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트비히 포이어바흐와 독일고전철학의 종말 4_박정하
20180723_철학아카데미
루트비히 포이어바흐와 독일고전철학의 종말 4_박정하
4장 시민사회, 시장, 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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엥겔스와 마르크스시대가 도래하면서 청년헤겔주의자들이 우파와 좌파로 나누어진다. 우파는 체계를 만들어가는 진리로서의 변증법을 종지부 찍는가 하면 우파는 계속해서 변화하는 운동성을 강조하면서 그 세력을 키워나간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헤겔이 가지고 있는 정신현상학을 다시 해석한다. 그것은 개념이 변증법을 거치면서 ‘정-반-합’의 상승작용을 통해서 절대성을 가진 진리로 발전한다는 것에 도전하는 것이다. 이런식의 개념의 변증법은 자신을 넘어서서 자연과 사물을 해석하고 소유하고 다시 자기로 돌아오는 동일자의 논리라는 것이 그 비판이다. 그런데 자기화하는 것에 대한 비판이라기 보다는 자연자체를 지배하는 논리로서 개념의 변증법을 부정하는 것이다.
오히려 유물론적인 변증법을 주장하면서 인간의 정신이 물질들의 변증법에 의해서 변화한다는 것을 주장한다. 인간은 구조의 결과라는 것이 여기서 나오는 것이다.
이러한 유물론적 변증법을 완성한 엥겔스와 마르크스는 이제 이러한 원리를 가지고 사회를 분석하고 사회를 전복시킬 이론들을 만들어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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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시간 3강 강의내용은 위의 링크 참조
계급, 경제
계급들의 관계는 어떻게 생겨났는가? 비록 이전의 봉건적이었던 대토지 소유의 기원이야 일견 정치적 원인, 즉 강제적 약탈로 돌릴 수 있었다 하더라도,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탈리아트를 두고 말할 때엔느 더 이상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
이 양대 계급의 발생과 발전이 순전히 경제적인 원인에 의하여 규정되었다는 것은 너무도 명백했다. 그리고 지주와 부르주아지 간의 투쟁도 바로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 간의 투쟁에 못지 않게 무엇보다도 먼저 경제적 이해관계를 둘러싸고 일어났으며, 정치적 권력은 다만 이 경제적 이해 관계의 실현 수단에 불과했다는 점도 그 만큼 명로해졌다.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탈리아트는 모두 경제적 관계,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생산 양식에서 일어난 변화의 결과로 발생했다. 이 두 계급은 처음에는 동업조합적 수공업으로부터 메뉴팩처로의 이행에 의하여, 다음에는 메뉴팩처로부터 증기와 기계로 장비된 대공업으로의 이행에 의하여 발전했다.
일정한 발전 단계에 이르러 부르주아지에 의하여 운영되는 새로운 생산력과 이로 인하여 발전한 교환 조건과 교환에 대한 요구는 역사적으로 전승되고 법률에 의하여 신성화된 기존의 생산제도, 다시 말해서 봉건적 사회제도에 고유한 동업조합적 특권이 없는 신분에게는 역시 마찬가지로 헤아릴 수 없는 질곡이었다.
부르주아지가 대표하는 생산력은 봉건적 토지 소유자와 동업조합 장인이 대표하는 생산제도를 반대하여 궐기하였다. 투쟁결과는 주지하는 바와 같이 영국에서는 점진적으로, 프랑스에서는 일거에 봉건적 질곡의 타파로 나타났다. 그리고 독이레서는 아직도 그 과정이 끝나지 않았다.
시민, 사회
1. 칸트까지 시민사회라는 개념은 매우 긍정적인 단어였다. 시민사회와 반대로 ‘자연 상태’는 항상 욕망과 폭력이 넘실대는 곳이었다. 그러힉 때문에 근대칸트까지 오면 국가권력으로서 ‘법과 권력’을 가진 시민사회가 국가 개념을 대신한다. 이 때까지만 해도 자본주의양식이 그다지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에 국가와 시민사회의 구분이 없었다.
2. 헤겔에서부터는 ‘시민사회’는 ‘시장’을 의미하는 것이 되었다. 19세기에는 자본주의가 발전하면서 시장은 타락하였고 항상 문제를 만드는 곳이었다. 따라서 헤겔에게는 도덕적인 국가가 이러한 시민사회를 다스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3. 20세기에 와서는 시민권의 개념이 등장하면서 비로소 오늘날의 ‘시민사회’의 개념을 가지게 된다. 그람시의 의해서 헤게모니를 갖는 집단의식으로소 시민권이 제시되었다. 이때는 국가/시민사회/시장으로 나누어진다. 국가는 권력과 정부, 정치의 영역을 대변하고 시장은 경제와 자본을, 시민사회는 사회와 문화를 그람시가 말하는 헤게모니에 의해서 유지하고 영향력을 미치게 되었다.
