시간과 변증법적인 학습을 하면서는 인간의 정신이 탄생한다. 인간의 두뇌가 생산양식이 되어서 정신이라는 생산물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정신은 일단 만들어지고서 프랙탈 구조(자기동질성을 계속 생산해내는 구조, 이른바 시냅스가 두뇌의 그런 프랙탈이겠다!)를 갖추게 되면 인간의 정신은 계속해서 네트워킹하고 새로운 프로그램을 만들어낸다. 이러한 프로그램이 상황을 만나면서 프로젝트가 되는 것이다. 아무튼 이렇게 만들어지고 있는 인간의 정신은 몸과 만나서 변증법을 이루어 낸다. 정신이 몸과 만나서 새로운 경험을 습득하고 그 경험은 다시 정신을 이루어 간다는 것이다. 이것이 헤겔 변증법의 핵심이다. 이런 방식으로 우리는 다른이들과 함께 살아간다.


#3. 변증법과 해겔

나는 모든 것은 아니지만 헤겔의 변증법적 요소를 인정한다. 그러나 베르그송이나 들뢰즈의 몸과 덩어리로 부터 발현되는 몸의 현상학을 무시하는 것도 아니다. 내가 앞으로도 계속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초기 독일 낭만주의자들이 시도했던 유기체 이론을 통한 '생기론적 범신론'의 입장에서 몸과 정신이 계속해서 연결되어서 인간-사회-국가를 만들어 간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여기서는 기독교 신앙의 영향으로 '죄'에 대한 깊은 통감이 있다.


#4. 몸과 사회

문제는 몸과 정신의 연결구조를 '욕망'이라는 것으로 표현해 버리면 몸의 우선성을 드러내고 그것은 곧 인간을 '욕망을 추구하는 존재'로만 표기해 버린다는 것이다. 더욱이 이것을 프랙탈 구조로 하여 사회나 국가가 욕망을 추구하는 조직으로 이해해버리면 이 사회의에서 우리에게 다가오는 요구는 바로 사회가 원하는 것을 너도 해라!가 되어 버린다. 이것이 전체주의로 발절할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한다. 결국 우리는 몸과 사회의 변증법적 작용에 의해서 '욕망을 추구하는 존재'로 정의되어 버리고 이후에 자본주의와 결합하면서 그 욕망을 추구할 수단으로 자본을 신성시하게 되는 '신성 가족'이 탄생하게 된다. 이러한 자본주의의 경향으로 심리적으로 병이 든 사람들이 프로이트를 찾아갔는데, 문제는 프로이트와 라캉역시도 인간의 '욕망'에만 관심을 두었지, 그것이 진짜로 인간의 근본인지에 대한 답은 내리지 못 한다는 것이다. 몸과 사회의 변증법에는 빠져버린 인간의 고귀한 정신의 설 자리가 없어져 버리고, 인간이란 하나의 부속품이 되어 버린다. 그렇게 다시 사회가 재구조화되고 나면 더이상 인간에 대한 질문은 진행되지 않는다. 사회의 요구에 몸의 욕망이 반응하는 사회로 정착되어 버리는 것이다.


#5. 정신과 사랑

유기체를 연결하는 과정은 '생명'에서 단서를 찾을 수 있다. 유기체가 서로 물어 뜯고 없애 버리지 않은 것을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몸의 현상, 생물의 현상과 정신의 연결이 일어나면 결국 '사랑'으로 연결되는 유기적 조직과 사회만이 지속적인 생활을 연장해 갈 수 있다. 여기서 인간을 다시 정의해야 한다. 인간은 '욕망을 추구하는 존재'가 아니라 '사랑을 받고 사랑을 해가면서 자신을 실현해가는 존재'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가정에서부터 사랑을 받고 사랑을 실현해가는 가운데 사회를 형성하고 그러한 사회가 국가를 형성하도록 다시 셋팅하자는 것이 나의 추지이다. 이른바 '유기체적 정치체제'의 핵심은 바로 사랑으로 만들어진 세상이라고 할 수 있다. 매우 이상적이고(굳이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많은 이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다고 대부분의 현실주의적인 견해로, 나의 이야기에 대해서 핀찬과 야유를 퍼부었기에) 실현되지 않을 것 같지만, 지금까지 내가 살아오면서 경험하고 확신하는 것은 인간은 사랑을 받을 때만 완전해지고 사랑을 할 때만 인간성의 회복을 경험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계속해서 이러한 논의를 사회과학적으로도, 심리학적으로도, 정신분석학적으로도, 철학적으로도 뻗혀나가야 한다는 미션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사랑의 주체를 회복하기 위한 노마드의 여정은 벌써 20년이나 된 것 같다. 아직 제대로 이루어 놓은 것도 없지만 감각이 말해주는 것은 나는 진정으로 사랑 받을 때, 사랑할 때 나의 존재 이유를 느낀 다는 것. 이렇게 사랑으로 회복된 인간성에서 나오는 정신은 언제나 고귀하고 선하다. 그러한 정신이 만들어갈 사회는 헤겔의 질투 투성이의 사회상도 아니고 마르크스의 노동자들만의 세상도 아니다.


#6. 사랑과 정의

그럼 이제 다음 작업으로 넘어가야 한다. 사랑이 말 그대로 모두 용서하고 희생하는 것인가? 그렇다면 악의 문제와 범죄는 어떻게 할 것인가?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을 해야 한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사랑의 대부분은 감정적인 어떤 두근거림도 있고 고차원적인 지적 사랑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한병철의 말처럼 사랑을 다시 발명해내야 한다. 사랑의 온전한 기준을 마련해야 한다. 인간 안에서 의지, 감성, 지성의 측면에서 사랑을 접근할 수 있다. 대부분은 의지적 측면은 빼 놓고 감정적 측면에서의 에로스와 지성적 측면의 필로스를 이야기한다. 그러나 아가페 사랑은 이 모든 것들을 포함한다. 바로 여기서 한가지 남아 있는 의지의 영역이 ‘정의’가 된다. 사랑안의 정의는 다시 말하면 사랑 안의 의지가 된다. 내가 용서할 것인가 말 것인가? 그리고 용서한다면 어떻게 의지를 발현해서 용서하는 적극적인 행동으로 옮길 것인가?라는 윤리적인 요청이 따르게 된다. 결국 정신과 사랑의 연결고리는 다시 말하면 정신과 의지의 관계라고 다시 치환할 수 있다. 사랑을 감성과 지성을 모두 포함하기는 하나 여기서는 의지의 문제만 보자는 것이다. 그렇다면 다시 의지의 철학자들이 막 다가온다. 쇼펜하우어와 니체와 폴리쾨르까지 말이다.




#7. 몸과 사랑


#8. 유기체적 정치체제


아직은 마무리를 하기 위해서 고민이 무르익지 않았다. 하지만 초안공유.

매거진의 이전글 부정과 사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