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쿠제 일차원적 인간 3장, 4장_임경석
20180726_철학아카데미
마르쿠제 일차원적 인간_임경석
제 3장 불행한 의식의 극복_억압적인 탈승화
제 4장 언설세계의 폐쇄
들어가기
지금까지 선진 산업사회의 정치적 통합, 즉 기술적인 생산력의 증대와 인간 및 자연에 대한 지배의 확대로 달성할 수 있었던 성과에 대하여 검토해 왔다. 다음에는 그것에 대응하는 문화영역의 통합을 다루어 보기로 하자.
제 3장에서 문학의 몇 가지 기본적인 개념과 이미지 및 그것들의 운명을 사례로 기술적인 합리성의 진보가 ‘고급문화’의 반항적, 초월적인 요소를 어떻게 일소하는가를 밝혀볼 것이다. 사실 그것들은 현대 사회의 선진 영역에 지배적인 탈승화 과정에 굴복한다. 그러므로 인간의 의식은 1차원적 의식에 머무르며 불행한 의식이 승화를 경험하지 못하게 된다. 마르쿠제는 이것을 극복하기 위한 고급문화의 부정성에 관심을 둔다.
제 4장에서는 순응하는 1차원적 세계에서는 언설세계가 폐쇄되는데 자신의 언어로 현실을 표현하지 못하고 구조에 순응한, 억압당한 1차원적 언어만 지배하게 되는 언설세계의 폐쇄를 경험하게 된다.
사회, 성과
이 사회의 성과 및 실패는 함께 그 고급문화의 효력을 상실케 한다. 자율적인 퍼스낼러티, 휴머니즘, 비극적이고 로맨틱한 사랑 등에 대한 찬양은 후진적인 발전단계의 이상인 것처럼 보인다.
현재 일어나고 있는 것은 고급문화가 대중문화로 퇴보하는 것이 아니고, 현실에 의해 고급문화가 논박되어는 것이다. 현실이 그 문화를 능가한다. 현대인은 문화의 영웅이나 반식이 하는 것 ‘이상’의 일을 할 수 있으며, 그는 과거에 해결할 수 없었던 많은 문제를 해결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고급문화의 승화 속에 보존되어 있던 희망을 버리고 진리를 파괴하기도 한다. 물론 어떤 시대에나 고급문화는 사회적 현실과 모순되었다. 그리고 특권적 소수자만이 그 헤택을 입었고, 그 이상을 대변했다.
사회의 적대적인 이 두영역은 항상 병존했다. 그러므로 고급문화는 언제나 현실을 순응시키려 해왔으나, 현실은 고급문화의 이상과 진리에 거의 방해받지 않았다.
현대의 새로운 특징은 고급문화의 반항적, 이질적, 초월적인 요소(고급문화를 현실의 또 하나의 차원으로 삼고 있던 요소)를 말살함으로써 문화와 사회적 현실간의 대립항쟁을 일소한다는 점에 있다.
이차원적 문화의 청산은 ‘문화가치’가 부정되고 거절당하는 데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문화 가치가 기존 질서에 무차별하게 편입되고, 그것이 대규모로 재생산, 과시되는 데서 발생한다.
문화, 기능
실제로 문화가치는 사회적 결집social cohension의 도구로서 기여한다. 자유로운 문학과 미술의 위대함, 휴머니즘의 이상, 개인의 슬픔과 기쁨, 퍼스낼리티의 실현 등은 동과 서의 경쟁적 투쟁에서 중요한 항목이 된다. 이들 가치는 공산주의의 현재 형태에 대하여 격렬히 비난하면서, 또한 일상적으로 과니로디며 판매된다. 그러한 가치가 그것을 매매하는 사회와 모순된다는 사시른 문제가 되지 않는다.
자유, 완성 등의 심원한 말들이 선거운동 중인 지도자와 정치가들에 의해 영화나 라디오, 텔레비전에서 발언되면, 그 말은 의미없는 소리로 변질되고 선전, 사업, 수양, 기분전환의 문맥으로만 의미를 갖게 된다.