오늘 우리가 보고 있는 헤겔과 마르크스, 엥겔스가 이야기하는 시민사회는 2번째 의미에서 시장으로서의 시민사회를 말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이러한 시민사회를 노동자들이 바꾸는 주체가 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당연히 시장을 그렇게 바꾸어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마르크스, 이데올로기 개념
마르크스가 말하는 이데올로기라는 단어는 그 당시로 보면 약간 다른 느낌이다. 프랑스에서 처음 사용된 이데올로기의 사용새는 잘못된 의식, 허위의식을 이야기했다. 왕 옆에 붙어서 판단을 흐리게 만드는 아첨과 같은 말이 이데올로기였다.
시간이 어느정도 지나면서 처음 이데올로기가 가지고 있는 내용이 계급과 연결되면서 이념’이라는 말로 사용되었다. 이것은 중립적인 의미에서 가치와 고귀한 어떤 의미를 준다는 것과 연결된다.
마르크스가 비판한 것은 첫번째 이야기한 허위의식으로서의 이데올로기다. 사회적의식 차원의 맥락에서 말할 때 시장, 시민사회는 허위가 지배하는 세상이었고 이것들을 바 꿀 수 있는 것은 사회적 의식의 고차원일 때만 가능했었다.
주체, 역사의 발전
계몽주의에서는 주체의 확립이 일어난 시작이었다고 볼 수 있다. 당연히 칸트가 이성과 자율과 연결해서 ‘자기 이성을 자율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용기’가 바로 주체라고 했다.
주체는 개인도 있고, 자연도 있다. 자율을 이루면서도 조화가 일어나야 한다. 또한 이성에 의해서 이러한 조화는 계속 진보하면서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간다.
서양철학은 계몽주의 확립- 자연- 조화-진보의 순서로 발달하였다. 이것이 발달하는 주요한 원인은 바로 ‘주체의 문제’를 고민하였기 때문이다.
주체로서 자율성을 가지고 이성을 발전시켜가면서 자연스럽게 자연인 객체를 어떻게 이해하고 다룰 것인가가 고민이 된다. 또한 그러한 자연과의 관계에서 인간 정신이 어떤 지점에 있는지 우위에 있는지 양립하는지를 고민하게 되고 여기서 사회철학과 정치철학 그리고 계약론이나 국가, 시장의 개념이 완성되어 간다.
이렇게 정리된 개념에서 이제 시간에 따라서 4차원 이상으로 사물들과 관계가, 인간간의 관계가 어떻게 운동하는지에 대한 진보의 문제를 다루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역사가 ‘주체’를 중심으로 발전해 온 계몽주의의 근대 흐름이다.
마르크스, 법칙
법칙이 가지고 있는 특징은 필연성이다. 역사의 진행은 그렇다면 필연적인가 결정되어 있는가? 인간의 자유에 있어서 주체적 실천은 허구인가? 역사의 법칙은 조건적인가 아니면 무조건적인가? 이런 고민이 생길 수 있다. 법칙적 역사이해의 대표가 바로 마르크스의 역사 유물론이라고 할 수 있다.
-쟁점1, 법칙이 지배하는가? 역사주의의 문제
역사주의의 주장은 19세기 과학주의의 산물이 바로 법칙이라고 한다. 개인의 활동으로 환원할 수 없는 사회 전체가 존재한다. 사회 전체의 발전을 지배하는 역사 법칙이 존재한다. 역사에도 자연에서처럼 인간의 의지로부터 독립된 필연적인 법칙이 있다. 인간은 변화를 능동적으로 추구할 수 없다.
역사법칙에 기초하여 미래에 대한 예측이 가능하며, 이것이 사회과학의 목표이다. 역사의 법칙을 발견하는 것이 사회과학의 목표이며, 역사의 법칙이 우리의 정치를 지도해야 한다.
이에 대한 비판은 역사의 진행과정에 대한 법칙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한 역사의 사건은 일회적인 사건이기에 반복되는 것은 아니다. 사실과 결단을 구분하지 않는 태도가 문제이다. 결단은 사실과 관계하지는 하지만 사실에서 나올 수 없다.
