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리아크리스테바_철학아카데미
20171012_철학아카데미
기호정신학과 줄리아 크리스테바_김선하교수
라캉과 크리스테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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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테바는 사실 페미니즘에서 많이 알려진 학자는 아니다. 그러나 타자성이라는 의미에서 자기정체성을 인간성 속에서 찾는 작업을 통해서 크리스테바는 나름의 페미니즘의 방향성을 제시한다. 페미니즘은 어떻게 보면 남성들이 만들어 놓은 담론들의 생성방법을 그대로 밟고 있는 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성이라는 완전히 새로운 존재는 기존 질서의 타자로서 완전히 새로운 담론 생성방법(담론이라는 언어조차도 기존 질서의 상징계안에서 만들어졌다)을 만들어 낸다.
줄리아 크리스테바, 3가지 담론
크리스테바는 자기정체성 안에서 계속해서 타자성을 발견한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시적언어, 모성담론, 정신분석을 통해서 자신의 이론을 전개시킨다.
시적 언어, 크리스테바
자기정체성 속에서 타자를 발견하는 것은 상징계 안에서 드러난다. 그것은 바로 언어에서도, 바로 시적언어에서 드러나는 새로운 타자성이다. 질서와 기표를 가진 시는 지금까지는 감성적인 것 혹은 정서적인 것으로 치환되어 버렸다.그러나 크리스테바는 자신의 시의 의미가 사실은 매우 급진적이고 혁명적이며 그러한 혁명성은 시가 가진 판단과 진술, 논리적인 속성에서 찾을 수 있다고 말한다.
모성담론, 크리스테바
크리스테바는 한 명의 자녀를 두고 있다. 자신의 출산경험을 중심으로 어떻게 자기의 정체성 안에서 육체가 가진 충동이 타자를 이해하게 만드는지를 고민했다. 모성이 가지고 있는 담론의 대부분은 기혹계에 속한다. 기호계라는 것은 semaion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은 크리스테바가 만들어낸 구조이다. 기호가 가지고 있는 세계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라캉이 말하는 상징계하고는 다른 차원의 세계이다. 육체는 철저하게 충동적이고 그러한 육체의 속성은 새로운 기호들을 계속해서 만들어낸다고 할 수 있다.
정신분석, 크리스테바
크리스테바 이전까지 타자성의 철학에 대해서는 정신분석이 남성 분석학자들의 이론을 많이 따랐다.그렇기 때문에 여성이 보는, 여성으로서 타자가 보는 정신분석학은 전혀 존재하지 않았따고 말한다. 크리스테바는 이러한 여성이 사라져버린, 철저히 타자가 숨져버린 지점에서 다시 시작하고 있다.
라캉, 크리스테바
출산을 통해서 육체가 탄생하고 이러한 육체는 살아가면서 언어화된다. 우리가 육체를 육체로 이해하지 못하고 기호로 이해하고 있다는 것이다.그래서 육체는 언어에 의해서 타자화되고 자기 정체성을 잃어 버린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은 생물학과 에너지론으로 구분할 수 있다. 라캉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과 소쉬르의 언어철학을 바탕으로 생물학적인 부분에서 언어학으로 옮겨온다. 기표와 기의의 문제에서 기의는 언제나 무의식의 차원에서 발동한다. 크리스테바는 프로이트에서 라캉을 거쳐 언어로 돌아오고 이것이 다시 육체로 향하게 된다. 크리스테바는 여기서 육체성을 상실한 상징계에서 분리해낸 전상징계로서 기호계를 탄생시킨다. 이것이 모성담론과 연결된다. 인간이 태어나고 무의식이 만들어지기 이전에 그러니깐 상징계가 만들어지기 이전에 육체는 자기 자신만의 기호를 가지고 있었다.그러나 상징계 안으로 편입되면서 육체가 가지고 있는 기호계는 점점 소멸한다.자신만이 가지고 있는 기호계가 소멸하면서 반대로 상징계는 점점 확대되는 것을 볼 수 있다.상징계는 아버지의 질서인데, 기호계는 아버지의 질서의 타자성을 가진체로 모성담론을 만들어낸다.
