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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민네이션 Aug 18. 2018

부정과 긍정

마르쿠제_일차원적 인간 6장_부정적 사유에서 긍정적 사유로

20180813_철학아카데미

마르쿠제_일차원적 인간_임경석

6장_부정적 사유에서 긍정적 사유로



들어가기


마르쿠제의 비판은 1차원적 인간이 만들어내는 1차원 사회, 그리고 1차원적 사회가 다시 만들어내는 1차원적 인간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다. 마르쿠제에게서 다른 비판학파들과 다른 점을 찾을 수 있는데 그것은 ‘유토피아’를 여전히 갈망하고 있고, 그에 대한 대안을 계속에서 ‘주체’들 안에서 찾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나와 같이 ‘부정의 변증법’으로 그 비판을 시작하며 결국에는 변증법적 대안을 찾아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오늘은 이러한 의미에서 긍정적인 대안을 만든다라는 의미는 아니고, 체제가 이미 만들어지고 나면 그 체제에 복종하기 위해서, 혹은 그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서 긍정적인 사유가 발전하게 된다는 것인데, 이것은 판단중지를 가능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럼 어떻게 사회가 부정적 사유에서 긍정적 사유로 발전하는지, 그리고 사람들은 어떻게 부정적 사유를 잃어버리게 되었는지를 찾아보자.



지배, 종속


사회적 현실이라는 점에서, 모든 변화에도 불구하고 인간에 의한 인간의 지배는 여전히 지속되고, 그것은 기술 이전의 이성과 기술적인 이성을 결합하는 역사적인 연속체를 형성한다. 그러나 기술에 의한 자연의 변형을 계획하고 실행하는 사회는, 인격적인 종속관계(주인에 대한 노예의, 장원영주에 대한 농노의, 봉건군주에 대한 영주의 등등)을 점진적으로 ‘사물의 객관적 질서’로의 종속관계로 대치하고 그것에 의해 지배의 토대를 바꾼다.


확실히 ‘사물의 객관적 질서’는 그 자체가 지배의 결과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지배는 전보다 고도의 합리성을 만들어내고 있다는 것도 사실이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자연적, 정신적인 자원을 더욱 능률적으로 개발하고, 이 개발의 이익을 더욱 대규모로 분배하면서, 또 한편으로 그 계층구조를 유지하는 사회의 합리성이다. 이 합리성의 한계와 그 유해한 세력은, 생산기구에 의한 인간의 점진적 예속화 상태에서 나타난다. 생산기구는 생존을 위한 경쟁을 영속시키고, 또한 이 기구를 만들어 이용하는 사람들의 생활을 파멸로 이끄는 전반적인 국제적 투쟁에로 생존을 위한 경쟁을 확대시켜 나간다.


이러한 단계에서 체제의 합리성 자체에 무엇인가 잘못이 있으리라는 것이 명백해진다. 잘못된 것은 사람들이 자기들의 사회적 노동을 편성하는 방식이다. 이 점은 오늘날 문제시되지 않는다. 요즘은 한편으로 대기업가들 자신이 정부의 명령과 규제에 의한 혜택을 얻기 위하여 자유경젱와 ‘자유’ 경쟁에 의한 혜택을 자진하여 희생하려고 하며, 또 한편으로는 사회주의 건설이 지배의 강화를 통하여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이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고, 이 사회의 그릇된 편성문제에 대해서는 ‘선진’산업사회의 상황에 관하여 좀 더 깊은 설명이 필요하다. 이런 사회에서는 한 때 부정적이고 초월적이었던 사회적 세력을 기성 체제에 통합함으로써 새로운 사회구조를 형성하는 듯이 보이기 때문이다.



부정적대립, 긍정적대립


부정적 대립에서 긍정적 대립으로의 이러한 변형은 ‘그릇된’ 편성이 내적인 근거에서 전체주의화함으로써 다른 선택가능성을 방해한다는 문제를 제기한다. 확실히 체제의 명백한 잔점이 바우이할 가치가 있는 것으로 간주케 됨은 너무나 당연하고, 또한 자세한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당연하다는 것은, 현재 무엇이 일어나고 있으며 왜 그것은 일어나는가를 파악하려는 의사도 업속, 파악할 능력도 갖지 못한 사유와 행동양식에만 그리고 기성의 합리성 잏외의 어떠한 합리성에도 면역이 된 사유와 행동 양식에만 한한다.


주어진 현실과 일치하는 정도에 대응하여 사유와 행동은 허위의식, 즉 허위의 사실질서를 유지하는데 만족하고, 거기에 기여하는 의식을 나타낸다. 그리고 이 허위의식은 지배적인 기술적 기구로 구체화되고, 이 기구를 통하여 역으로 재생산된다.



사물, 본성


사물의 본성은 사회적인 본성도 포함해서, 억압뿐만 아니라 억제도 완전히 합리적인 것으로 정당할 수 있도록 정의되었다. 참된 지식은 이성은 감각으로부터의 해방을 요구하는 것은 아니더라도 감작에 대한 지배를 요구한다.