마르크스, 역사적 변증법
마르크스가 생각하기에 사회의 발전은 자연사적 과정이라고 생각했다. “현대사회의 경제적 운동법칙을 드러내는 것이 이 책의 궁극적 목적인데, 비록 한 사회가 자기 운동이 자연 법칙에 대한 실마리를 발견했다고 할지라도 자연적인 발전 단계들을 뛰어넘을 수도 없으며, 그것들을 제거하도록 명령을 내릴 수도 없다. 그러나 사회는 출산의 고통을 단축시키고 완화시킬 수는 있다.”_자본 1권.
역사의 발전은 5단계로 발전한다 그것은 ‘아시아적 혹은 원시공산제 사회-고대 노예제-중세봉건제-자본주의-공산주의’로 본다.
핵심쟁점, 역사 법칙
과연 법칙이 존재할 수 있는가? 미래는 열려 있다고 보면 카오스 이론, 비선형적 과정, 불화실성, 통제 불가능성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역사의 사건은 일회적인 사건이기에 반복되는 것은 아니다.
역사법칙이 보편적인가? 어디까지 적용되어야 하는가? 예외적인 경우가 더 많다. 사회 변화에서 외적인 영향력을 무시하고 있다. 전제는 물질적 자기 운동이며, 운동은 내적 모순의 발생과 해소 과정이다. 외적 영향력은 내적 발전을 촉진시키거나 지연시키는 것이다.
사시로가 결단의 혼동이 쟁점이다. 결단은 사실과 관계하지만 사실에서 나오는 것은 아니다. 역사주의는 개인의 수동성을 조장하고 개혁 활동을 약화시켜 실천성을 약화시킬 우려가 있다. 법칙은 표현상의 문제가 아닌가? 내일은 문제가 해결될 것이다일까 아니면 문제를 해결하겠다인가?
-쟁점2, 어떤 법칙이 지배하는가? 정치결정론의 문제
경제 결정론, 법칙
역사를 지배하는 법칙은 경제적이다. 그 말은 경제가 역사 변화의 원동력이라는 말이다. “사람들이 역사를 만들기 위해서는 우선 살아갈 수 있어야 한다”_독일 이데올리기는 결국 역사주의를 말하고 있다. 물질적 생산활동은 인간의 의지로부터 독립되어 있으며, 역사의 원동력으로 작용한다.
‘정치경제학 비판’ 서문에서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인간은 사회적 생산에서 필연적이며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관계들을 받아들인다. 물질적 생산력의 일정 발전 단계에 대응한는 생산관계를 가진다. 생산 관계들의 총체가 사회의 경제적 구조를 형성한다. 이를 실질적 토대로 하여 법적 정치적 상부 구조와 일정한 사회적 의식 형태가 대응한다. 물질적 생활의 생산방식은 사회적, 정치적 그리고 정신적 생활과정 일반을 제약한다. 인간의 의식이 그 존재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인간의 사회적 존재가 그 의식을 규정한다. 경제적 토대의 변화와 더불어 거대한 상부구조 전체도 조만간 변혁된다.
법칙1, 생산력이 생산관계를 규정한다.
자신이 생산력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없다라는 것은 축적된 역사적 산물이라는 것이다. 생산력은 곧 생산관계를 이야기하고 이것은 사회전체로 확대된다.
“물질적 생산력의 일정한 발전 수준에 상응하는, 그들이 의지로부터 독립된 일정한 필연적인 관계, 즉 생산관계를 맺는다.”라고 정치경제학 비판 서문에서 밝히고 있다.
“역사 발전의 어떤 단계에서는 사회의 물질적 생산력이 현존하는 생산관계,, 즉 법적인 용어를 빌리면 소유 관계와 모순을 일으킨다. 생산력의 발전 형식에 따라 생산 관계는 생산력의 구속으로 급전한다. 여기서 사회 혁명의 시대가 출현한다.” 정치경제학 비판 서문
핵심쟁점은 생산력 개념이 문제인데 이것이 생산력은 물질적이란 뜻인가? 당연히 정보의 문제가 발견할 수 밖에 없다. 생산력을 발전할 수 밖에 없는가?라고 하는 진보를 전제하고 있다.
법칙 2, 토대가 상부구조를 규정한다.
