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리아크리스테바 '시와반시'_철학아카데미
20171109_철학아카데미
줄리아크리스테마_김선하 교수
나르시수스적 주체와 상상의 아버지_서양문화의 도착성에 대한 반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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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케릴 올리버 '크리스테바 읽기'라는 책에서 '시와 반시'라는 장을 주로 볼 것이다. 크리스테바가 주장하는 서양문화의 도착성의 핵심은 남근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허구의 세상이라는 것이다. 성도착적인 것은 진정한 핵심에 도달하지 못할 때 다른 것에 그러한 노력을 기울인다는 도착증의 성적 전환에 대해서 고민하게 된다. 성도착은 사실은 잘못된 방향을, 기표를 잡았기 때무에 일어난다고 볼 수 있다. 성도착이 일어나는 것은 진정한 자아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서양문화가 전반적으로 남성의 성기를 중심으로 모든 것들을 해석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사건이다. 이러한 사건에서 여성들은 비천시되는 것이 아니라 욕망의 대상이 되면서 그러한 욕망의 대상은 비천시되지 않고 추가할 목표가 되면서 성도착의 희생양이 되는 것을 볼 수 있다. 희생양이지만 그래서 원래는 새로운 존재로 다시 부활해야 하지만, 문제는 다시 성도착의 주체로 부활한다는데 문제가 있다.
고고학적 외디푸스 삼각관계
모성적 육체 내에서 삼각관계는 다음과 같다. 나르시수스적 주체는 어머니의 젖가슴과 동일화하고 있다. 이것이 1차 전이이다. 비천한 어머니는 아브젝시옹으로 작용한다. 상상의 아버지는 구조적으로 동일화하여 어머니의 몸과 같은 비천시'되는 작용을 한다.
서양문화, 숨기고 있는 것
서양문화는 완전히 남성중심적으로 구성되었다. 아버지의 정액에서 아이들은 자신들이 주이상스(어머니의 몸, 큰 욕망, 대상)와 멀어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고 한다. 남근, 페니스는 서양철학 혹은 서양문학에서 완전한 중심으로 전제하고 시작되는 것을 볼 수 있다. 라캉이나 프로이트 방식은 항상 이런식의 전제 위에서 욕망을 추구하는 주체로 주장한다. 이러한 구조에서는 욕망자체가 당연시되고, 철저하게 남성 중심으로 만들어지는 욕망을 추구하는 사회구조로 확장된다. 그러나 크리스테바는 이것을 역전시킨다. 비천해지는 어머니 또한 비천해지는 아버지의 모티브에서는 비천해지는 과정에서 태어나는 주체는 철저하게 중심적인 사랑의 핵심이다. 어머니의 몸을 주이상스로 보는 것이 아니라 생명이라는 것을 통해서, 생명을 잉태한 모성은 점점 비천시되어서 중심에서 멀어지고, 그것은 새로운 주체를 중심으로 탄생시키는 것을 볼 수 있다. 서양문화는 이러한 생명과 사랑의 주체를 일부러 은폐하고 여전히 욕망을 추구하는 주체를 사람들에게 전파하고 그에 따른 남성우위의 구조를 자연적으로 전제시킨다. 이것이 서영문화가 숨기고 있는 것이다.
외디프스, 주체
크리스테바가 기술한 '전상징적' 상상 단계에서의 나르시수스적 '주체'는, 비천한 어머니로부터의 분리를 뒷받침하는 자아 이상체의 씨앗이다. 즉 상상의 아버지와의 전이적 동일화의 결과이다. 크리스테바는 외디프스적 주체는 나르시수스적 주체라고 말한다. 크리스테바에게 고고학적인 외디푸스 삼각관계는 모성적 육체 내에서 설정된다. 이 외디푸스 삼각관계의 당사자는 나르시수스적 주체, 비천한 어머니, 상상의 아버지이다. 나르시수스적 주체인 아이는 어머니의 육체와의 관계, 특히 어머니의 젖가슴과 관련을 맺고 있고, 거기서 자신을 발견한다. 원래 아이는 어머니의 젖가슴과 동일화한다는 것을 상기하라. 그러나 분리하고 이유하려는 시도에서 아이는 젖가슴과 어머니를 비천시 한다. 이 시점에서 아이는 어머니의 성의 불확정성과, 그 육체의 안엣 것을 밖으로 꺼내 주는 통로를 통해 이루어진, 자신의 출생을 확인한다. 한 때, 어머니의 젖가슴에 붙어 있던 아이는 어머니의 육체와 그 육체의 산물을 구분하려고 발버둥친다. 아이는 자신을 출생시 어머니의 육체에서 배출된 산물, 폐기물, 비천한 전대상으로 본다. 여기서 상상의 아버지나 잉태와의 동일화가 구조에 나서게 된다. 아이는 더 어머니의 육체 안으로 자궁 안으로 되돌아가고, 다시금 언어와 삶을 의미로 채우는 주이상스가 가득한 일차 장면으로 되돌아 간다.
