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리스블랑쇼에게 배우는 사유
모든 것들이 항상 경계에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모든 것들은 중성의 장 안에 있다
중성은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현실적인 것이면서
하나의 개념으로 포섭되지 않는 사상의 모험이기도 하다
블랑쇼는 자신의 책들에서 사유하기와 철학을 구분하고
개념을 정해서 결론을 내는 철학을 멀리하면서
자신이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른체
말하기와 고민을 시작하는 것을 '사유하기'라고 한다
그러므로 작가들은 이미 시나리오가 나오는 이상
작가의 중성은 무한의 영역을 배제시켜버린다고 한다
내가 이미 무한에 한 획을 그음으로서
무한이 유한으로 바뀌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유하기는 이러한 유한의 사유가
다시 무한의 사유로 돌아가는 것으로써 질문하기이다
내가 질문하고 있다는 것도 모를 만큼
깊이 그 질문에 빠져 있는 것이 사유하기인 것이다
헤겔의 부정의 변증법은 낭만주의자였던
헤겔의 이상을 보여준다
아름다움과 윤리적인 이상을 '합'으로 이미 가정하고
그것의 출발적 개념을 '정'으로 정한다
그런 현실에서 그러한 아름다움을 방해하는 경험들을
'반'으로 놓아야만 그 반을 통해서 합이 더 아름답게 된다
미리 방향설정을 하고 목적을 정하고
안전하게 가는 길인 것이다
그런데 블량쇼는 미리 정해둔 목적과 답을
'중성'의 장 안에 넣어 버린다
날카로운 '경계'선 안에서 대립하던
이념과 현실들이 하나의 무한의 장 안으로 초대되어
새로움과 두려움이 잉태되는
무엇인가 기대되는 '그저 있음'의 상태가 되는 것이다
블랑쇼에게서 나는 현상학의 근본을 본다
후설의 현상학보다 이전에 그 현상을 이해하는 방식은
먼저 질문하는 것이다
베르톨트 브레히트처럼 낯설게 보는 것이다
낯설게 보는 것 조차 자신이 잊어먹고
'어 저건 머지?'라고 묻는 순간에
무한의 사유를 하는 존재는
중성의 존재가 된다
근본적으로 내가 사람들을 만나는 방식
그리고 글을 쓰는 방식에도 고민이 생긴다
왜 그렇게 많은 글들이 서랍에서 놀고 있을까
왜 그렇게 많은 고민들이 사람들과 만나면 생겨나는가?
답을 정해놓고 만나는 것들
항상 도착적인 생각을 무너뜨리는 무한
나는 다시 길을 찾은 것 같았다
'답'이 아니라, 사실은 '길'을 찾는 것이었다.
계속해서 삶 속으로 틈입해오는
진리와 관계와 사람들
나는 그것과 그들과 함께
나와 너의 관계를 만들어가는 무한을 사는 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