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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민네이션 Oct 12. 2018

창조와 진화

베르그송 창조적 진화_류종렬

20181012_철학아카데미

베르그송 창조적 진화_류종렬

서론과 주제


베르그송

들어가기, 생각


다시 생각해보자. 플라톤의 관념론과 플로티누스의 심층철학(생명학)의 구분을 상기해보자. 플라톤의 세계는 정해진 것이다. 움직이지 않고, 항상 그대로 있는 것이다. 그래서 여기서는 항상 정해진 것을 상정하고stock 그것이 다른 움직이는 것들을flow 어떻게 포섭하는가?를 고민한다.


창조적인 진화는 어떤 과정을 통해서 이루이지는가? 진화와 발생학에 대해서 우리는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생물에서 생명으로 발전하는가? 창조가 일어나는 것은 지성의 영역인가 본질의 영역인가? 물질과 생명의 차원에서 이야기하는 것이 이성과 지성의 차원에서 이야기하는 것과 어떻게 다른가?


우리는 지금까지 상징을 매개하는 언어나 기호가 없이도 인간의 인식이 바로 유입되는 인상, 감각, 심리에 대해서 알아보았다. 그리고 이제는 그것들이 우리의 안에서 어떻게 창조적으로 진화하는지를 알아 볼 것이다.


베르그송과 들뢰즈를 넘어서



목차, contents


1장_생명의 진화에 관하여, 기계론과 목적론
2장_생명 진화의 분기하는 방향들 : 마비, 지성, 본능
3장_생명의 의미 : 자연의 질서와 지성의 형식
4장_사유의 영화적 기작과 기계론적 환상



서문, 생명


생명의 진화의 역사는 이해하는 능력 속에 생명존재의 의식으로부터 행동하는 능력의 부속기관의 역사이다. 다시 말하면 점점 더 정확하게 그리고 점점 더 더욱 복잡하고 유연하게 적응하는 능력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진화의 결과로서 우선, 이 능력의 일부로서 지성은 우리 신체가 외부 환경에 완전한 개입을 확신하도록 하고, 외부세계의 관계를 표상하도록 하고, 물질을 사유하게 한다.


베르그송의 결말을 미리 말하면, 인간 지성은 우리 행동이 지지점을 찾을 수 있고 또한 우리의 노력이 작업 도구를 발견하는 대상들, 즉 타성작 대상들, 더 정확히 말하자면 고체들 속에 잇는 한 자신의 입에 있는 것처럼 편안하다.


철학에 관힌 일반 개념들은 고체의 모습image에 따라서 형성되었다. 그리고 논리라는 것은 고체의 논리이며, 따라서 지성은 기하학에서 승리를 구가하였다. 논리적 사유란 타성적 물질과 유사성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경험이 자신을 뒤따르면서 불변의 근거를 제공한다는 확신을 갖고서 발견에 발견을 거듭 하려는 지성은 지성 자신의 운동을 따를 뿐이다.


그러나 진화의 결과를 보면, 인간의 사유인 지성은 순수 논리로서는 생명의 진실한 본성 즉 진화운동의 심층적 의미를 표상할 수 없다. 생명의 의해 창조된 사유, 즉 생명의 한 유출 또는 한 측면일 뿐 사유가 어떻게 생명을 포용할 수 있는가?  부분이 전체와 동일할 수 없다는 것, 비유적으로 바닷가의 조약돌의 모습이 이들을 실어 나른 파도와 같겠는가? 어떤 사유의 카테고리들인 단일성, 단순성, 기계적 원인성, 지성적 목적성등등이 생명에 관한 사실에는 정확하게 적용되지 못한다.




진화론, 철학


진화론의 철학은 소박한 물질에서 설명했던 방식을 생명의 현상에 적용하고 있다. 그러나 진화의 결과로부터 생명체의 행동에 열려진 좁은 통로에서 생명체의 운동을 밝혀준 미등을 발견할 수 있다. 진화론의 철학은 이 미등으로 세계를 비출 수 있는 태양을 만들어 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화론이 구성한 것은 실재 자체라기보다 오히려 실재의 모방이며, 상징의 이미지일 뿐이다. 절대는 우리 손을 벗어나 있으며, 우리는 여전히 생명 진화의 불가지 속에 남아 있다. 베르그송은 행위가 비실재 속에서 움직일 수 없는 것이 아닌가라고 한다. 그러나 사색하고 꿈꾸기 위해서 생겨난 인간 정신은 여전히 실재성의 외부에 있는 것으로 본다.