라캉의 거울단계, 욕망이론
주체형성시기 : 라캉에 의하면 생후 6개월에서 18개월 사이에 아이는 거울 단계를 거친다고 한다. 거울 단계 이전의 시기에 아이는 상상계의 영향을 지대하게 받는다. 상상계란 거울 단계에 가장 강력한 차원으로, 이때 아이는 어머니와 자기를 동일시하는 상상을 한다. 엄마와 아이는 2자관계로 상상계를 만들었다가, 아버지가 등장하면서 3자를 통한 새로운 상징계가 만들어진다. 어머니의 욕망이 자신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되면서 상징계 안의 언어를 습득하게 되는 시기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남근Phallus 되기가 아니라 남근 가지기의 단계로 접어든다고 한다. 더욱이 이 시기에 아이는 언어를 획득하기 이전이기 때문에 모든 것을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한다. 이 단계에서 아이는 거울 속 자신의 영상을 보면서 자신과 동일시하게 된다.어떤 의미에서 아이는 하나의 통일된 자아가 되기 위해 자신과 거울 속의 영상이 되어야 한다. 여기에 소위 라캉의 분열된 주체가 나온다. 이것이 바로 정립적 꺽임 thetic break가 생긴다. 처음에 어머니와 맺었던 2자 상상계가 사라지고 아버지와의 3자 상징계가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크리스테바는 라캉이 상징계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아이가 갖는다고 하지만, 사실은 이미 어머니와 아이의 관계에서 상상계를 구성하였다는 것이다. 말을 배우기 전에 이미 아이들은 육체로 자신의 정체성을 가지게 된다고 한다. 아이들은 이 때 과잉과 결핍을 항문으로 배설을 하고 입으로 섭취를 하면서 배우게 된다.
라캉, 욕망욕망
라캉에게 있어 욕망이란 타자의 욕망이다. 즉 하나의 욕망하는 주체가 되기 위해서는, 둘의 타자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욕망은 타자의 욕망으로 구성되기 때문이다. 내가 욕망하는 것만 같지만, 그것은 실제로 타자(그것은 대개 부모나 사회, 국가, 나라 등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아버지의 기표들)에 의해 구성된 욕망이다. 상상계 시기의 아동은 어머니와의 완전한 합일상태에 있다는 환상을 갖는다.하지만 이윽고 어머니의 잦은 현존과 부재의 연속 속에서 어머니가 자신만을 완전히 필요로만 하지 않는다는 것을 무의식적으로 깨닫는다. 여기서 어머니가 자신만을 완전히 필요로만 하는 것을 라캉은 팔루스Phallus라고 부른다. 즉, 상징적 남근이다. 여기에 아이는 상상계에서 상징계로의 문을 연다. 왜냐하면 아이는 엄마에게 자신이 팔루스, 즉 남근이 아니라는 것을 무의식적으로 깨닫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이는 무의식적으로 직감한다. 엄마가 자기가 아닌 아버지의 남근을 욕망한다고, 여기에서 오이디프스 콤플렉스가 작동하기 시작한다. 이때 아이는 내부적으로는 어머니의 거절인 젖떼기를 경험하고, 외부적으로 아버지의 거세위협을 직면한다. 그리고 아이는 아버지의 기표를 받아들인다. 아버지의 기표는 언어체계이다. 아버지의 법은 어머니와의 합일의 욕구를 제한시키는 것이다. 대신에 아이는 어머니와의 항상은 아니더라도 함께할 수는 있게 된다. 이 때 아이는 어머니의 남근이기being에서 남근 가지기having로 전략을 바꾼다. 이 과정이 바로 아이가 상상계에서 상징계로의 이동을 야기한다. 아이는 이제 아버지의 기표인 상징을 욕망한다. 그것은 바로 대타자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제 큰 타자는 아버지의 기표이고, 아이는 그 기표를 따라야지만 자신의 욕망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는 환상을 갖는다. 그래서 라캉의 욕망은 타자의 욕망이다. 자신의 욕망이 아닌, 타자에 의해서 철저하게 구성된 욕망인 것이다. 그래서 이제 아이는 어머니의 남편, 남근되기를 포기하고 누군가의 남편, 남근이 되기를 욕망한다. 그래서 이제 아이는 상징계로 접어든 것이다. 이것이 거울단계를 거친 아이가 상상계에서 상징계로 옮겨가는, 외디푸스 콤플렉스의 거세를 통한 아이의 주체 확립의 과정이다.