이러한 이상과 현실의 동화는, 이상이 능가한 정도를 증명한다. 이상은 영혼, 정신 또는 내면적 인간의 승화된 영역에서 끌어내려져 조작적인 용어로 문체로 번역된다. 여기에 대중문화의 진보적 요소가 있다. 이도착이 제시하는 것은 선진 산업사회가 이상의 물질화 가능성에 직면하고 있다는 사실을 설명한다. 이 사회의 잠재 능력은 인간의 조건이 표현되고 이상화되고 고바로디는 승화된 영역을 점차 감소시키고 있다. 고급문화는 물질문화의 일부가 되고, 이와 같이 변형됨으로써 그 진리의 대부분을 상실한다.
서양문화, 고급문화 특징
서양 고급문화는 그 도덕적, 미적, 지적 가치를 산업사회는 지금도 공적으로는 신봉하고 있지만 연대적으로도 기능적으로도 기술 이전단계의 문화였다. 그 타당성의 원천이 되었던 것은, 엄밀하게 말하면서 기술적인 사회에 의해 무효화되었기 때문에 이미 존재하지 않으며, 단지 되찰을 수 도 없는 세계의 경험이다.
뿐만 아니라 가장 지속적인 정식화의 몇가지가 부르주아 시대를 통하여 부여되엇을 때에도, 고급문화에는 여전히 봉건적 문화의 색채가 강했다. 고급문화가 봉건적이었던 한가지 이유는 그것이 특권적 소수자의 문화에 한정되어 있었기 때문이고 이 문화에 본래적인 로맨틱한 요소가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이 문화의 진지한 작품이 상업 및 산업의 영역으로부터, 그리고 타산적이고 이윤을 얻어낼 수 있는 질서로부터 의식적이고 조직적인 소외를 표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르크스, 소외
마르크스의 소외개념은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인간 자신 및 일에 대한 관계를 나타내고 있으나, 이와는 대조적으로 예술적 소외artistic alienation는 소외된 생활의 의식적 초월이다.
다른 말로 바꾸면, 그것은 ‘보다 고차적 수준’의 소외, 또는 매개된 소외이다. 진보된 세계와 충돌, 비즈니스 질서의 거부, 부르주아적인 문화, 미술에서의 반부르주적인 요소 등은 이 질서의 미적 저송성의 결과도 아니고, 로맨틱한 반봉의 결과도 아니다.
로맨틱이란 말은 정중한 중상의 말로써 이방가르트적 자세를 비난하는데 안이하게 쓰이지만, 그 점은 마치 데카당 이라는 용오가 퇴폐의 실제 요인보다도 사멸해 가는 문화의 순수하게 진보적인 특질을 보다 빈번하게 고발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예술을 특징짓는 결정적인 구별은 즐거움 속에 창조된 예술과 슬픔 속에 창조된 예술과의 또는 정기와 신경증간의 심리학적 구별이 아니라 에술적 현실과 사회적 현실간의 구별이다. 마술적 위배이든 혹은 합리적인 위배이든 간에 사회적 현실로부터의 단절은 가장 긍정적인 예술에 있어서도 그 본질적 특성이 되고 있다.
게다가 이 긍정적인 예술은 그것이 표현되는 민중 자체로부터도 소외된다. 사원과 대성당이 그 주위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에게 아무리 가깝고 친숙한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들은 노예, 농민, 기술공의 일상생활과는 역시 대조적으로 다른 것이며, 공포를 품게 하거나 마음을 고양시키는 일이다.
예술, 부정성
예술은 의식화되었든 그렇지 않든 부정의 합리화를 내포한다. 그 진보된 상태에서는, 그것이 위대한 거절이다. 인간과 사물을 등장시키고, 노래허가나 소리 지르거나 말하게 하는 양식은, 인간과 사물이 사실로서 현존하고 있는 방식을 논파하고 파괴하고 재창조하는 양식이다.
그러나 한판 이들 부정의 양식은, 그것이 관련을 맺는 적대적 사회에 찬사를 보낸다. 사회가 자기와 그 궁상을 재생산하는 노동의영역에서 동떨어져 있기 때문에, 부정의 양식이 창조하는 예술세계는 아무리 진실을 내포하더라도 역시 하나의 특권적 위치, 하나의 환상으로 존재한다.
예술과 일상의 요구간의 이 본질적인 간극은 예술적 소외에서 개방되어 왔지만, 진보하는 기술적 사회에 의해 점차 폐쇄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의 폐쇄와 더불어 다음에는 위대한거절이 거부되고 다른차원이 지배적인 사태에 흡수된다. 소외에 의한 작품은 그 자체가 이 사회에 편입되고 지배적 사태를 장식하거나 정신분석하는 장치의 중요 부분으로서 유통된다. 이리하여 그것은 커머셜이 된다. 판매되고 위안을 주고 흥분시키는 것이 된다.