그러나 지성은 매순간 동적인 인상을 받아들이기를 모색하면서 행위와 반응행위를 하고자 하며, 절대적인 어떤 것에 근접하고자 한다. 그러나 사변의 습관적 형식이 우리 산업도 우리의 형식적 틀도 관여하지 못한 대상에 적용하려는 데서 모순과 난점이 발생한다. 지성적 인식은 타성적 물질과 관계하는 한, 사진의 연판을 뜨듯이 충실한 인상을 표현할 뿐이며, 상대적 인식에 머문다.



생명, 본성


생명의 본성을 이해하기를 포기해야할까? 생명의 지엽적이고 부분적인 표출이며, 생명 작용의 결과이자 찌꺼기일 뿐이며, 인위적이고 상징적인 표상일 뿐인 기계적 표상에 머물러야 할 것인가?


인간으로 이르는 진화의 선만 있는 것은 아니다. 분화한 다른 선 위에 의식의 다른 형태들이 있다. 이 다른 형태들은 인간 지성이 그랬던 것처럼 외적 강제로부터 자유로울 수도 없었고 스스로를 다시 정복할 수 도 없었지만, 그래도 그 형태들이 진화 운동에서 내재적이고 본질적인 어떤 것을 그래도 표현하고 있다.


이것들을 서로 접근시켜 지성과 융합하게 하면, 의식과 생명이 공연적coextensif이라는 것을 얻게 되지 않을까? 그리고 의식이 자신의 뒤에서 밀고 있는 생명력 추진력으로 되돌아서, 아마도 곧 사라질지도 모를 총체적 생명관을 얻게 되지 않을까?


사람들은 인간이 지성을 통하여 사유하고 지성과 더불어 사유하는 한 지성을 넘어 서지 못한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논리적이고 개념적인 사유 주변에 두리뭉실 성운, 실체가 있다. 소박한 이성이 알 수 없는 신체인 자연 즉 생명 말이다.


지성은 이 성운의 실체를 희성하여, 핵을 형성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오성인 지성을 보충하는 어떤 권능이며, 자연의 진화에서 작업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을 때 분명해지고 구별되는 권능이다. 이 권능은 생명의 방향으로 강화하고 팽창하기 위하여 어떤 노력을 해야하는 가를 가르쳐줄 것이다.




인식이론, 생명이론


인식이론과 생명이론은 서로 뗄 수 없다. 베르그송 이전의 철학자는 인식론과 존재론을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여기서 존재는 형상존재이다. 그러나 베르그송은 질료를 지닌 실재성이기 때문에 우리는 베르그송의 실증적 형이상학을 사변적 형이상학과 구분하기 위하여, 질료형이상학이라고 칭하였다.


인식이론을 비판하는 생명이론은 오성이 제 마음대로 사실을 선전제된 틀에 가두고서 상징으로서 다루기 때문에 대상에 대한 직접적 시각이 없다. 생명진화에서 지성을 제 위치에 두지 않는 인식이론은 인식의 틀이 어떻게 구성되었는지, 어떻게 이 틀을 확대되고 넘어서는지를 알지 못한다. 이 두 이론은 서로 결합하고, 또한 서로 순환과정을 거쳐서 서로에게 무한정하게 충력을 준다.


이 두 철학적 문제를 보다 경험을 통한 접근방법 즉 확실한 방법을 통하여 해결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지성의 형성과정과 물질의 발생에 참여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래서 이 두 이론은 이미 진화된 실재성을 작은 조작으로 나누고 그것들을 다시 구성하는 스펜서의 진화론 대신에, 실재성이 자기 발생과 자기 증가를 이루었을 진실한 진화론으로 대체하고자 한다.


이런 종류의 철학이 아직 빛을 보지 못하고 있으나, 많은 사상가들이 서로 교정하고 다시 이론을 세우면서, 점진적이고 집단적인 노력이 계속되고 있다. 베르그송은 단번에 이 큰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그는 방법을 규정하고 그것을 적용할 가능성을 제시하고자 한다.


