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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민네이션 Aug 26. 2018

긍정과 승리

마르쿠제 일차원적 인간_제7장 긍정적 사유의 승리

20180823_철학아카데미

마르쿠제 일차원적 인간_임경석

제7장 긍정적 사유의 승리_1차원적 철학



들어가기


실증주의에 대한 비판을 하는 마르쿠제의 주요한 논리는 ‘철학이 불가능한 1차원적 차원’에 묶어 놓는 것이기 때문이다. 감각만을 소재로 우리에게 주어진 현상을 분석하는 것은 사건의 의미와 의도를 숨겨놓는 하나의 이데올로기라고 할 수 있다.산업사회에서 실증주의적인 사고는 ‘비판과 부정성’없이 주어진 구조를 긍정적으로 수용하게 만들고, 그것은 결국 사람들이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사회에 대해서도, 국가에 대해서도 고민할 수 없게 만든다고 말한다. 아울러서 언어철학자나 분석철학의 문제는 ‘긍정적 사유’만을 승리자로 만든다는 데 있다. 마르쿠제는 여기서 부정적 사유의 존재는 철학을 할 수 있는 구조에 있고, 그것은 생각이나 의미가 여러차원으로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


오늘은 이러한 마르쿠제의 논리를 간단하게 알아보고, 조금은 다르지만 생물학적 혁명의 기본적인 골격에 대해서도 알아보자.



실증적, 사유


정신의 조작을 사회적 현실에서의 조작과 등질화하는데 공헌하는 사유의 재정의는 하나의 치료법을 목표로 한다. 사유는 그것이 순수하게 공리적이거나(수학, 논리학) 기성의 언설 및 행동세계와 같은 폭을 갖는 개념적 얼거리를 일탈하는 데서 치유될 때, 현실과 동일한 레벨에 놓이게 된다. 이리하여 언어분석은 사유와 언어를 형이상학적 관념의 혼란으로부터 치유한다고 주장한다. 즉 형이상학적 개념은 무엇인가를 지시하지도 설명하지도 않지만, 여전히 정신에 붙어 따라 다리는 미숙하고 비과학적인 과거의 ‘망령’으로부터 사유와 언어를 치료한다는 것이다. 그 역점은 철학적 분석의 ‘치료적’기능에 있다. 사유와 언어에서의 정상이 아닌 형태를 바로잡는 것, 애매한 점과 환상, 기이한 것을 제거하거나 적어도 그것들을 폭로하는 것이다.


산업공장에서의 정상이 아닌 행동을 폭로하고 바로 잡는 사회학의 치료적 경험론에 대하여 논해싸. 그 폭로, 정정의 과정은 그러한 행동을 전체로서의 사회에 연결지을 수 있는 비판적인 개념의 배제를 내포하는 것이다. 이러한 제약으로 인해 이론적인 과정이 그대로 실천적으로 된다. 그것은 보다 좋은 관리, 보다 안전한 계획, 보다 높은 능률, 보다 면밀한 계산의 방법들을 설계한다. 분석은 정정과 개선을 거쳐서 긍정에 도달한다. 경험론은 그 자체가 긍정적 실증적 사유라는 것을 증명한다.



감각론, 실증주의


기성 세계의 견지에서 보면, 모순된 사유양식은 부정적 사유이다. ‘부정적인 것의 힘’은 개념의 전개를 지배하는 원리이고, 모순은 이성을 다른 것으로부터 구별하는 성질이 된다. 이것이 헤겔의 논리이다. 이런 사유의 성실은 특정 유형의 합리론에 한정되는 것도 아니고, 경험론적 전통에서의 하나의 결정적 요소이기도 하다. 경험론은 반드시 긍정적 실증적인 것이 아니다. 기성 현실에 대한 경험론의 태도는 지식의 원천으로서, 또한 기본적인 준거기준으로서 기능하는 경험의 특수적 ‘자원’에 좌우되는 것이다.


이를 테면 감각론, 유물론은 절대 불가결한 본능적, 물질적인 욕구가 충족되지 않는 사회에 대해서는 본래 부정적인 듯이 보인다. 이에 반하여 언어분석의 경험론은 그러한 모순을 허용하지 않는 준거기준 속에서 움직이고, 지배적인 행동 세계에 대하여 스스로 부과한 제한은 본질적인 접근에도 불구하고, 미리 제한된 분석은 긍정적, 실증적인 사유의 힘에 굴복하게 되는 것이다.