로고스와 에로스의 결합은 이미 플라톤에 있어서 로고스의 우위에 도달해 있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결합은 이미 플라톤에 있어서 로고스의 우위에 도달해 있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경우 신과 신의 의해 움직이는 세계와의 관계는 유츄anlogy에 의해서만 에로스적이다.


그리하여 로고스와 에로스의 불안정한 존재론적 유대는 깨지고, 과학적 합리성이 본질적으로 중립적인 것으로서 출현한다. 인간을 포함한 자연이 무엇을 얻으려고 애스는 것은 오직 물리학적, 화학적, 생물학적인 운동의 일반법칙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수, 속성


수량화할 수 있는 속성만을 갖춘 객관적 세계는 그 객관성 때문에 더욱 주관에 의존하게 된다. 장기에 걸치는 과정은 가시적인 기하학적 도형을 순전힌 정신적 조작으로 대치하는 기하학의 대수학화로부터 시작된다.


이 과정의 극단적인 형태는 현대 과학철학의 어떤 발상에서 보여진다. 그것에 따르면 자연과학의 모든 내용은 수학적 또는 논리학적 관계로 해소시키는 경향에 있다. 주관과 길항하는 객관적 실체의 개념도 해체하는 듯이 보인다. 전혀 다른 방향에서 과학자와 과학철학자는 흡사한 가설, 즉 특정의 실재 가은 것을 배재한다는 가설에 도달한다.


하이젠베르크는 ‘우리가 수리적으로 입증하는 사항은 그 일부만이 객관적 사실이고 대부분은 가능성’의 전망이라고 했다.



포퍼, 전망


칼 포퍼는 자연과학은 그 역사적 발전 속에서 동일한 객관적 실재가 갖는 다른 층을 밝혀내고 정의한다. 이 과정에서 역사적으로 초월한 개념은 버려지고, 그들 의미는 후속의 개념에 편입되어 간다. 이 해석에서는 과학이 실재의 진정한 핵심, 즉 절대적 진리르 향해 진보해 간다는 의미가 포함된 듯하다. 그렇지 않으면 실재는 결국 속이 없는 양파 같은 것이 될 것이고, 과학적 진리의 개념 자체도 의심스럽게 될 것이다.


데카르트식의 세계분할은 그 자신의 입자에서도 의문시된다. 후설은 데카르트가 말하는 ‘에고’는 결국 진실로 독립된 실체가 아니고, 오히려 수량화의 잔여 또는 한계였다고 지적했다. 세계를 보편적이고 절대적으로 순수한 연장하는 것으로 보는 갈릴레오의 세계관이 데카르트의 구상을 아프리오리로 지배한 것 같다.


그렇다면 데카르트의 이원론은 거짓이 될 것이고, 데카르트가 말한 생각하는 에고라는 실체는 연장하는 것과 유사한 것일 테고, 수량화할 수 있는 관찰, 측정의 과학적인 주관을 앞지르는 것이 될 것이다. 그것은 자연이 ‘객관적으로 정신적’이라는, 자연의 주체라는 일차원적인 과학적 세계의 확립으로 향하는 길을 방해하기 보다는 오히려 개척할 것이다. 그리고 이 주체는 매우 특수한 방식으로 그 자신의 세계와 관련된다.



마르쿠제, 비판


과학이 그 자신 고유의 방법과 개념 덕택에 자연의 지배와 인간의지배가 결합한 상태의 세계를 지배하고 추진했다. 그리고 그 결합은 정체적으로 이세계에 숙명론이 되었다는 점이다. 자연은 과학적으로 이해되고 정복됨으로써 생산과 파괴의 기술적 기구 속에 다시 모습을 나타낸다.


그리고 그 기구는 개인의 생활을 유지하고 개선하는 동시에, 그들의 기구의 지배자 밑에 종속시킨다. 이리하여 합리적 계급구조는 사회적 계급구조와 융합한다. 그렇게 되면 이 숙명적인 결합 단절시킬 가능성을 가진 진보의 방향 전환은 과학의 구조자체에도 영향을 줄 것이다.


과학의 가설은 그 합리적 성격을 잃지 않으면서 본질적으로 상이한 경험적 문맥으로 발전할 것이다. 그 결과 과학은 본질적으로 다른 자연의 개념에 도달하고, 본질적으로 다른 사실을 확증할 것이다. 합리적인 사회는 이성의 관념을 전복시킨다.



근대과학, 신화


마르쿠제는 과학을 비판하는데 있어서 응용과학만을 비판한다. 순수과학에 대한 비판은 하지 않는다. 응용과학을 통해서 사람들이 착각하는 것은 과학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줄 것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신화라는 것이 바로 마르쿠제의 비판이다.


자연은 계속 재생되지도 않고, 인간은 영생을 할 수도 없으며, 인간이 우주에서 살아가는 것도 쉽지 않다는 것을 망각하면서 과학만능주의를 만든 것이 바로 근대과학의 신화라고 마르쿠제는 비판한다.






민네이션, 합리성


비판학파에서는 ‘부정적 변증법’을 통해서 기술합리서잉 지배하는, 도구적 사회를 비판한다. 도구적으로 이성이 사용됨으로써 우리의 이성은 이제 일차원적으로 전락하게 되는데 그것은 기계적 사고와 기계적 생산양식의 의해서 종속되는 결과를 가지고 온다는 것이다.