이런 계획에 따라서 베르그송은 제 1장에서 오성이 제시한 두 개의 기성복과 같은 기존이론, 기계론과 목적론을 검토할 것이다. 제 2장에서 오성의 관점을 넘어서, 지성에 이른 진화의 선 이외에도 생명이 거쳐 온 진화의 선들을 재구성할 것이다. 제 3장에서 지성의 자기 생성원인에 제자리를 찾아줄 것이다. 마지막 장에서 어떻게 오성이 기존 학문에 종혹될 수 밖에 없었는지를 밝히고 이것을 넘어서는 철학을 제시할 준비를 할 것이다. 그래서 체계의 철학사를 홀낏 보면서 인간 오성이 실재성 일반에 대해 사색할 때, 오성이 제시한 두 개의 착각을 보게 될 것이다.


그 유명한 서울대 박홍규 선생님의 강의록

지속 일반, 베르그송


우리가 가장 확신하고 있으며 가장 잘 알고 있는 존재는 의심할 여지없이 우리 자신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다른 모든 대상들에 대해서는 외적이며 피상적이라고 판단할 수 있는 개념들을 가지고 있으나 우리 자신은 내적이고 심층적으로 자각하기 때문이다. 그 때 우리가 확인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 특권적인 경우에 존재한다는 말의 정확한 의미는 무엇인가? 여기서 이전 저작의 결론을 간단히 상기해 보기로 한다.


우선 상태에서 상태로 이행하고 있음을 확신하게 된다. 나는 덥기도 하고 춥기도 하고 즐겁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다. 나는 일을 하기도 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기도 하다. 나는 내 주변을 바라보기도 하고 다른 것을 생각하기도 한다. 감각, 감정, 의지, 표상들, 내 존재는 바로 그러한 변양들로 나누어지며, 그것들은 내 존재를 차례로 채색한다.


즉 나는 끊임없이 변화한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것은 충분하지 않다. 변화는 사람들이 처음에 믿었던 것보다 훨씬 더 뿌리가 깊다. 나는 사실상 나의 상태들 각각이 하나의 전체를 이루는 것처럼 말하고 있다. 나는 내가 변화한다고 말하고 있지만 변화는 한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의 이행 속에 존재한느 것처럼 보인다.


즉 각 상태를 따로 취할 경우, 그것은 생성되는 시간 내내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남아 있다고 나는 믿고 싶어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가벼운 주의의 노력을 기울이기만 해도 나는 정념affection건, 표상이건, 의지건 매순간 변양되지 않는 것은 없음을 알게 될지도 모른다. 영혼의 한 상태가 변화하기를 멈춘다면 그 지속은 흐르기를 멈추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내적 상태들 중 가장 안정된 것으로 외적이고 부동인 대상의 시지각을 취해보자. 대상이 같은 것으로 남아 있다고 해도 소용없으며, 내가 그것을 같은 빛 아래, 같은 쪽에서 같은 각도로 바라본다고 해도 소용없다. 즉 내가 갖는 시각은 내가 방금가졌던 것과는 역시 다른 것이다.  단지 그것이 한 순간 낡아졌다는 사실 때문이라도 그러하다.


내 기억이 거기 있어서 그것은 이 과거의 무언가를 현재로 밀어 넣는다. 내 영혼의 상태는 시간의 길 위를 전진하면서 그것이 끌어 모으는 지속으로 끊임없이 부풀어 간다. 그것은 말하자면 자기 자신을 가지고 눈사람을 만든다. 하물며 단순한 시지각처럼 불변의 외적 대상에 대응하는 것이 아닌, 더욱 심층적인 상태들 ,즉 감각, 정념, 욕망 등에 대해서는 더 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노마드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보아야 한다. 이진경쌤의 노마디즘의 시작은 몽고족들과 같은 노마드인 유목민 이전에 이미 지층학적으로 바다에서도 조금씩 쌓여진 길없은 리좀이 등장하는 것이다. 그 리좀이 물을 뚫고 뭍으로 드러나는 과정이 바로 노마디즘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들뢰즈가 말하는 ‘토지-국가-자본’으로 가는 곳에서 천개의 고원으로 등장하는 종유석 같은 노마드들은 국가로 편입되는 순간 전쟁기계가 되고, 노마드들은 종속되어 버리면서 다양성을 상실해 버린다.