이 언어분석의 본질적으로 이데올로기적 성격을 밝히면서 우리는 실증주의가 positivism는 것을 알아두자. positivism이라는 말이 처음으로 쓰인 것은 아마도 생 시몽 학파에 의해서라고 생각되는데, 그 이래 이 말에는 다음과 같은 의미 내용이 내포되어 있었다. 인식적 사유를 사실의 경험에 의해 확증하는것, 인식적 사유를 확실성과 정확성의 모델로서의 자연과학의 방향으로 돌리는 것, 지식의 진보는 이 방향 결정에 의존한다는 신앙등이다.


따라서 실증주의란 반계몽주의적, 퇴행적인 사유 양식으로서의 모든 형이상학, 선험론, 초월론, 관념론에 대한 투쟁이다. 주어진 현실이 과학적으로 이해되고 변형되는데 따라, 또한 사회가 산업적, 기술적으로 되는 데 따라 실증주의는 그 개념의 실현과 확증을 위한 매체를 사회 속에서 발견하게 된다. 철학적 사유는 긍정적 사유가 되고 철학적 비판은 사회적 구조 ‘안에서’ 비판하며 비실증적인 관념을 단순한 사변, 몽상 또는 공상이라고 비판한다.


생 시몽의 실증주의가 등장하기 시작하는 언설과 행동의 세계는 기술적인 현실 세계이다. 거기서는 객관세계가 도구로 변형되고 있다. 도구적 세계의 외부에 상존하는 많은 것은 이제 과학적, 기술적 진보의 도달권 내에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전에는 이성적 사유의 순수한 영역이었던 형이상학적 차원은 비이성적, 비과학적인 것으로 된다.




마르쿠제, 실증주의 비판


마르쿠제는 감각에만 의거에서 현실을 진리차원으로 끌어 올리려는 실증주의를 비판한다. 실증주의는 분석주의의 한 차원인데, 그 분석이라는 것은 명료함이나 확실함으로 사실을 드러낸다고 말한다. 그러나 명료함이라는 것은 헤겔의 입장에서 볼 때 역사 속에서 어떤 지짐에 나와 나의 사고가 위치해 있는 지를 아는 것이다. 분석철학자나 실증주의자 혹은 언어철학자들이 이야기하는 ‘언어’와 ‘논리’의 기술이 사실은 우리는 1차원적 인간으로 굳어지게 만드는 이데올로기를 이미 내포하고 있다고 말한다. 의미의 논리를 감각에서만 찾고 인간의 ‘부정성이 결국 변증법으로 찾아내는’ 총체성에서 찾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총체성이 없으면, 자신의 언어가 어디에서 근거하는지, 또한 어디로 나아가는지에 대한 관점을 찾아낼 수 없고 그것은 ‘철학’을 할 수 있는 단서를 애초에 제거해 버리는 효과를 드러내는 것이다.



철학, 목표


철학의 목표는 기성의 언설과 행동의 세계에 의한 노예 상태에서 사유를 해방시키고 기성체계의 부정적 성격을 해명하며 그 선택가능성을 투기하는 정도에 따르는 것이다. 확실히 철학은 사유의 내부에서만 모순을 일으키며 투기한다. 그것은 이데올로기다. 이 이데올로기적 성격은 어떠한 과학주의, 실증주의도 극복할 수 없는 철학의 운명이다. 더구나 그 이데올로기적 노력은 진실로 치료적일 수 있다. 전체주의 시대에서는, 치료로서의 철학의 과제는 하나의 정치적 과제로 될 것이다. 왜냐하면 기성의 일상언어의 세계는 전체적으로 조종되고 교화된 세계로 고착하는 경향을 갖기 때문이다. 그 때 정치는 철학에 있어서는 정치철학도 아니고, 훼손되지 않은 현실을 이해하려는 개념의 의향으로 나타날 것이다. 그 대신 사유를 왜곡된 일상적 언설의 세계로 봉쇄하는데 공헌한다면, 그것은 최선의 경우에도 전혀 불합리한 것이다. 최학의 경우에는 논쟁의 여지가 없는 비현실적 세계, 오직 현학적인 논쟁만을 야기하는 세계로의 도피가 될 것이다.



