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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민네이션 Oct 11. 2018

공포와 권력

줄리아크리스테바_공포의 권력_김선하

20181011_철학아카데미

크리스테바의 공포의 권력_김선하 교수님

공포의 권력 2



들어가기


'아브젝시옹'은 투사적 동일화의 일종이다. 다시 말하면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서 '혐오'의 방법으로 아브젝시옹이 일어나는 것이다. 상징으로 가기 전 인간의 기호계적 코라(기호로 존재하는 경계)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크리스테바는 분석하고 있다. 아브젝시옹은 '경계짓기'라고 볼 수 있다. 오늘 우리가 보는 '공포의 권력'은 다시 말하면 혐오의 대상으로부터 아브젝시옹해서 떨어져 나오는 자기동일화된 어머니(상징으로서 어머니)이다. 그 말은 우리가 원래 있었던 곳이 우리에게 공포의 권력으로 다가온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계속 그 권력으로 부터 도망간다. 이것이 어떻게 보면 라캉이 이야기하는 '주이상스'라고 볼 수 있다. 오늘은 우리가 생각하는 공포는 어디로부터 나오고, 그것이 어떻게 권력으로 작용하는지를 알아보자.


해석학적 접근처럼 텍스트들이 즐비하게 이론들을 넘나든다.



공포의 권력, 아브젝시옹


하나의 대상에 한의 자아가 있듯이, 하나의 초자아에는 하나의 아브젝트가 있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내'가 길들여진 야수적인 고통인데, 주체가 그 고통을 아버지로 바꾸기 때문에(pere-version전환, perversion도착증) 숭고한 동시에 광적이다.


즉 타자autre의 욕망을 상상하기 때문에 주체는 그 야수적인 고통을 지탱한다. 육중하고도 갑작스런 이질성이 출현한다. 전에는 나의 불투명하고 잊혀졌던 삶 속에 친근하게 존재했던 그 이질성은, 이제는 나와 분리되어서 혐오스러워지고 나를 집요하게 공격한다. 내가 아니다. 그것도 아니다.


그리고 더 이상은 아무것도 아니다.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어떤 것'이다. 그 알 수 없는 의미의 무게가 나를 짓누른다. 무와 환각, 그리고 현실의 가장자리에서 내가 현실을 인식하려 하면 나는 전멸된다. 아브젝트와 아브젝시옹은 바로 그런 내 존재의 축, 문화의 도화선 그것에 존재한다.



부정당한 것, 크리스테바


음식물에 대한 혐오는 아마도 가장 오래되고 기본적인 형태의 아브젝시옹일 것이다.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전락해 버린 시체cadavre나 배설구나 죽음 같은 것들은, 연약하고 위선적인 우연으로만 그것에 대항하는 동일성을 격렬하게 뒤집어 놓는다.


시체와 같은 쓰레기들이야말로 끊임없이 내가 살아 남기 위해 멀리해야 할 것들을 가르쳐 준다. 이 고름과 오물과 배설물들은 내 삶이 가까스로 힘겹게 죽음을 떠받치고 삶을 유지해 나가도록 하는 조건이다. 그리고 그곳이야말로 내 삶의 조건의 한계이다. 그 한계들은 살아 있는 내 육체에서 발산된 것이기 때문이다.


오물이라는 한계를 넘어선 다른 한 면에서, 오물 중에서도 가장 역겨운 시체는 한계가 완전히 점령한 장소이다. 쫓겨난 것은 더 이상 자아가 아니라 '나'이다. 이제 한계는 대상이 된다. 한계 없이 내가 어떻게 존재할 수 있을까? 정신을 잃으면서, 신이 부재하고 과학이 무시되는 세상에서 보는 시신은 아브젝시옹의 절정이다.


이처럼 시체는 삶 속에 죽음이 들끊게 한다. 대상에 대해서처럼, 우리는 아브젝트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할 수도 분리될 수도 없다. 상상적 이질성인 동시에 현실의 위협인 아브젝트는 우리를 부르고, 결국에 가서는 삼켜 버린다.