핵심쟁점은 일장적인 규정인가 상호 규정인가?이다. 상부구조인 사회적 상상력이 어디까지 영향을 미치는가가 문제가 된다. 사회적인 관계와 상상력이 궁금적 결정요소라면 ‘궁극적’이 무슨 의미인지를 밝혀야 한다. 서구 마르크스주의는 상부 구조의 영향력에 주목하고 있다. 그람시의 헤게모니론이 바로 그것이다. 사회와 문화는 자율성을 가지며 인간이 지배적인 요소가 된다.
루카치는 1차 세계대전 후에 사회주의 혁명이 좌절되고 변화의 가능성이 보이지 않던 때, 역사관 수정을 요구한다. 프로레탈리아 혁명은 법칙에 따라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이 계급의 주체적인 자각과 능동적 참여를 통해서만 달성될 수 있다.
법칙3, 인간의 사회적 존재가 그 의식을 규정한다.
핵심쟁점은 사회적 존재를 무엇으로 볼 것인가의 문제가 발생한다. 사회적 존재는 물질적 조건에 구속된다고 하면 마지막에 경제가 남는다. 사회적 존재가 인간의 현실적 생활과정 전체라고 한다면 모든 실천적 활동인 문화도 포함하게 되어 있다. 문화는 단순히 상부구조가 아니라 우리를 규정하는 사회적 존재의 일부로서 물질성을 갖는다.
민네이션, 종교개혁
종교개혁은 크게 3가지로 구분된다. 루터, 칼뱅, 뮌처의 개혁안이 그것이다. 루터는 봉건귀족을 대상으로 95개조 반박론을 내놓았다면 칼뱅은 부르주아들을 위한 개혁을 다루었다. 그러나 뮌처는 농민들을 중심으로 완전히 개혁적이면서 서민적인 개혁을 요구한다.
우리는 대부분 루터나 칼뱅의 종교개혁을 구분하지 못한다. 한국 개신교의 대부분이 칼뱅에서 시작해서 루터쪽으로 기우는 이유도 바로 그 대상에 원인이 있다. 어느정도의 번영신학이 발전하는 것도 바로 이러한 문제가 원인이다. 명확하게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는 귀족이나 부르주아지들을 위한 개혁한을 낸 것이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고민은 오늘날에도 있다. 한국 기독교도 어느정도 루터파, 칼뱅파, 뮌처파로 나누어볼 수 있다. 자유주의에서 근본주의까지, 복음주의가 중간에서 이러한 두가지 방법들을 화해시키는 모드가 되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그럼 어떤 종교개혁이 필요한 것인가? 종교개혁의 전통적인 관점은 시대의 변화와 신에 대한 해석의 변화였다면 오늘날 우리는 교회를 어떻게 바꾸어야 하는가?이미 지배개급의 담론과 주장을 대변하고 있는 한국 대형교회의 변화는 어떤 방식으로 변화되어야 하는가?
민네이션, 종교
엥겔스는 왜 종교에 집중했는가? 그것은 종교가 보수적인 계급적 관계를 고착시켜주는 개념집과 같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교회라는 구심점 때문에 개혁과 변화를 추구해야 하는 사람들이 이데올로기화되어서 변화를 포기한다는 것이다.
종교는 계속 운동을 멈추게 하고, 혹은 운동의 영향과 가치를 하늘나라로 옮겨 버기리 때문에 엥겔스나 마르크스에게는 걸림돌이 되었던 것이다. 더욱이 엥겔스의 종교 이해는 니케아 종교회의이후에 그리스로마신화와 유대철학을 합쳐서 삼위일체라는 속류화된 이념을 만들어낸 이들에 대해서 반대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관점을 이어받아 이후에 공산주의자들은 종교에 대해서 비판적인 관점을 견지하고 국가와 함께 운동을 막아서는 걸림돌로 생각하게 된다.
민네이션, 마르크스
마르크스는 자기 개인의 역사에서도 변증법적으로 발전한다. 당위의 가치를 발전시키는 원리를 찾아내는가 하면 실천적으로는 실제 변화가 일어나는 현실에서 자본주의를 분석하면서 과학적인 접근을 하고 있다.
마르크스주의가 논점이 되는 것은 모든 것이 변화하고 있다고 하면서도 마르크스는 원리자체는 운동하지 않고 고정된 진리이냐라고 보는 것이 모순이라는 것이다. 자본주의도 역시 지금도 새로운 얼굴과 외화를 가지고 있는데, 그것에 대해서 마르크스 주의는 과연 여전히 효과적이고 분석적인 우위를 가질 수 있는가?