크리스테바, 상상계
그리스테바는 상상계의 2자 관계가 아버지의 등장으로 3자 관계의 상징계로 바뀌는 지점에서 기존의 상상계는 부정되는 것이 아니라 배제된다고 이야기한다. 배제라는 것은 objection인데 이것은 헤겔의 정-반-합으로서의 구성원리를 비껴내는 것을 뜻한다. 비천시하면서 거리를 두는 것은 사실은 정반합의 변증법에서 발전을 이야기하지 않고 이미 존재하는 것들이 잊혀지는 것을 말한다. 완성되어가고 질서를 잡는 네트로피가 아니라 사실은 사리지고 경계가 허물어지는 엔트로피가 가장 기본적인 인간의 특징이라는 것이다. 배제는 상한 우유, 시체의 부패와 같은 것이다. 배제는 경계의 문제이고, 장소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가치 판단으로 더럽거나 부정적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이것이 바로 크리스테바가 시적언어를 사용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렇게 상징계 속에서 질식해져버린 상상계를 부활시키는 작업이 바로 시적 언어인 것이다. 크리스테바는 출산이라는 과정 자체 모성을 통해서 인류를 계속해서 지탱해 왔다는 것이다. 크리스테바는 상상계 - 상징계 - 실재계로 가는 라캉의 도식을 따라가지 않고 상징계 안에서 기호계와 상징계의 둘을 시계추처럼 왔다갔다 하면서 충동을 조절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라캉이 이야기하는 충동들이 만연한 실재계의 구분보다는 충동들이 아예 상상계에서 존재한다는 반대 방향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크리스테바는 사랑에서 윤리가 발전하게 된다는 의미에서 nerethic이라는 새로운 신조어를 만들어냈다. 무로부터의 창조라는 히브리 개념과 유로부터의 창조라는 헬라개념을 넘어서서 크리스테바는 '태초에 사랑이 있었다'라고 패러디하고 있다.
크리스테바, 라캉 극복
크리스테바는 생각보다 라캉의 거울단계에 대한 논의에 있어서 남근이라든지, 팔루스라든지하는 남성의 상징들에 대해서 문제제기하는 것에 열을 올리지 않는다. 물론 프로이트는 자신의 정신분석을 생물학적인 차원에서 해석하여 여성에 대한 생물학적 결정론, 즉 남근도 가지고 태어나지 못한 태생적인 열등아로 낙인찍는 문제로 크게 비판 받았다. 하지만 어린아이의 주체형성과정에서의 어머니와 아버지를 생물학적인 차원이 아닌 상징적, 의미론적 차원에서 풀어내는 라캉의 경우에는 프로이트가 직면한 비판을 피해갈 수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크리스테바도 본인의 견해를 밝힌다. 나는 여자다'라는 신념은 나는 남자다라는 신념만큼 부조리하고 반계몽적이다. 여성이란 말 속에서 나는 재현될 수 없는 것, 말로 표현되지 않는 것, 분류상의 명명법과 이데올로기를 넘어서 있는 어떤 것을 본다. 바로 이 점에서 크리스테바에게 있어서 여성이란 생물학sex적이거나 사회학gender적인 실체를 가리키기 보다는 어떤 특성을 지친하는 말인 것 같다. 그래서 정혜경은 크리스테바에게 있어서 여성적 특질의 체계화는 체계화 될 수 없는 것의 체계화로서 가능하지도 않을 뿐더러 자체 모순적인 작업일 뿐이다'라고 주장한다. 