예술적 소외는 부정의 다른 의식과 함께 기술적인 합리성의 과정에 굴북한다. 기술 진보의 결과로 볼 때 이 변화의 깊이와 그 불가역성의 정동가 분명해진다. 현재 단계는 인간과 자연의 가능성을 그 실현을 위해 이용할 수 있는 새로운 수단을 따라 재규정한다. 그리고 이 가능성에 비추어 기술 이전의 이미는 그 힘을 상실하고 있다.
이러한 비판을 바탕으로 부정성을 회복시켜서 모순을 극복하는 방식으로 예술을 통한 일차원적 인간의 극복을 이야기하고 있다.
로고스, 모순
분명히 세계의 물질적 변형은 그 심벌, 이미지 및 관념의 정신적 변형을 수반한다. 도시와 고속도로와 국립공원이 농촌과 계곡과 숲으로 대치될 때, 모터보트가 호수 위를 달리고 비행기가 하늘을 가로지를 때 그 때에는 분명히 이들 지역은 이질의 현실로서의 성격, 모순의 영역으로서 성격을 상실하는 것이다.
모순은 로고스 작용을 통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는 것과 합리적으로 대결시켜서 전달 매체를 가져야 한다. 이 매체를 위한 싸움, 또는 그것이 지배적인 일차원성에 흡수되는데 반대하는 싸움은 소원성을 만들어 냄으로써 또다시 예술적 진리를 전달 가능케 하려는 전위적인 노력으로 나타난다.
베르톨트 브레히트는 이러한 노력의 이론적 기초를 스케치했다. 기성 사회의 전체적 성격은 극작가에게 다음과 같은 문제를 제기한다. 즉 ‘현대세계를 연극으로 표현한다’(다시말해 각복이 전해야 할 진리를 관객이 인정하도록 표현한다)는 것이 여전히 가능한가라는 문제이다.
브레히트는 이렇게 대답한다. 현대세계가 그렇게 표현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변혁을 모면할 수 없는 것으로 , 부정되어야 할 부정성의 상태로서 표현되는 때에 한정된다고.
행복한 의식, 극복
분명히 행복한 의식의 영역에는 죄악감이 존재할 여지가 없으며, 계산이 양심을 배제한다. 전체가 위험하게 될 때에는 전체를 거부하거나 혹은 방어하지 않는 것 이외에는 죄가 되지 않는다.
범죄, 죄악, 죄의식은 개인적인 일이 된다. 프로이트는 개인의 영혼 속에서 인류의 죄를 밝혀내고 개인의 증례기록에서 전체의 역사를 밝혀냈다.
이같은 실로 불길한 유대는 훌륭하게 억압되고 있다. 자기를 전체와 동일화하는 자, 전체의 지도자와 방위자로 임명되는 자가 오류를 범할 수는 있으나, 나쁜 일을 행할 수는 없다.
그들은 죄를 범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또다시 유죄가 될 수 있는 것은, 이 동일화가 더 이상 지속되지 못할 때, 그들이 이 세상에서 사라질때일 것이다.
순응주의, 언설세계
“역사적 현상에서 모든 정치적 에크리튜르(표현)이 경찰세계를 확증할 수 밖에 없듯이, 모든 지식인적 에크리튜르는 감히 이름을 밝히지는 않으나 유사문학을 생산할 수 밖에 없다”_롤랑바르트 ‘빙점의 에크리튜르’
바르트의 이야기는 작가들이 현실적인 구조에 갖히게 될 경우, 누군가로부터 감시를 당하게 될 경우 그의 문학은 진실한 문학이 아니라 가짜문학, 가짜 언어를 만들어낼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행복한 의식은 현실적인 것은 이성적이고 체제는 기대에 어긋나지 않는다는 신념이다. 이러한 행복한 의식은 새로운 체제 순응주의conformism을 반영한다. 이것은 사회적 행동주의로 번역된 기술적 합리성의 한 단면이다. 그것은 지금까지 유례가 없었을 만큼 합리적이므로 새로운 것이다.