이들이 글을 쓸 때는 1950년대의 1차 농업혁명이 지나가고 2차 산업혁명이 한참일 때였다. 우리가 사는 현재의 시대는 3차 산업혁명이 지나가고 4차 산업혁명이 도래하고 있다. 3차 산업혁명은 지식산업, 금융산업, 서비스 산업으로 체제를 유지하고 발전시켰다면 4차 혁명은 다시 포스트모던으로 돌아온다.


이성의 흐름에 있어서 4차 산업혁명은 이제 이성의 완전성 혹은 이성의 독립성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오늘의 글에서는 2차 산업혁명시대의 기계와 물질, 산업자체의 제조업적 특성의 합리성은 인간을 도구로 만들어 버리는 것을 볼 수 있다. 합리성은 합리성인데 어떤 합리성인가? 바로 기술과 기계의 합리성이다. 그것은 아날로그방식의 합리성이면서도 인간적이지 않은 합리성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식으로 글을 쓰기 시작한다면 그렇다면 3차 산업혁명시대의 합리성이란 무엇인가? 금융과 지식의 합리성이란 무엇인가를 고민해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합리성의 구분에서 4차 산업혁명도 역시 어떤 합리성을 바라보고 있는지를 고민해볼 수 있다.


요즘의 혁명은 디지털민주주의로 넘어가면서 새로운 양상으로 바뀌고 있다.


민네이션, 혁명


사회혁명과 기술혁명 그리고 산업혁명은 어떤 상관관계를 가지는가? 마르쿠제가 말하는 혁명적인 방법론과 칼 포퍼가 말하는 점진적인 개혁주의는 어떻게 다른가? 부정적 변증법을 가지고 사회전체의 미련한 긍정성을 파괴하는 혁명이 필요하다고 말한 마르쿠제와 다르게 조금씩 조금씩 점진적으로 잘못된 것들을 미시적으로 고쳐나가면서 새로운 사회를 잠정적으로 이루어가는 혁명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칼포퍼이다.


나는 과연 어떤 혁명을, 어떤 개혁을, 어떤 개선을, 어떤 조그만 변화를 이루어갈 것인가? 역사 속에서, 그 시대적 상황의



민네이션, 하버마스


하버마스는 제2세대 비판학자인가?아니면 아류인가? 아니면 독창적인 비판학자인가? 그 이유는 하버마스는 베버로부터 시작되는 ‘체계’의 합리성만 존재한다는 것을 비판하면서 생활세계를 합리성의 범주 안에 가지고 온다. 그리고 그러한 생활세계의 합리성이 발현되는 방식은 ‘의사소통합리성’이다.


하버마스가 볼 때 이성은 도구적 이성이나 전략적 이성만 있는게 아니라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이성이 있는 것이다. 이것은 상호성에 기반하여 다른이와 함께 대화를 할 때만 가능한 이성이다. 이러한 의사소통합리성의 입장에서 ‘공론장’이 탄생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합리성담론은 현대성의 위기에서 나타나는데, 그것은 현대성은 원래 인간이 가지고 있던 의사소통합리성의 상호주체성을 홀로주체성의 단순한 이성으로 축소시켜버렸다는 점이다.


비판만으로 가능하지 않다는 것, 그래서 해체하고 분해하는 논리나 이성만이 아니라 연합하고 소통하는 의사소통의 합리성을 통해서 체계와 생활세계가 온전히 균형을 이루면서 시간의 흐름을 탄다고 할 수 있다.



민네이션, 지배


인간이 기계에서 해방된다고 해서 해방되는 것인가? 그것은 새로운 복종관계로 들어가는 것일 수도 있다. ‘지배’라는 관점에서 볼 때 인간은 어디선가 해방되면 또 어디로 종속될 것이다. 이러한 종속을 벗어나기 위해서 마르쿠제는 철학을 가지고 항상 부정성의 도전을 해야한다는 것이다.


지배에 대한 체제를 붕괴시키기 위한 혁명이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다시 하버마스로 돌아가면 ‘지배와 쌍을 이루는 지속과 생명’의 논리에 있어서는 너무 편협하고 협소하게 이성을 바라본 것은 아닌가?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체계의 논리는 지배이지만, 생활의 논리는 지속이고 유지과 생명이라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인간을 생명의 총체로 바라보는 것보다는 오히려 생각의 실체로만 바라볼 수 있는 오해를 불러 일으킬수도 있다는 것이다.


물론 ‘에로스와 문명’에서 인간의 생물학적 해방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하지만 오히려 인간의 생물학적 해방역시도 지배에서 해방되는 순간 또 어떤 것에 종속되게 만드는 것은 아닌가? 다시 말하면 ‘욕망’이라던지 ‘악’이라는 것에 말이다.


지배에 대한 부정, 혹은 해방에 대한 해방만을 이야기하는 것은 절반만 온 것이 아닐까?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가야하는 것은 아닌가? 새로운 연합을 만들어가야 하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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