아브젝트가 되는 것은 부적절하거나 건강하지 않은 것이라기보다 동일성이나 체계와 질서를 교란시키는 것에 더 가깝다. 그것 자체가 지정된 한계나 장소나 규칙들을 인정하지 않는데다가 어중간하고 모호한 혼합물인 까닭이다. 반역자, 거짓말쟁이, 양심을 속이는 일, 파렴치한 강강자, 구하는 척하면서 살해하는 자, 이 모든 범죄는 법의 취약성을 드러내기 때문에 아브젝트일 수 있다.


게다가 사전에 계획한 범죄나 음흉한 살해, 선의를 가장한 복수는 그것이 취약한 법을 노리기 때문에 훨씬 더 아브젝트에 가깝다. 그러나 도덕을 거절하는 것은 아브젝트가 아니다. 왜냐하면 도덕을 거절한다는 것은 도덕에 대한 관념이 부재하거나, 법을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반항, 자유주의, 자살적인 범죄처럼 모종의 위대성을 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보다 아브젝시옹은 도덕을 알면서도 그 가치를 부정하는 것이어서 훨씬 더 음흉하고 우회적이며 석연찮은 어떤 것이다. 즉 자신을 숨긴 테러행위, 미소짓는 증오, 껴 안는 대신에 품는 육체에 대한 욕망, 당신을 팔아치우는 채무자, 비수로 나를 찌르는 친구, 이런 것들이 그 예가 될 것이다.



오이디프스, 주체 


통상 오이디프스 단계는 남금기의 만 3세에서 5세까지이다. 초기 오이디프스에서 전오이디프스, 고고학적 오이디프스까지 멜라니 클라인은 놀이치료를 통해서 이론을 적용했다.그러나 사실은 구체적으로 임상의 단계까지 가지는 못했는데, 크리스테바는 임상단계까지 들아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크리스테바는 분석상담의 기법을 이용해서 subject의 개념을 거울단계 이후인 6~18개월 사이에 주체화가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려준다. 생후 3~6개월까지의 유아의 과정에서 주체화가 긴밀하게 이루어진다는 것이 크리스테바의 이론의 핵심이다.  




어머니, 대상


어머니와 젓가슴과의 관계에서 생각해보자. 아이가 어머니의 젖을 빨 때 대상object인 젖과 어머니는 구별이 되지 않는다. 언어이전의 아이들의 기억은 사실 고고학적인 방법론으로 발견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때 아버지의 존재는 사실 경험되거나 인지되지 않고, 모든 대상들은 전체가 아닌 부분적으로 경험이 된다.


멜라니클라인은 이 시기에 망상, 분열적으로 위치한다고 말한다. 그 말은 어머니와 젖가슴이 하나이면서도 자신의 구순적 만족의 대상이 되는 것이며, 그것이 어머니'라는 존재로 인식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머니는 항상 아이에게 모유를 주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하면 어머니의 젖가슴과 아이가 항상 연결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아이는 부분적으로 연결성을 느끼면서 자신이 연결되었다가 되지 않았다하는 것을 반복하게 된다.


연결이 되지 않을 때는 아이는 만족을 위해서 아버지의 남근을 추구한다는 것이 멜라니클라인이다. 그런데 이것은 아버지에게서 온다는 것보다는 어머니의 몸 속에 있는 남금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아이가 가지는 만족의 불연속을 채워주는 것은 결합된 부모의 환상이라는 것이다.


단계별로 보면 어머니와 아버지가 결합된 부모의 합일화된 단계로 인식되기 전에 어머니와 합일화된 상태가 있다는 것이고, 이것이 크리스테바에게는 매우 중요하 과정이다.


재미있는 사실은 크리스테바는 어미니와의 여결 이후에 모친 살해를 통해서 아버지와 어머니의 합일로 나아가는 것인데, 라캉이나 프로이트는 모친 살해(이상적인, 개념적으로 아이에게서 일어나는)를 이야기하지 않고, 오히려 오이디프스컴플렉스를 통해서 부친 살해만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어머니에 대한 모친 살해가 일어나는가?라는 질문을 크리스테바는 '아브젝시옹'의 사례를 통해서 증명한다.



동일화, 오이디프스


여성적 동일화의 단계에서는 아이가 어머니와만 연결되어 있는 것을 말한다. 이 시기에는 어머니와 합일화되면서 자신의 신체와 어머니의 신체를 하나로 보고, 그것이 계속 연결되어 있는 것을 상상계로 놓아 둔다. 그러나 어머니와 항상 연결되지 않기 때문에 다른 연결성을 찾게 된다.


