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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민네이션 Jul 19. 2018

차원과 인간

일차원적 인간 2장_허버트 마르쿠제

20180719_철학아카데미

마르쿠제 일차원적 인간_임경석

2장 정치적 세계의 폐쇄


1차원적 인간은 계속해서 만들어지고 있다.


들어가기


마르쿠제의 주요한 저서인 ‘일차원적 인간’은 그 당시 새롭게 등장한 2차 산업혁명의 여파로 제조업과 기술사회가 만들어내는 인간상을 고발하고 있다.


일차원적인 사고에 머물러 있게된 이유는 기술사회의 핵심이다. 기술이 발전하면서 사람들의 사고는 기술에 넘겨져 버렸다. 결국은 헤겔이 이야기하는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처럼 기계는 더 발전하고 있고 인간은 더 둔해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고와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은 비판적 사고이고 이것이 사회문화적으로 새로운 방향성을 찾아야 한다고 마르쿠제는 주장하고 있다.


자본주의가 현실에 드러나는 모습은 산업사회와 정보화사회와 같은 사회상이다. 실제적으로 자본주의는 사회를 자본의 논리에 속박시키기 위해서 많은 구조를 만들고 기술합리성에 의해서 효율성이나 성과로 사람을 물화시켜버리고 있다. 당대의 가장 날카로웠고, 마르크스주의의 새로운 버전이면서 희망을 이야기하는 마르쿠제의 주장을 한번 살펴보자. 오늘은 간단히 복습을 하고 2장 정치적 세계가 어떻게 폐쇄되면서 인간들의 사고가 ‘일차원적 인간’으로 전락하게 되었는지를 살펴보자.



더글러서 켈러, 마르쿠제


Douglas Kellner는 다음과 같이 일차원적 인간에 대한 마르쿠제의 관점을 설명하고 있다.


허버트 마르쿠제의 ‘일차원적 인간’one dimensional man은 1960년대 가장 중요한 저서 중에 하나이다. 1964년 처음 출간되자 마자 이책은 당대에 가장 주목할 만한 저서로 인정받았고, 곧 신좌파는 이 이 저작을 당대 가장 주목할 만한 저서로 인정받았고, 곧 신좌파는 이 저작을 당대 서구사회, 자본주의, 공산주의에 대한 통렬한 비판서로 채택되었다. 1950년대와 1960년대 초반에 기획 및 저술된 이책은 당대의 숨막히는 획일성을 돌아보면 새로운 방식의 지배와 사회 통제에 대한 매우 설득력 있는 분석을 제시한다. 그럼에도 이 책은 인간의 자유와 행복이 기성 사회에 확산된 일차원적 사고와 행동을 넘어 크게 확산될 수 있다는 급진적인 철학자의 희망을 표현하고 있다.


마크쿠제는 초기저서 ‘에로스의 문명’에서 명확화한 해방의 전망을 고수하면서 기존의 지배와 억압 형태에 대한 분석에서는 존재하는 것what is be과 존재할 수 있는 것what could be즉 보다 자유롭고 행복한 인간의 존재 방식과 지속적으로 비교되어 왔다고 주장한다.



마르쿠제, 일차원적 인간


이 책은 새로운 문명의 단계를 나타내는 것으로 보이는 당대 산업사회의 특정 경향을 다룬다. 이러한 경향은 전통 문화의 중요한 기반을 약화시키는 사고방식과 행동양식을 낳았다.  이러한 새로운 사고방식과 행동양식의 주요 특성은 보편적으로 합리적이라고 입증될 만한 활동과 태도로 정의될 수 없는 모든 가치, 희망, 사고를 억압한다는 것이다. 그 결과 매우 급진적인 비평이 약화되고, 심지어 사라지기까지 하며, 기존에 확립된 시스템에 반대되는 모든 견해가 통합된다.