민네이션, 행위
활동과 행위, 행동을 고민해보자. 특히 행위는 3가지로 나누어지는데, 그것은 인간과 자연의 관계인 ‘노동’과 인간과 인간의 관계인 ‘도덕행위’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버마스의 ‘의사소통관계론’이다. 아렌트도 역시 인간과 자연의 관계인 노동과 도구와 인간의 관계인 작업을 놓고서 ‘행위’를 인간과 인간이 맺는 진정한 관계로 섦여한다. 마르크스는 노동과 도덕행위를 다룬다. 이것이 상부구조와 하부구조를 구성한다.
노동에 대한 분석은 자본주의 비판을 통한 하부구조의 과학으로 기술로 분석한다. 도덕행위는 가치와 당위의 문제로 인해서 사회적 관계라는 상부구조의 방향성을 결정한다. 이런 의미에서는 마르크스가 칸트의 실천이성을 가지고 왔다고 보기도 하는 것이다.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 11가지
1.지금까지의 모든 유물론은 포이어바흐를 포함하여 주요한 결함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대상, 현실, 감감을 다면 객체 또는 지각의 형식으로만 파악하고 인간의 감성적인 행위로서, 실천으로서는 파악하고 있지 않으며 주체적으로 파악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2.인간의 사유가 대상적 진리성을 가지고 있느냐 없느냐하는 문제는 결코 이론적 문제가 아니라 실천적 문제이다. 인간은 자기사유의 진리성을 즉 현실성과 힘을 그 차안성을 실천에서 증명해야한다. 실천에서 유리된 사유가 현실적이냐 현실적이냐하는 논쟁은 순전히 스콜라 철학적인 문제이다.
3.사람은 환경과 교육의 산물이며, 따라서 변화된 사람은 다른 환경과 변화된 교육의 산물이라는 ㅠ물론적 교의는 환경이 바로 사람에 의하여 변화된다는 점과 교육자 자신이 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점을 망각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 교의는 필연적으로 사회를 두 부분으로 나누게 되며, 그 둘 중에서 하나는 다른 것보다 더 우월하다. 로버트 오웬의 경우가 그렇다. 호나경의 변화와 인간 행위의 변화의 일치는 혁명적 실천으로만 파악될 수 있으며, 또 합리적으로 이해될 수 있다.
4.포이어바흐는 종교적 자기 소외라는 사실, 세계가 종교적, 관념적 세계와 현실적 세계로 이원화된다는 사실로부터 출발한다. 그리고 그는 종교적 세계를 그 세속적 기초에까지 끌어 내리는 일에 몰두한다.
5. 추상적 사유에 만족하지 못하는 포이어바흐는 감성적 지각을 내세운다. 그러나 그는 감성을 인간적, 감성ㅈ거 행위로 보지 않는다.
6.포이어바흐는 종교의 본질을 인간의 본질에 귀결시킨다. 그러나 인간의 본질은 개개인에게 내재하는 추상물이 아니다. 인간의 본질은 그 현실성에 있어서는 사회적 관계의 총체이다. 포이어바흐는 이러한 현실적인 본질에 대하여 비판을 가하지 않는다. 1) 역사 과정을 도외시하며, 종교적 심성을 그 자체로서 고정시키고, 하나의 치상적이면서 고립된 개인을 전제로 하지 않을 수 없다. 2)그에게 인간의 본질은 다만 유로서만, 다수의 개인을 순전히 자연적으로 결합하는 내적인 무언의 보편성으로서만 이해될 수 밖에 없다.
7.그렇기 때문에 포이어바흐는 ‘종교적 심성’ 자체가 사회적산물이며, 그가 분석하는 추상적인 개인은 실은 일정한 사회형태에 속해 있다는 점을 보지 못한다.
8. 사회적 삶은 본질상 실천적이다. 이론을 신비주의로 이끌어가는 모든 신비적인 것은 인간의 실천과 이 실천의 이해 속에서 그 합리적인 해결을 얻는다.
9. 직관적 유물론, 즉 감성을 실천적 행위로서 파악하지 못하는 유물론이 도달하는 최고의 지점은 ‘시민사회’의 개별적 인간에 대한 직관이다.
10.낡은 유물론의 입지점은 ‘시민’사회이며, 새로운 유물론의 입지점은 인류 사회 똔느 사회화된 인류이다.
11. 이제까지 철학자들은 세계를 다양하게 해석해왔을 뿐이다. 그러나 문제는 세계를 변화시키는데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