이것에 의해 지탱되는 사회는 종래의 여러 단계보다 원시적 비합리성을 감소시켰고 이전보다도 훨씬 계획적으로 수명을 연장하고 생활을 개선시킨다. 인류 전멸의 전쟁은 아직 일어나지 ㅇ낳았고 나치의 유태인 근절의 수용소는 폐기되었다. 고문은 또다시 일상다반사로 도입되기에 이르렀으나, 그것은 문명세계의 변두리 지역에서 일어나는 식민지 전쟁에서의 일이다.
이 사회가 획득한 인간을 지배하는 히은, 나날이 그 능률과 생산성으로 인해 죄를 면한다. 만일 그 힘이 손에 닿는 모든 것들을 동화하고 대립ㅇ르 흡수하고 모순을 조종한다면 그것에 의해 증명되는 것은 문화적 우월성이다.
마찬가지 방식으로 해서 자연을 파괴하고 낭비가 만연하는 것은 풍요함과 ‘고도의 복지’를 증명한다. ‘이 사회는 그런 것을 돌아볼 필요도 없이 너무도 잘 살고 있다’_John Galbraith
전면적 관리, 언어
이런 종류의 안녕과 복지, 사회의 불행한 토대 위에 서 있는 이러한 생산적 상부구조는 지배자와 종속자 사이를 매개하는 ‘미디어’에도 침투한다. 그 광고 대행자가 만들어내는 커뮤니케이션 세계에는 일차원적인 태도와 행동이 표현된다.
그 언어에는 동일화와 통합, 긍정적인 사유와 행동의 조직적 촉진, 초월적이고 비판적인 관념에 대한 일제공격이 표명되어 있으며, 폭넓게 일밙거으로 쓰이는 이야기 방식에는 2차원적 변증법적 사고양식과 기술적 태도, 행동 또는 사회적 사고 습관 사이의 대비가 나타난다.
이러한 사고습관의 표현에는 현상과 실재, 사실과 요인, 실체와 속성과의 긴장관계가 사라지는 경향이 보인다. 자율, 발견, 증명, 비판 등의 요소들은 지시, 주장, 모방 등의 앞에서 영향력이 약해진다. 마술적이고 권위주의적이며 의식적인 요소가 말과 언어에 침투한다.
언설discourse에서는 인식과 인식에 의한 평가가치 과정의 단계인 매개가 배제되고, 사실을 파악하고 그것으로 사실을 초월하는 개념들은 진지한 언어적 표현을 상실해 간다. 이러한 매개가 제거되면, 언어는 이성과 사실, 진리와 기성의 진리, 본질과 존재, 사물과 그 기능의 직접적 무매개적인 동일화를 표현하고 촉진하는 방햐으로 기울어지는 것이다.
조작주의operationailsm의 한가지 특징으로 나타났던 이러한 동일화는 사회적 태도, 행동에서의 언설의 특징으로 재현된다. 이 때에 언어의 기능화는 말의 구조와 운동에서 비획일적 요소들을 몰아내는데 조력하게 된다.
어휘와 구문도 마찬가지로 그 영향을 받는다. 사회가 그 요구를 직접 언어학적 소재로 표현하는 것은 대립이 배제되는 것은 아니다. 대중 언어는 악의적이고 반항적 유머를 통하여 공적인 또는 준공적인 언설을 공박한다.
민네이션, 문화
마르쿠제는 마르크스의 이론을 가지고 와서 문화 자체를 비평하기 시작한다. 그것은 고급문화를 누리기 위해서는 교환가치로서의 자본이 필요했던 것이다. 자본이 없으면 고급문화를 누리지 못하는 사회 구조에서는 문화적인 가치를 공유하느냐가 계급을 결정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마르쿠제는 자본주의에 기반한 일차원적 고급문화를 비판한다. 그리고 이러한 문화가 가지고 있는 문제점을 들여다보고 그것이 우리에게 어떤 것들을 주고 뺏는지를 보게 된다.
문화를 누리기 못하는 사람들은 소외를 당하게 된다. 마르크스가 말하는 노동과 상품의 변증법을 통해서 개인적으로 상품과 소외되고 사회적으로 계급적인 소회를 당하는 부분이 발생한다. 그러나 마르크스가 말하는 것은 노동의 소외이다. 마르크스의 소외의 단계는 ‘생산관계에서 소외-생산물과 소외-인간들 간의 소외-유적존재의 소외’로 구성된다.