이 책은  선진 산업사회 이론을 포함하고 있다. 이 이론은 생산, 소비, 문화, 사고에서의 변화가 어떻게 고도의 획일화 상태를 초래하는가를 섦여하는데, 이러한 획일화 상태에서는 지배적 사회기구에 의해 생산되는 욕구와 열망이 개인을 기성사회로 편입시킨다. 마르쿠제는 노동 조직에서부터 사고방식에 이르기까지 삶에 영향ㅇ르 미치며 기술이 노동과 여가를 재조직하는 흔히 “기술사회”라고 알려진 개념도 설명하고 있다. 그는 소비자 자본주의가 개인을 소비자 자본주의의 사고방식과 행동양식의 범주로 귀속시키는 매커니즘 또한 설명한다.


어쩌면 예술이 우리의 차원을 넓혀 줄찌도.


마르쿠제, 기본 철학


마르쿠제는 이러한 발전이 개인에게 유리하기보다는 전체적으로 통제된 사회에서 인간의 자유와 개성을 위협하는 것으로 간주한다.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마르쿠제는 기존의 사고, 행동, 사회조직 형태를 비평할 수 있는 비판적이고 철학적인 견해를 전개할 필요가 있었다. 따라서 일차원적 인간은 마르쿠제의 헤겔-마르크스 철학 개념과 당시 주요 철학 및 학문조류인 실증주의, 분석철학, 기술적 합리성, 여러 순응적 사고방식에 대한 비평을 명정하게 담고 있는 그의 주요 철학 저서이기도 하다.


이 책에서 그는 변증법적 철학 개념을 명확하게 제시할 뿐 아니라, 그의 변증법적 카테고리와 방식의 사례가 될 수 있는 사회와 문화에 대한 분석 또한 제공한다. 결과적으로 일차원적 인간은 마르쿠제의 비판적 사회 이론뿐만 아니라 프랑크푸르트학파와 함께한 그의 철학적 연구와 업적을 통해 영감을 얻는 비판적 철학에 대한 모델을 제시하고 있다.



마르쿠제, 사회인식


일차원적 사회는 에로틱하고 파괴적인 본증 에너지를 사회적으로 통제된 사고방식과 행동양식으로 조정함으로써 움직인다. 따라서 공격적인 행동은 사회적 유대감을 나타내며, 공통적으로 미워하는 대상에 대한 공격의 형태로 확인함으로써 힘과 자존검을 얻는 사람들을 통합한다.


이러한 경향은 오늘날 미국 사회에서는 모두가 너무나 명백하며, 공격과 군국주의에 대한 마르쿠제의 분석은 부활하는 공격 및 일차원적 보수주의의 시대에는 다시금 새롭게 해석되어야 한다. 마르쿠제가 남긴 1960년대 유산은 여전히 중요한 부분으로 남아 있으며 기존의 억압과 지배에 순응하기를 거부한느 개인과 반대집단은 여전히 위대한 거부를 하고 있다. 비판적 사고와 급진적 정치의 부활을 조장하도록 돕기 위해 마르쿠제의 작품이 광범위하게 읽히고 연구되어야 한다.


사회적 지배는 인간의 자유와 행복에 지속적인 방해요인으로 작용하며, 해방은 군국주의, 보수주의 세력, 절제되지 않은 자본주의에 가담하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에게 지속적인 희망요인이 된다. 일차적 인간 끝부분에 발터 벤야민은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우리에게 희망이 주어진 것은 오로지 희망이 없는 사람들을 위해서이다”



복지국가, 전쟁국가


산업문명이 가장 발달한 지역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전체적 동원의 사회는 복지국가welfare state와 전쟁국가warfare state의 특징을 생산적으로 결합한다. 그것은 이전의 단계와 비교한다면 분명 ‘새로운 사회’이다. 전통적인 분쟁원은 제거되거나 혹은 격리되고 있고, 사회를 분열시키는 여러 요소는 제어된다. 이 사회의 주요한 경향은 잘 알려진 것이다.