 마르쿠제, 생물학적 혁명


마르쿠제의 생물학적 혁명이론은 문명비판임과 동시에 해방이론으로서 그의 비판이론의 전개과정에서 아주 특징적인 것이다. 그의 생물학적 생명이론은 프로이트주의에 대한 재해석에서 나온 것이다. 그는 프로이트주의를 정신치료의 차원에서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사회이론이나 정신분석의 철학으로 격상시키고자 한다. 이를 통해 그는 현대문명을 비판할 뿐만 아니라,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의 가능성을 찾고자 한다. 마르쿠제의 생물학적 혁명이론은 검증될 수 없는 프로이트의 생물학주의 정신분석이론을 단순히 정신치료의 차원이 아니라, 사회이론이나 정신분석의 철학으로 격상시켜 현대문명을 철저히 비판할 뿐만 아니라, 현실적으로는 실현 불가능해 보이는 것을 신화적, 미학적 상상력에 기대어 억압으로부터 해방의 가능성을 모색하고 있다.


마르쿠제의 생물학적 혁명은 한 마디로 말해 문명을 본능의 억압의 산물로 보는 프로이트의 가설에서 출발하여 본능의 해방을 목표로 삼는 것이라할 수 있다. 이 본능 구조의 혁명이론은 마르쿠제의 사상적 흐름 전체를 통해서 볼 때 후기 사상에 속하는 것으로 가장 특징적인 것이다. 그리고 그의 사상에 대한 평가가 다양하지만, 염세적-유토피아적 비관론이라고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것은 특히 바로 그의 생물학적, 미학적 혁명론 때무인 듯하다. 마르쿠제의 비판이온은 프랑크푸르트학파의 다른 이론가들과 마찬가지로 현대 자본주의사회나 현대 문명에 대한 비판이다. 마르쿠제는 호르크하이머와 더불어 일직이 비판이론의 이념을 정립한 바 있었다. 비판이론은 단순히 지식을 증가시키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노예 상태로 부터해방시키는 것, 즉 모든 개인들의 행복을 지향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이를 위해 비판이론은 서구의 ‘전통이론’의 목표, 사유구조, 기능 등을 전반적으로 부정한다. 더 나아가 현대의 불행한 원인은 전통이론, 특히 실증쭈의적 사고방식에 있다고 본다.



마르쿠제, 방향


마르쿠제의 학문적 관심영역이나 이론적 성과는 아주 다양하고 풍부하지만, 그의 문명비판으로서 이성비판은 두 측면에서 요약할 수 있다. 그 하난느 근대 실증주의적 사고방식의 기초가 되었던 이성에 대한 비판이다.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는 이를 도구적 이성, 기술적 이성, 계몽적 이성, 주관적 이성으로 불렀다. 마르쿠제는 이러한 이성이 사회적으로 작용되는 원리를 전통적 합리성과 구별되는 새로운 합리성으로서 ‘기술적 합리성’이라 부른다. 이 원리가 기계화, 산업화의 추동력이요, 나아가 사회 전체를 운용하는 기본 원리가 된다. 그 결과 개성의 획일화나 개인의 사고의 단순화를 가져오고, 사회는 이 원리의 지배를 받음으로써 ‘전면적으로 관리되는’ 전체주의적이고 권위주의적인 업압의 체제로 된다는 것이다. 마르쿠제의 관점에서 보면, 이 점은 과거 소비에트 체제도 예외는 아니었다.


마르쿠제 이성 비판의 다른 하나는 근대사회가 기술적 합리성에 지배당함으로써 근대인이 상실한 또 하나의 이성 능력을 회복하자는 것이다. 기술적합리성은 자기보존과 이를 위한 효율성, 생산성을 지배적인 원리로 삼기 때문에 현실에 대해 긍정적 역할을 한다. 그러나 이 긍정은 역설적으로 인간을 전면적이고 철저하게 지배하고 관리하는 결과를 낳는다는 점에서 부정적이다. 그는 인간의 이성은 현실 긍정의 기능과 함께 부정적 현실태에 대한 반성, 비판, 부정의 능력도 지니고 있다는 점을 역할한다. 요컨대 이성의 부정성 회복을 현실적 모순 극복의 돌파구로 보았다. 이 지점에서 바로 일차원적 인간, 일차원적 사회, 위대한 거부, 부정성이 등장한다.


마르쿠제의 이성의 부정성 회복에 대한 논거는 그의 헤겔 변증법의 재해석에 있다. 그의 헤겔 수용, 특히 이성의 부정성을 강조하는 변증법의 주관주의적 해석은 일찍이 1930년의 ‘변증법의 문제, 이성과 혁명’의 서론인 1940년의 ‘해결철학 서론, ‘헤겔수용의 결정판인 1941년 ‘이성과 혁명’, 그리고 ‘일차원적 인간’에 잘 드러나 있다.