즉, 섹슈얼리니티나 젠더의 문제 이전에 크리스테바의 관신사는 다른 곳에 있다는 것이다. 크리스테바가 라캉에게서 집중하는 부분은 전오이디푸스 단계의 문제이다. 그녀는 이를 육체적 충동의 시기로 규정하면서 기호계라고 부른다. 즉, 육체적인 충동의 느낌, 신호, 징후가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기호적 충동이다. 그리고 어머니와의 합일을 느끼는 시기에 이미 주체가 만들어지는 과정에 있다는 것이 크리스테바의 입장이다. 그래서 크리스테바가 상정하는 주체는 문제적인 과정중의 주체이다. 그녀는 상징적 질서와 오이디푸스의 문제는 다 인정하되, 전 오이디푸스의 문제인 기호적 질서의 문제는 어머니와의 합일의 경험인 모성의 흔적이 아버지의 기표체계로 적응해가는 데에 방해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도움이 되고, 또한 상징계에서 주체가 생겨난 것이 아닌, 이미 기호계의 단계에서 주체는 생겨나고 있고, 상징계에서 주체가 완성된 것이 아닌, 기호계에 생겨난 모성의 흔적을 회복시켜 나가는 것이 주체의 회복이라고 보았다. 크리스테바가 말하는 전 오이디푸스적인 기호적 소질은 언어라기보다는 리듬에 가깝다. 이 기호적 리듬이 이후에 아이가 언어에로 진입하는 출발점이 된다. 리듬은 하나로 결합된 아이와 엄마의 육체의 리듬소리이다.리듬소리 뿐만 아니라 아이의 웃음과 울음 또한 기호의 증거가 된다. 이미 아이가 언어를 습득하기 전에, 상징계로 진입하기 전에 음악을 습득한다. 음악은 입으로 말하는 것에 우선한다. '유아는 말하는 주체는 물론이고 주체의 구성에도 선행하여, 충동의 직접 방출이랄 수 있는 음악을 만들어 낸다. 유아는 고통이든 쾌락이든 긴장을 방출시킬 목적으로, 생존할 수 목적으로 소리를 뱉어낸다. 이러한 소리의 하나가 웃음과 울음이다.
라캉 이전, 생물학적인 모성
크리스테바는 아버지의 기표의 세계로 들어가기 전 모성적인 경험이 사실 아버지의 세계로 들어가는 힘이라고 보았다. 모성의 경험을 평생 가지고 사는데, 평생 억압해야 한다고 라캉식의 정신분석에서 이야기하는 것의 문제는 지적하고자 하는 것이 크리스테바의 문제의식이다. 크리스테바는 기호계를 통해서 아이의 근원적인 생물학적 충동이 억압된게 아니라 근원적인 충동의 세계가 그대로 남아 있으면서 그게 아버지의 세계에 진입하도록 도와준다는 것을 들어낸다. 그것은 아이의 주체형성과정에 어머니, 즉 여성적 존재의 위상을 되찾는 것이 될 것이다. 사랑으로 모성이 다시 상징계의 자리를 잡으면, 그 전까지 프로이트를 통해서 주어진 상징계 속에서 아버지의 위상이 달라진다. 아버지는 어머니와 같이 비천해짐으로써 '인간되기'(사랑을 품고, 타자를 품을 수 있는)를 도와주는 동반자이면서 친구가 되는 것이다.
상징계, 경계
상징계 내에서 상징안에 갖히지도 않고, 상징을 이탈하지도 않는 크리스테바의 기호계와 상징계의 시계추 운동을 일컫어 '경계에 선 크리스테바'라고 한다. 전체주의가 가지고 있는 문제는 상징계 안에 모든 언어와 존재가 갖혀버린다는 것이다. 반대로 상징계를 이탈해 버리면 분열증과 정신이상을 가지게 된다.그러나 소위 과정 중의 주체, 말하는 주체를 이야기하는 크리스태바의 과정철학'은 매우 시적인 표현, 시적담론으로 보여질 수 밖에 없다.