정치영역에서는 이 경향이 대립하는 입장의 현저한 통합 또는 수렴으로 나타난다. 외교정책에서 볼 수 있는 양대 정당의 제휴는 국제공산주의의 위협 아래 경합하고 있는 집단적 이해관계는 무시한다. 그리고 이  제휴는 국내정책에도 미치고, 내정에 관한 양대 정당의 강령은 위선의 정도와 진부한 상투어가 풍기는 맛에 이르기까지 갈 수록 구분할 수 없게 되어 간다. 대립하는 입장의 이러한 통합은 체제의 진보를 떠 받히고 있는 층을 에워싸는 곳에서는 사회변혁의 가능성 자체가 영향을 받게 된다.


사회변동, 억제


고전적인 마르크스 이론은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의 이행을 일종의 정치혁명으로 파악하고 있다. 즉, 프롤레타리아트는 자본주의의 정치적 기구를 파괴하지만, 기술적인 기구에 대해서는 이것을 유보하고 사회화시킨다.  혁명에는 연속성이 있고, 기술적인 합리성은 비합리적인 제약과 파괴로부터 해방된 뒤에, 새로운 사회 속에서 자기를 유지하고 완성시킨다.


이 연속성에 대하여 어느 소비에트의 마르크스주의자가 기술의 의견을 읽어보는 것은 흥미 깊다. 그것은 자본주의의 명확한 부정으로서의 사회주의라는 개념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것이다.


Zworikine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기술의 발달은 각 사회 구성체의 경제법칙에 종속하는 것이지만, 그것은 다른 경제적 요인처럼 구성체의 법칙이 타당하지 않게 되면 끝나는 것이 아니다. 혁명의 과정에서 옛날의 생산관계가 해체될 때에도 기술은 잔존하고, 새로운 경제 구성체의 경제법칙에 따라서 더욱 가속적으로 발전을 계속한다. 대립적인 사회에서의 경제적 토대의 발전과는 대조적으로, 기술은 낡은 질적 요소가 소멸하더라도 비약적으로는 발전하지 않고 새로운 질적 요소의 점진적인 비축을 통하여 발전한다.”




기술합리성, 변혁


선진 자본주의에서 기술적 합리성은 비합리적으로 이용된다. 하더라도 어쨌든 생산기구에서 구체화된다. 이 점은 기계화된 공장, 기계 및 자원개발에 대하여 뿐만 아니고 ‘과학적 진리’에서 볼 수 있듯이 기계적 처리법에 적응하고, 그것을 조작하는 것으로서의 노동양식에도 적용된다. 국유화도 사회화도 ‘그것만으로는’ 기술적 합리성의 이 물질적 구체화를 바구지 못한다. 뿐만 아니라 ‘후자’는 모든 생산력이 사회주의적으로 발전하기 위한 필요조건으로 남는 것이다.


변혁은 그 필요 조건으로서 여러 노동계급의 생존자체가 이 세계로부터 소외되고 있다는 점과 그들이 이 세계에서 계속 생존하기는 전혀 불가능하다고 의식하고, 그 결과로 질적 변혁에의 요구가 사활의 문제가 된다는 점을 ‘전제로 삼고 있다’ 이와 같이 부정은 변혁 그 자체에 ‘선행하여’ 존재한다. 해방을 추구하는 역사적인 세력이 기성사회의 ‘내부에서’ 발달한다’는 견해가 바로 마르크스 이론의 한 초석이다.


그런데 다른 아닌 이 새로운 의식이 ‘내적공간’space within, 다시 말해서 초월적인 역사적 실천을 위한 공간이 실제로 그 구현을 방해받고 있다. 방해하고 있는 것은 주체도 객체도 압도적인 생산성의 발달을 자기의 ‘존재이유’로 삼는 전체의 수단으로 여기고 있는 사회이다.