그것이 바로 남근으로 전이되는 것이고, 어머니에게 채워지지 않는 욕망을 남근으로 대체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사실 여성은 남근이 없기 때문에 아버지를 욕망한다는 라캉이나 프로이트의 이론보다는 크리스테바가 말하는 욕망의 대체로 인한 남근의 추구가 더 현실적이라는 것이다.


이 때 아이들이 어머니의 젖가슴을 깨무는데, 이것은 어머니에 대해서 자신의 대한 증오를 표현하기도 하고, 계속 연결되지 않는 어머니의 젖가슴에 대하 보복일고 볼 수도 있는 것이다.


어머니와 분열된 아이들은 '망상분열증'을 알게 되고, 자신의 증오가 모친을 살해하거나 부친을 살해하면서 사디즘이나 죽음 충동을 느끼기도 한다고 한다. 자신의 마음대로 되지 않아서 파괴본능이 드러나기도 하는데, 그것이 우울증으로도 드러나기도 한다. 생후 3개월까지 자신의 증오가 발동해서 드러나는 공격이 다시 나에게 돌아오지 않을까라는 '박해불안'을 겪기도 한다고 한다.


이 때 아이들은 자신의 내면을 외부로 투사해서 자신의 존재를 인식한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단계를 지나면 정서적인 감정이 생기기 시작한다. 우울불안과 박해불안과 같은 시기가 잘 지나가면 사랑이나 정서의 고귀한 부분들을 배우게 된다. 이것은 언어 이전에 일어나는 과정이다. 이 곳을 지나면 이제 라캉이 이야기하는 '거울 단계'를 통해서 스스로 자신을 보는 단계에 들어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브젝트, 부정성


크리스테바의 이론에서 부정성을 떼어놀 수가 없다. 아브젝시옹은 계속해서 부정되어야만 만들어지는 분리, 경계이다. 헤겔에게서 있어서 부정성은 사유에 있어서 타자와 내가 다른 것, 자기와 다른이가 다른 것을 타자와의 '부정성' 때문인 것이다. 이 때 부정성은 확연한 구분을 통해서만 드러난다. 배제시키고 구분지어 버리면 사실은 그대로 부정성으로 머물러 있지만, 물론 이 때 헤겔의 전체성이 나오는데, 합으로 가는 가운데 사유 안에서 부정성과 긍정성이 하나로 만나는 지점이 나온다는 '이상주의적 낭만주의'의 전통을 만들어낸다.


아브젝트는 '어디로부터 나와서 어디로 가는 방향성'을 가지고 있다. 한마디로 두가지의 방향성이 등장하자마다 전제하는데, 그것은 양가감정으로서 성스러움과 혐오감이다. 혐오스러운 것이기 때문에 아브젝트가 시작되고, 그 아브젝트는 성스러움이라는 목적을 향해서 나아가는 것이다. 아브젝시옹이 모친살해의 과정에서 드러나는 것이라면, 어머니는 혐오스러운 것이 되고, 대체물을 찾다가 아버지의 남근에 대한 성스러움으로 나아간다는 것이다. 아브젝트의 부정성은 사실 투사적 동일화를 통해서 자신이 혐오하는 것이 드러나고 그러한 혐오적인 대상에게서 떠나려고 하는 것이 바로 아브젝트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술, 아브젝시옹


성스러움과 혐오의 두 양극단에서 아브젝시옹은 혐오에서 나와서 성스러움으로 다가간다. 그런데 현대사회에서는 성스러움의 의미가 많이 사라지고 종교적인 제의가 사라지면서 성스러움의 대상이 이제는 '예술'이 받아서 이어가고 있다. 예술은 혐오스러움을 성스러움으로 대체해주는 포지션으로서 인간의 근본적인 공포를 감싸주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인간은 경계에서 어떤 쪽으로 '아브젝시옹'하게 되어 있다. 자신이 서 있는 경계에서 다른 방향으로 발전하는 것을 볼 수 있다. 투사적 동일화와 반대방향으로 아브젝시옹을 하는 것이다. 현대의 예술은 그래서 외설이나 예술이라는 논쟁이 계속 진행되고 있을 것을 알 수 있다.