모성, 대체
모성적 육체 내에서 외디푸스 구조의 세 항목은 모성적 젖가슴, 모성적 성, 모성적 자궁이다. 크리스테바는 진정한 의미의 외디푸스 구조를 위한 장치를 제공하기 위해 모성적 육체이다.크리스테바는 진정한 의미의 외디푸스 구조를 위한 장치를 제공하기 위해 모성적 육체 내애세 외디푸스 구조를 설정한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이미 육체 내에 있는 상징적 논리의 재각인함으로 언어 속의 육체를 재각인하려는 그녀의 더 큰 계획의 일환이다. 큰 상징계의 구조와 논리는 이미 육체 안에, 특히 모성적 육체 안에 작용하고 있다.외피푸스 구조까지도 여기서 예형될 수 있다.
전통, 정신분석
반면에 전통적인 정신분석의 환원적인 글읽기로는, 어떤 한 단계에서 자아는 실재와 이드를 대항시킴으로써 형성된다. 다른 단계에서 자아는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의 싸움터가 되는데, 이 싸움에서 만약 과정이 정상적이라면 아버지가 이기고 어머니에 대한 욕망은 잘해야 승화되고 못되면 부정된다. 크리스테바의 텍스트에서 모성적 기능은 부성적 기능에 선행하고, 또 그것을 대체한다는 것을 시사한다. 상상의 아버지는 전통적인 법의 아버지보다 더 중요하다. 그리고 '이 아버지'는 단지 어머니 사랑의 변장일 뿐이다. 상상의 아버지에서 엄한 외디푸스적 아버지로의 외디푸스적 이동조차 어머니의 사랑에서 어머니의 욕망으로의 이동임이 밝혀진다. 모성적 용기'라고 부르는 어머니의 육체에서 어머니의 사랑이나 욕망으로의 이동에 관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크리스테바가 어머니의 모성적 육체와 어머니역을 분리시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필수적인 조치이다. 크리스테바가 왜 모성적 육체와 여자의 육체를 분리시키는지 그 이유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그녀는 어머니역에 대한 새로운 담론을 시도하는데, 이것은 여성의 비천시 없이 오직 필요한 모성적 육체의 아브젝션으로 간주되는 요소만 설명해 줄 수 있는 담론이다.
모성, 여자
크리스테바는 모성을 가진, 다시 말하면 어머니로써 여자와, 일반적인 상황에서의 여자를 구분한다. 아이와 한 몸이 되어 있던 어머니와 아이를 잉태하지 않은 여자를 구분하는 것이다. 따라서 크리스테바의 논리에서는 항상 모성적인 어머니, 그래서 사회에 혹은 가정에 헌신하는 어머니로 정해져 있지 않는다는 것이 중요하다. 이러한 전제를 뒤집는 것 자체가 새로운 방식의 담로닝 된다는것을 알 수 있다. 그 자체로 페미니스트적이지만 페미니스트를 넘어서는 것이다. 일단 모성에서 아이를 낳으면 아이는 어머니와의 차이를 발견하고 분리가 일어나며, 어머니는 비천시된다. 이 때 아이는 주체가 되고, 그 때 상상의 아버지를 통해서 자신의 동일화를 이룬다. 그리고 다시 아버지를 통해서 어머니와의 관계가 밝혀지고, 어머니와 자신이 동일화가 된다. 동일화하는 것이 욕망의 통일이 아니라, 사랑하는 주체 혹은 서로 비천시함으로, 서로 아브젝트함으로써 자신들의 자리를 갖는 차원에서의 동일화인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삼각관계에서는 각자가 자신의 자리에서, 주체로 당당하게 설 수 있고, 이들을 움직이는 것은 사랑이고 그 방법은 비천해기'를 통한 아브젝트인 것이다.