이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더욱 안락해지는 생활을 더욱 많은 사람들에게 약속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파괴적인 상상력이나 노력을 억제하고 조작하는 능력은 주어진 사회의 빼놓은 수 없는 근본적인 요소이기 때문이다.



억제, 전망


증대되는 생산성과 억압을 잇는 이 사슬이 끊어질 가능성은 다소나마 존재하는 것일까? 적은 항상 존재할 것이다. 공산주의는 자본주의와 계속 공존할 것이다. 그와 동시에 자본주의는 여전히 인구의 많은 부분을 유지하고 생활수준을 향상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잠재능력은 두 차례에 걸친 세계대전과 파시즘 체제를 통해 초래된 헤아릴 수 없는 물질적, 정신적인 퇴보에도 불구하고 또한 그것들을 통하여 확증된 바이다.


이러한 잠재능력의 물질적 기반은 앞으로도 다음과 같은 점에 기여할 것이다. 노동생산성의 향상(기술진보), 하층인구의 출생률 증가, 항구적인 방위경제, 자본주의 국가들의 경제 정치적인 통합 및 자본주의 국가들과 후진지역과의 관계 형성들이다.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는 어쩌면 똑같이 일차원적 인간을 양산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자유, 오토메이션


내부로부터와 외부로부터의 원심적 경향이 몇 가지 있다. 그 중에 하나는 기술적 진보 자체에 고유한 것, 즉 ‘오토메이션’이다. 이미 기술했던 것처럼 오토메이션의 확대는 기계화의 양적 성장 이상의 것이다. 그것은 기본적인 생산력이 가지고 있는 성격의 변화이다. 기술적 가능성의 한계에까지 달한 오토메이션은 생산과정에서 인간의 노동력을 사적으로 착취하는데 기초한 사회와는 양립할 수 없다고 생각된다. 오토메이션이 실현되기 거의 1세기 전에 마르크스는 그 폭발적 출현의 가능성을 주목하고 있었다.


오토메이션은 실제로 선진산업사회의 중요한 촉매인 듯이 보인다. 그것은 질적변화의 물질적 토대에서의 폭발적인 또는 비폭발적 촉매이며, 양에서 질로 향하는 이행의 기술적 도구이다. 왜냐하면 오토메이션의 사회적 과정은 노동력의 변형, 혹은 오히려 변질을 표현하며, 거기서는 노동력이 개인으로부터 분리되어 독립적으로 생산을 하는 객체가 되고, 이러하여 그 주체가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오토메이션은 일단 물질적 생산의 전형적 과정이 되면 사회 전체에 혁명적인 변화를 일으킬 것이다. 인간 노동력의 물상화는 그 극한까지 밀고 나가면, 개인을 기구에 묶어두는 사슬을 끊어 버리고 물상화 형태를 분쇄할 것이다. 필연의 영역에 오토메이션이 완성되면, 인간의 개인적이고 또한 사회적인 생활이 실현되는 차원으로서의 자유시간의 차원이 열릴 것이다. 이것은 새로운 문명을 향한 역사적 초월이 될 것이다.


그러나 마르쿠제는 이렇게 긍정적으로 보면서도 결국 이러한 자동화는 배제와 소외를 만들어내고 1차원적 인간을 만들어내는데 영속화될 것이라고 말한다. 그 이유는 이런한 자유의 탄생 후에 인간의 욕망은 다시 1차원적인 안락함과 행복을 추구하는 차원으로 전락하기 때문이다. 더더욱 후에 알아보겠지만 인간의 이러한 차원은 계급을 나누고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구별짓기하여 격리시키거나 분리 시킬 것이다.


프랑크프르트 학피 2세대 비판학자인 하버마스


교육, 독재


마르쿠제는 이러한 비판이 사라진 사회를 되살릴 방법으로 교육독재를 이야기한다. 교육독재를 통해서 진정한 이성적 자기결정을 가능하게 하는 교육이 진행해야한다고 주장한다. 확실히 사회는 자유로운 사회가 될 수 있기 전에 우선 그 사회의 모든 구성원이 자유의 물질적 전체를 창출해내야 하고, 개인의 자유롭게 발달하는 욕구에 따라 부를 분배할 수 있게 되기 전에 우선 부를 창출해야 한다.