창조적 진화 만화책





민네이션, 인사이트


생각과 달리 생명은 항상 창조적으로 발전한다. 창조적이라는 말은 계획되고 예상되어 있는 바운더리를 넘어선다는 것이다. 근본적으로 생각과 생명의 차이는 미래를 예시할 수 있는가?이다. 생명의 움직임들은 기존의 예상을 넘어서서 만날수록 달라지고, 그 시대와 시절에 따라서 만들어지는 방식이 달라지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생명의 핵심이다. 생각은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정지해 놓고 시작하는 것이다. 그러나 생명은 모든 것들이 움직인다는 것을 기반으로 생각한다.


나는 생명을 중심으로 생각한다. 생명이 기반이 되어서 감각하고, 그것을 가지고 생각을 한다. 생각이 먼저 있었던 적은 한번도 없다. 그러나 어느순간이 지나면 인간은 생명의 기본적인 턱을 넘어서서 새로운 미래를 예측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그 생각이 각각 다르다는 것인데, 그 다른 것들이 권력이나 제도를 업으면서 다른이들의 생각과 생명까지 속박시킨다는 것에 있다. 이러한 사상이 베르그송의 근본적인 생각이고, 생명에 대한 존중이 생철학이라는 학문으로 발전하는 것이다. 그래서 민주적이라는 것은 사실 모든 것이 존재함으로, 같은 종에 속함으로도 같은 종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시간은 바꿀 수 없다. 공간은 되돌릴 수 있다. 시간은 불가역성이고 공간은 가역적이다. 시간에서 사람들은 동등하고 공간에서 사람은 불평등하다.


생명은 추상적인 것 이전에 존재한다. 계속해서 생명보다 먼저 있던 것들을 이야기하는 것은 사실은 철학에 지배당한 생각이라는 것이다. 생각은 존재로부터, 생명으로 부터 왔다. 이 우선순위를 혼당하면 안된다.


언어는 1차적으로 물질로 부터 오지만, 2차적인 수준을 넘어서면 물질이 없어도 대상이 없이 자신들의 체계를 만들어 간다. 3차원을 넘어서면 새로운 연결구조가 생기는데 그것은 만들어낸 사람들의 생각이기 때문에 권력작용으로 넘어가게 된다.


 생명은 재현이 없다. 오직 현상만 있다. 그런데 어떻게 생명은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이어가는가? 결국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시간과 공간의 결합이 생명을 이루는 요소이기 때문이다. 푸코는 앎의 고고학이나 감시와 처벌과 같은 저서에서 생명에 대해서 다루는 것이라기보다는 생철학에 대해서 다룬다. 그 말은 이미 영혼의 방법론이 아니라 지성의 방법론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민네이션, 들뢰즈


베르그송과 들뢰즈는 오직 현상적인 것, 계속해서 이어지는 것들에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이고 이것을 프랑스 좌파 혹은 헤겔청년좌파가 이어서 받아가는 것을 볼 수 있다.


들뢰즈의 도식은 가장 하층에 토지, 중간의 코라에 국가가 있고 국가 위에 가장 상층에 자본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천개의 고원은 국가 바로 아래에서 토지에서 자라나는 리좀들이 결국은 핵심이라는 것이다.



민네이션, 고민


인간의 창조적 진화를 막는 것이 있을까? 어떤 이들의 사고의 툴이 사회를 제도적으로 지배할 때 인간의 창조적 진화의 폭은 줄어드는 것이 아닐까? 자유를 추구하는 제도, 그리고 너무 욕망에 치우쳐서 누군가의 욕망을 채우기 위한 타자들의 희생이 담겨있지 않은 제도를 만들 수 있을까?

우리사회의 지식구조가 처한 현실, 만들어진 현실과 대비해서 우리 사회의 생명구조가 갖고 있는 혹은 처한 환경은 어떤가? 오히려 푸코의 의해서 말해지는 것처럼 지식의 식민화로 인해서 ‘생명정치’로 종속되어 버리는 것은 아닌가?

지성이 본능보다 창조적으로 무엇을 만들어 낸다면, 오히려 창조적 진화가 이루어지는 과정은 본능이 아니라, 지성의 작용이 아닌가? 결국 생명현상이 인지현상에 의해서 창조적으로 진화된다는 것을 방증하는 것은 아닌가?

사실 근본적으로 철학을 하지 않아도 삶은 살 수 있지 않는가? 본능만으로도 살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철학은 중요한 것인가? 무엇과 연결되어 철학은 더 중요해진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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