민네이션, 생각


인간의 인지발달에 따라서 인간이 자신의 지성을 만들어내기 이전에, 자신의 감각을 통해서 지성의 원천들을 섭력해가는 것을 볼 수 있다. 그것은 존재론적인 측면에서 감각으로 느껴지는 존재들의 대한 깊이가 인식론으로 이루어지는 것을 성장의 단계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존재들의 대한 감각이 있고 나서 그것들의 연결이 이제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이야기'를 통해서 감정들이 서로 연결되는 서사적 구조가 심연의 깊은 곳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닐까?


크리스테바는 모친살해의 시기에 사랑의 아버지의 존재가 등장한다고 말한다. 욕망으로 구성된 주체의 이야기는 아이들이 가지고 있는 소유나 집착의 단계가 어머니에서 아버지로 옮겨가지만, 크리스테바의 '사랑의 주체'에 대한 이야기에서는 아버지가 아이들의 어머니에 대한 연결, 집착, 대상과의 하나됨에서 주체로 나올 수 있도록 도와주는 사랑의 존재로 제시된다. 예속되어 있지 않는 주체를 위해서는 아브젝시옹이 필요하다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아브젝시옹을 통해서 주체의 성장이 일어나고, 이러한 주체는 창조성과 혁신 혹은 광기를 갖게 된다는 것이 크리스테바의 이론이다. 크리스테바의 이야기는 항상 '경계'의 문제가 될 수 밖에 없다. 서양철학은 지성전통의 길에서 볼 때, 몸의 전통이나 감각을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 그래서 책 중에는 '철학자 오이디프스'라는 책도 있다. 이것은 오이디프스 컴플렉스는 사실 지성적인 모험이지 실재적이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다.



민네이션, 질문


만약 제대로된 아브젝시옹이나 해결되지 않은 박해불안과 우울불안이 이후에도 영향을 미치는가?

생후 몇개월 사이에 일어난 일들이 계속해서 사람들의 문제를 만들어낸다고 할 수 있는가?

나는 혐오에 대해서 '어떤 아브젝시옹' 혹은 투사적 동일화를 느끼고 있는가?

 '혐오'가 구조화되는 것이 가능한가? 그리고 혐오가 구조화된 사회에서 인간은 자신이 동질화한 어떤 투사적 동일화된 대상에 대해서 아브젝시옹이 가능한가? 바운더리의 문제에 있어서 개인이 가지고 있는

아브젝시옹이 가정이나 사회까지 발전하는 것은 아닌가? 이 때 아브젝시옹의 아브젝시옹이 일어나는 것은 아닌가? 아브젝시옹을 막아서는 어떤 제한이나, 방벽이 사회적으로나 개인적으로, 가정적으로 존재할 수 있을까? 아브젝시옹하는 대상, 방법론도 프로이트가 이야기하는 '부정적 전이'의 한 방편으로 전달될 수가 있을까?

 인지적인 부분에서 감정적인, 충동적인 아브젝시옹을 벗어날 가능성은 없는가? 오히려 플라톤이 본 '사랑'의 이데아는 이런게 아니었을까? 어거스틴에서 본 사랑의 관점을 박사학위로 발표한 '한나아렌트'의 관점을 아브젝시옹의 관점에서 우리는 '무엇'이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 아닐까?


오늘의 강의 후.



민네이션, 자본주의


크리스테바의 이론으로 보면 투사적 동일화로서 혐의 대상이 나오고, 그러한 혐오의 대상은 '공포의 권력' 이 된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민주주의가 아브젝시옹하면서 나오는 근원은 오히려 자본주의가 아닐까? 그렇다면 자본주의를 공포의 권력으로 두지 않아야만 자본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자본주의가 가지고 있는 민주성은 '돈'을 통해서 모든 것들이 하나의 가치체계에서 우열이 가려지는 것이다. 돈이 많으면 상인도 주인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서도 민주주의가 가지고 있는 가능성과 같은 부분이 아닌가? 자본주의가 가지고 있는 민주성에서 민주주의가 나왔다는 것 혹은 연관성이 있다는 것을 막스베버가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정신에서 이야기하고 있다. 많이 고민해봐야할 문제다. 만약 경계짓기를 삐에르부르디외의 이론에서처럼 구별짓기로 본다면 자본주의는 민주주의를 공포의 대상으로 삼고 혐오함으로써 자신을 지키는 방식으로 간다는 것으로 증명해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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