또한 사회는 노예가 현재 진행중인 사태와 그 변혁을 위해 스스로 행할 수 있는 것을 이해하게 되기 전에, 우선 노예가 배우고 보고 생각할 수 있도록 해 주어야 한다. 그리고 노예가 노예로서 생존하고 그 역할에 만족하도록 미리 조건을 부여하는 정도에 따라, 그들의 해방은 외부로부터 그리고 위로부터 시행되지 않을 수 있다. 그들은 ‘자유롭도록 강요’되어야 하고 ‘대상을 사실 그대로의 모습으로, 때로는 마땅히 봐야할 모습으로 보도록’ 강요되어야 한다. 그들에게 자기들이 찾고 있는 선한길을 제시해 주어야 한다. 이것은 루소의 이야기를 가지고 온 것이다.


어떤식의 교육이 필요한 것인가?


마르쿠제, 주체


충돌이나 변화를 만들어내는 사람들은 사회적 피라미드의 인간적 밑바닥을 이루는 사람들인 아웃사이더와 가난한 자, 실업자와 취업 불능자, 학대받고 있는 유색인종, 형무소나 정신병원의 수감자들이다. 이들을 통해서 자본주의와 산업사회가 가지고 있는 체제의 문제점들을 발견하게 하고, 비판적 합리성을 교육시켜서 혹은 자각시켜서 일차원적 사회를 변화를 가져오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러나 기존의 사회는 사회문화적으로 새로운 생각과 변화를 만들어내지 못하도록 인식하지 못하게 만든다는 것이 마르쿠제의 비판이다. 그러나 이것을 자각하게 만들고, 무엇인가를 끄집어 내는 데는 엘리트들이 동원되는것은 아닌가?라는 비판도 받게 된다. 그래서 마르쿠제는 ‘미학’으로 넘어가기는 한다.




민네이션, 마르쿠제


마르쿠제의 핵심적인 논제는 왜 인간이 일차원적으로 바뀌었는가?이다. 일차원적이라는 것은 오직 한가지로만 생각하는 것인데 그것은 바로 가장 편한 상태로 안락함만을 추구하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안락함을 추구하게 만드는 것은 다름아닌 기술의 발전이었다. 기술의 발전을 통해서 인간은 기술이라는 것이 초기에 셋팅하고 있는 논리구조에 갖혀버리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기술의 합리성’에 압도당한 인간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기술의 합리성의 출처는 다름아닌 산업사회이고 이러한 산업사회를 움직이는 것은 새로운 세상에 대한 갈망보다는 자본에 대한 열망이었다는 것이 마르쿠제의 분석이다.


그래서 이러한 일차원적 인간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헤겔-마르크스의 ‘변증법’을 가지고 온다. 변증법은 부정에서 시작한다. 정에 대한 반대개념이 있어야 진정한 진리로 발전할 수 있다는 것이 바로 변증법의 방법론이다. 여기서 좀 더 들어가면 헤겔이 이야기한 ‘정신현상학’에서의 변증법이라는 단순히 ‘정-반-합’을 넘어선다.