민네이션, 부정하는 힘


주어진 상황은 시간의 곡선에서 흘러가고 있다. 인간은 이러한 상황과 조건에 따라서 흘러가고 그대로 반응하면서 삶을 ‘순응적’으로 살 수 있다. 그러나 계몽의 변증법이나 부정의 변증법에서 나오는 것처럼 이러한 흘러감을 멈추는 것이 바로 1차원을 넘어서는 ‘부정적’사유이고 ‘비판적사고’라고 할 수 있다. 흘러가는 것을 일단은 ‘시선, 사고, 역사’에서 멈추고 불러 세워서 정말로 그러한지를 물어보고 그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이 바로 부정의 변증법인 것이다.


우리가 진정으로 사고하기 시작할 때 사물의 관성은 멈추기 시작한다. 크리스나무르티가 이야기한 것처럼 관성은 이성의 부정성에 의해서 멈출수도 있다. 긍정이라는 것은 비판하지 않는다는 것이고, 비판하지 않는다는 것은 주어진대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비판학파가 고민하는 부분은 바로 이러한 부분이다. 긍정할 수 밖에 없는 논리가 아니라 긍정하게 되어 있는 인간의 기본적인 사고체계가 사실은 변증법에 의해서 고차원으로 발전할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고차원으로 올라가는 방식이 바로 비판적 사유라는 것이다. 긍정하는 인간의 인식체계를 가지고 ‘상황, 사태, 사건’을 만들어내는 그 당시의 기술복제시대에 대해서 비판학파는 비판하기 때문에 인식이 바뀌고, 새로운 상상이 시작되고, 그에 따른 새로운 실제 세계를 만들어내야 한다는 것이다.



민네이션, 동일률


메타언어가 없다면 지금 현재 주어지는 언어의 의미는 밝혀지지 않는다. 실증주의가 가지고 있는 문제는 새로운 무엇을 만들어낼 수 없다는 것이다. 무엇인가 만들어내는 사람들을 우상으로 만들어버리는 것도 역시 하나의 ‘의도’가 숨겨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동일률’로 그러니까 같은 것들을 찾아내는 것은 사실 ‘다른 것’들에 대한 이해와 연결이 없기 때문에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것 혹은 진보적인 노선보다는 이미 있던 것들을 더욱 확실하게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태양이 지금 여기 떠 있다’라고 할 때 태양이 진짜 여기에 떠 있다는 것을 확인하면 된다’는 것이 실증주의라면, 그것은 사실 전체를 보지 못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태양이 여기 떠 있지 않을 때는 어떤 상황인지를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깐 결국 실증주의는 어느시점에서 나오는 것이지 처음부터 실증주의를 가질 수는 없다는 것이다. 문제는 처음부터 자신이 실증주의적인 혹은 실증적인 접근을 하지 않고서 나중에 ‘방법론’으로 실증주의를 상용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다음에 오는, 새로운 세대에게는 처음부터 실증주의적으로만 세상을 보게 인도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다음 세대는 전혀 새로운 것을 만들어낼 수 없다. 동일률을 찾으려면 차이를 먼저 찾아야 한다. 이 차이를 찾는 것이 바로 부정성이라고 할 수 있다.



민네이션, 4차 산업혁명


마르쿠제가 분석하는 시대는 2차산업을 중심으로 하는 산업사회였다. 따라서 제조업을 중심으로 하는 소품종 소량생산이 지배적이고, 효율성을 중심으로 하는 산업과 시대적 상황이 기반되어 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3차 산업을 넘어서 4차 산업의 시대적인 변화들이 예상되고 있다. 시대적인 변화는 새로운 기술과 문화 그리고 사람들의 생각의 변화로 이어지기도하고 또 영향을 주기도 한다. 우리는 새로운 테그놀러지의 세계에 새로운 시대정신을 찾아야 한다.



민네이션, 긍정


나는 다소 긍정의 사유를 즐겨한다. 낙천적이라고 생각하는데, 마르쿠제가 말하는 것처럼 긍정적인 것으로 모든 것을 덮어 버리거나 더는 나아가지 못하게 만드는 합리화는 아닌지 돌아보게 된다. 반드시 나를 다시 돌아보는 '1 to 0'의 시간이 필요하고 그로부터 긍정적이고 창조적인 사고인 '0 to 1'의 시간이 도래하는 것을 경험한다. 긍정이 필요한 시기가 있고, 부정이 필요한 시기가 있다. 더욱 인간다워지기 위해서 다시 사유의 시작으로 돌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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