민네이션, 생각
아버지의 질서는 모든 것들이 이미 정해진 상태로 역사가 되었다. 크리스테바는 이미 정해져 버린 지점에서 다시 시작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 시작은 상징계에서가 아니라 상상계에서인 것이다. 그래서 이것을 기호계라고 했고, 기호계는 패턴들과 형상화의 단계이다. 보는 것이 먼저인 것이다. 보는 것들이 언어 이전에 존재했다는 것을 이야기한다.그렇기 때문에 기존의 패미니즘이 추구하는 부정으로서의 남성성에서 여성성의 타자성을 떼어내는 것이 아니라, 남성되기 이전의 정체성에서 다시 시작하는 것이다. 그래서 라캉을 뛰어넘고 프로이트를 넘어선다. 그런데 한가지 궁금한건, 아이는 이미 태어나기 전에 어머니와 1자 관계가 아니었는가? 태줄로 연결된 그래서 이미 그 전에 음성으로 어머니의 언어 안에 상상계를 파악하는 것은 아닌가? 그런데 라캉세미나 7에서 보는 바와 같이(세미나 11에서의 라캉이 아니라) '큰 사물'인 주이상스 상태가 사실은 크리스테바가 이야기하는 기호계가 아닌가? 라캉의 의하면 인간이 태어나면서 어머니와 합일은 끝났다고 하고, 이러한 합일을 원하는 성적인 욕망인 주이상스는 영원히 도달하지 못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잘 생각해보면 생성이라는 의미에서 욕망의 주체가 되어가는 과정이 인간의 성장이 아닌가? 사실은 없음, 떨어짐, 사라짐으로써가 아니라 생성, 됨, 무엇인가가 되어가는 과정으로 인간을 바라볼 수는 없을까? 이것이 혹시나 생성철학, 혹은 생철학의 기원이 아닐까? 인간의 무의식은 자연스럽게 objection하면서 대상화를 시키고, 자신의 주체성이 살아나는 것은 아닌가? 여기서 우리의 두뇌가 활동하는 것은 아닌가? 자유의지가 인간이 되게 만드는 밑걸음이라고 하면 인간은 자신의 무의식과 의식의 차원에서 무엇인가를 선택하게 되는 것이다. 태중에 아이들은 어머니의 몸을 경험하고, 음성을 듣는다. 그리고 어머니의 손을 경험한다. 이러한 경험은 인간이 처음 겪는 경험이다. 이러한 경험을 통해서 아이들은 어머니로부터 세상을 경험한다. 그 세상은 언어로 되어서 이해하는 것이라기보다는 감정적이고, 감성적이며 정서적인 부분이다. 번연계와 연결되어 있을 것이다. 번연계는 그래서 시적언어가 도달하고 싶어하는 지점의 어떤 직감을 부활시키는 것을 볼 수 있다.
민네이션, 연결
크리스테바의 이야기를 들으니 몸의 현상학을 이야기한 퐁티가 생각이 난다. 퐁티와 같은 결을 가지고 있는 것과 같다. 인간의 몸에 대한 현상이 사실은 우리의 원초적인 생각과 인식을 가지게 되는 것은 아닌가? 이러한 목소리에 의한 부분은 데리다의 목소리 개념과도 연결될 수 있다. 구조주의자들의 특징은 현실주의적이다. 다시말하면 계층으로 사람들을 이해하지 한 사람 안에 의식의 흐름으로 인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계층화는 계층들간의 관계를 대립적으로 형성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러한 대립형성은 구조가 새로운 구조와 싸우는 방식으로 보수와 진보의 진영을 결정하게 되는 것을 볼 수 있다. 페미니즘이 가지고 있는 남성과 여성이라는 계층화가 이미 구조주의적이고, 마르크스적일 수 있지 않을까? 그런데 마르크스와 프로이트는 자본주의의 반동하여 생긴것들이다. 물론 이건 들뢰즈에 의하면 그렇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페미니즘은 구조주의 재탕이 될 수 있고, 이러한 대안은 한계가 있을 수 있지 않을까? 헤겔의 정반합에서 반정합으로 가는 것처럼 들리기도 하기 때문이다. 모성'이라고 표현하는 크리스테바의 표현에 많은 사람들이 이미 상징계의 담론에 사로잡혀 비판을 많이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다시 말해서 '모성'을 '사랑'이라고 본다면 사랑담론은(모성담론)은 누군가를 품었을 때, 잉태했을 때만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런의미에서 사랑이 사라진 인간이 과연 인간일 수 있을까라는 극단적인 생각도 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