왜냐하면 헤겔에게서 정이라는 것은 정신이 마련한 ‘개념’이고 이것은 굳어져 있고 정리된 것이다. 그러나 정신이 자신을 확장해가면서 결국은 ‘현상’과 만나게 되어 있다. 현상은 항상 운동하고 있고 날마다, 매 순간마다 새로운 것이다. 그러므로 정신은 그 당시의 ‘현상적으로 다가오는 것’과 하나가 되어서 새로운 진리를 매번 탄생신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개념이라는 것은 항상 새로워지고 항상 도전을 받고, 항상 부정성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이 지점이 마르쿠제가 말하는 일차원적 인간을 넘어서는 것이다. 인간이 비판하기 시작하면서 현상자체에만 머무르지 않고, 정신이나 개념 자체에만 머무르지 않게 되는 기획이다. 그러나 기술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산업사회의 기계의 의한 정신은 항상 한가지의 차원으로 내려앉게 된다. 그것은 이것이 효율적인가 아닌가? 이것이 나에게 도움이 되는가? 이런 것들 말이다. 이런 의미에서 마르쿠제는 유물론적 입장에서 변증법을 옹호한다고 볼 수 있다. 또한 비판적으로 사고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는 프랑크푸르트학파의 핵심적인 기획을 보여준다.


기술의 합리성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보자


민네이션, 유물론


모든 부분이 유물론적이지는 않다. 유물론은 물질과 정신에서 물질이 우선해서 존재한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인간은 유기체라서 물질과 정신이 서로 변증법적 작용을 한다고 생각한다. 마르쿠제의 이야기가 설득력을 가지는 것은 인간이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비판적인 사고를 하지 않으면 주어진 물질의 구조, 생산관계, 놓여져 있는 사물들의 위치에 따라서 생각을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기술과 함께 기계라는 물질이 우리에게 주는 생각의 관념은 이미 내제되어 있는 사고관을 기술이라는 방법을 통해서 제작자가 전달하는 것이다. 그래서 유물론을 바탕으로 비판을 하는 것은 중요하다. 정신이 확장되면서 물질의 구조와 형태를 결정하고 그것이 다시 인간에게 새로운 생각이나 편향된 생각을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민네이션, 기술사회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에 의하면 실제로 노동을 하는 노예는 결국 주인이 되어가는 경험을 쌓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이 ‘기술합리성’에 의해서 이루어지지 않고 모든 결과를 여전히 기술을 만들어내고 소유하고 있는 사람들이 가지고 간다는 것이다. 이것이 마르쿠제가 비판하고 있는 기술합리성이 매개가 되어서 기술사회의 자본주의화를 이루어가는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에서 노예는 주인이 될 수 있는 존재인 ‘기계’가 맞게 되는 것이다. 4차 산업혁명 이후에 인공지능이 나오면서 이제는 그러한 기계가 주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이 바로 터미네이터와 같은 기계들의 반란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러므로 일차원적 인간들은 결국 ‘소외’되어 버리는 것이다.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고 자신을 발견하지도 못하고 더욱이 스스로 자각도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기술사회가 우선되지 않게 하고, 기술의 합리성을 잘 이용한다면 어떻게 될까? 칼폴라니의 이야기처럼 정치가 우선이 되고, 민주주의가 우선이 되는 것이 필요하다.


작업기억을 통한 사회적 상상력의 공간을.



민네이션, 워킹메모리


사회를 바꾸려면 사회학적 상상력이 필요하다. 또한 새로운 상상력을 만들려면 상상력을 위한 공간이 필요하다. 그러한 상상력은 뇌과학적으로 ‘워킹 메모리’가 필요하다. 그것은 인간의 전전두엽에서 자라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워킹메모리는 작업기업이라고 부르는데, 인간이 생각을 하기 위해서 생각을 띄우는 공간이라고 보면 된다.


그 공간은 인간이 0세에서 5세까지 가장 많이 만들어지는데, 가정의 문제나 빈곤으로 인해서 작업기업이 만들어지지 않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일차원적 인간의 입장에서 볼 때 지금의 사회에서는 워킹메모리는 계속 줄어들 것이다. 워킹메모리를 메타인지로 발전시키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사회를 바꾸는 방법론 중에 하나이다.


좀 더 쉽게, 좀 더 이해하기 쉽게 만들어가는 것이 필요하다.


koo에서도 하지만 더 쉽게 적용할수 있는 메타인지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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