마르쿠제는 문화적 소외를 이야기한다. 문화는 같은 정체성과 하나의 의식을 통해서 연대를 가능하게 하는데, 문화적 공유가 자본에 의해서 가로막히게 되면 연대에서 소외되고 인간종에서 벗어나게 된다. 그렇게 되면 인간 자체가 문화적으로 소외되면서 결국은 우울증에 빠지게 된다. 문화를 통해서 연대성을 살릴 수도 있지만, 문화를 통해서 소외를 경험할수도 있는 것이다.
민네이션, 부정성
마르쿠제는 왜 예술적 소외를 말하는가? 그것은 문화가 가지고 있는 연대의식을 회복시켜서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문제가 있다. 그것은 발터벤야민이 이야기했던 것처럼 ‘정치의 예술화와 예술의 정치화’가 되어 버리는 프로파간다의 위험이다.
이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마르쿠제는 프랑크푸르트학파 답게 ‘부정성’을 가지고 변증법을 부정의 변증법으로 가지고 온다. 따라서 모든 사람들이 자신이 누리는 예술에 대해서 부정의 변증법을 가지고 접근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부정성을 변증법적으로 완성하지 못하면 불행한 의식이 된다. 부정하는 힘을 끊임없이, 모순을 끊임없이 부둥켜 않고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를 고민하는 이성의 능력이 바로 행복한 의식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민네이션, 도전
나는 왜 공부를 하는가? 나는 왜 이러한 철학을 고민하면서 저녁을 보내고 있는가?
이것들을 공부하는 것들이 나에게 어떤 의미를 주는가? 다시 한번 돌아보는 부정성을 꺼낸다. 나에게 있는 모순은 무엇인가? 내가 다다르고 싶은 목적은 무엇인가?
포이어바흐 테제 11번을 기억한다 ‘지금까지 철학자들은 세계를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해 왔다. 그러나 문제는 세상을 어떻게 변화시킬 것인가?이다’ 바로 이것이다. 내가 공부를 하는 이유는,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서이다.
새로운 방법으로 그러나 진실하게, 더없이 솔찍하고 기쁘게 시스템을 바꾸고 여유와 낭만이 있는 삶을 만들어내기 위해서 나는 다시 도전한다.
마르쿠제가 말하는 것처럼 언설세계가 1차원에 머물지 않을려면 나는 다시 도전해야하고, 다시 날개짓을 해야 한다. 부정성을 살리고 비판하고 다시 생각하고 만들어내야 한다.
민네이션, 언어세계
마르쿠제는 언어가 인간의 사고를 구성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언어는 현실을 반영하기 때문에 사물들 간의 관계와 사물에 대한 개념을 내포하고 있다. 1차원적 인간의 의식에서는 이러한 언어세계가 사물과 개념이 제대로 연결되어 있지 않다.
그것은 새로운 부정성을 내포하거나 물질과 개념의 정당한 연결을 만들어낸다던지 하는 도전이 제대로 되고 있지 않다. 언어는 효율성에 지배를 받으면서 주류적인 언어에 자신의 생각을 싣는다.
당연히 자신의 언어, 자신의 목소리, 자신의 인식이 담기지 않는다. 그러므로 결론적으로 언설세계과 폐쇄되고 인간은 1차원적으로 전락하게 된다.
1차원적 언어는 1차원적 인간을 만들어 낸다. 1차원적 인간이란 부정성을 가지지 못해서 변증법의 흐름을 타지 못하고 승화작용을 하지 못해서 결국은 한 차원에만 머무르게 되는 것을 말한다.
대학은 이러한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서 비판적인 사고를 통해서 사회를 더 깨끗하고 현실적으로 보고 변화를 만들어내도록 해야하는데 그러지 못하는 것이다.
나는 나의 언어를 다시 찾아야 한다. 내가 보는 연결방식을 찾아야 한다. 나의 목소리를 찾고 나의 인식을 찾아야 한다. 가장 나다운 것은 1차원성을 벗어나서 부정성을 가지고 사태를 벗어나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비판의식을 가지게 될 때마다 관성을 벗어나는 것을 경험하지 않는가?
마르쿠제는 일차원적인 사고, 행동, 언어, 문화, 이데올로기, 철학에서 우리를 벗어나게 하기 위해서 새로운 유토피아의 비전을 던저 주는 것은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