모성, 전통
모성에 대한 전통적인 담론에서 여자의 육체는 모성적 육체로 환원된다. 크리스테바는 여자와 어머니역의 이런 억압적인 표상화라는 독을 없앨 해독제를 제공하려고 시도한다. 그녀는 어머니역에는 영양을 공급하는 모성적 육체, 또 아이와의 육체적 관계 이상의 많은 것이 내포되어 있다고 시사한다. 모성적 기능은 육체, 사랑 그리고 욕망의 복합체이다. 그것은 실재계, 상상계 그리고 상징계를 두루 걸쳐 작용한다.
상상, 아버지
크리스테바에게 모성적 육체는 실재계, 상상계 그리고 상징계의 영역에 두루 얽혀 있다. 그러나 그녀는 상상의 아버지라는 인물을 통해 상상계와 부성을 연관지움으로써 모성적 육체와 실재계 사이의 관계를 강조하는 것 같다. 만약 상상의 아버지가 아이로 하여금 그의 잉태와 동일화하도록 허용한다면, 아이는 또한 자신을 어머니의 육체뿐 아니라 아버지의 육체의 산물로도 보는가?만약 그렇다면 비천한 어머니뿐만 아니라 비천한 아버지도 갖게 된다. 아브젝션의 체험은 일차적으로 아이의 육체와 어머니의 육체의 경계의 혼동에서 온 것임을 명심하라. 만약 아이가 그 자신을 잉태의 일부로 상상하는 힘을 갖고 있다면, 아이는 그 자신을 아버지의 육체의 분비물, 폐기물로 상상하는 힘을 가지지 않겠는가? 더구나 이 환상은 그 아버지의 자아 아브젝션에 대한 강력한 공범인 것이다.
사랑, 주체
크리스테바의 기독교 상상계에서 무원죄 잉태에 대한 설명이 이런 해석을 시사한다.'태초에 사랑이 있었다'에서 크리스테바가 아이가 잉태에서 배제되는 환상을 피하기 위해 상상의 아버지와 동일화한다고 설명한 것을 회상하라. 그러나 상상의 아버지는 상징적 카운터파트인 법의 아버지와 함께, 실제 아버지, 특히 아버지가 아이에게 하는 육체적 기여를 배제시키고 있다. 동정녀는 육체의 산물에 의해서가 아니라 말씀에 의해서 잉태된 것이다. 아이가 지니기에 너무 큰 환상은 자신도 역시 아버지의 몸에서 나온 폐기물이라는 사실이다. 만약 그렇다면 아버지와의 동일화는 아브젝션에 평형추로서 어떻게 작용할까? 육체에서 분리된 아버지의 환상이 비천한 모성적 육체를 상쇄하기 위한 작용을 하는 반면, 그 배경에는 더 혼란스런 비천한 환상, 즉 아이가 단지 아버지의 몸에서 나온 폐기물이라는 환상이 도사리고 있다.
페니스, 상징
이것으로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에 나타난 페니스, 남근에 대한 성도착적인 집착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비천체가 승화될 때 페니스, 남근은 진정한 의미의 개체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성도착을 거쳐 초객채beyond-the-object의 지위로 승격된 미결정체이다. 성도착자는 비천체의 혐오스럽고 구역질나는 힘에 매료되어 그 힘을 성애화, 우상화한다.물론 그 위협은 상존하는 것이다. 비천체는 매력적이지만 위협적이다. '사랑의 이야기'에서 크리스테바가 지적하듯이, 성도착이 제공하는 것은 통일의 상실을 덮을 부서지기 쉬운 막뿐이다.
성도착, 타자
'타자는, 자신의 일부나 분노를 성애화함으로써, 자신의 상실을 저지하거나 극복하려고 시도하는, 상처받고, 찔리고, 피흘리는 자아를 발견한다. 성도착(관음증과 노출증에서 폐기물의 성애화와 가학피학성 성애에 이르기까지)는 비천채의 가리개, 부서지기 쉬운 막을 제시하는데, 이것은 주체도 객체도 아니며, 거기서 의미화되는 것은 두려움,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이 되는 공포이다.'
어머니, 타자
성도착자는 분열된 자아(어떤 타자와도 분리되고 자아 내에서도 분열된)를 발견한다. 어머니, 타자의 상실과 그것에 따른 자신의 상실을 방지하기 위해 성도착자는 자신의 일부를 성애화하고 그것으로써 잃어버린 큰 사물(미객체, 어머니와의 결합)을 대체한다. 그래서 그의 사물은 그가 잃어버린 큰사물을 대신하고, 한 성애화된 초큰사물Think-beyond, 즉 잃어버린 크사물인 어머니를 위한 부서지기 쉬운 막, 얇은 가리개, 심지어는 속임수일 뿐이다.
라캉, 남근
라캉은 자신의 남근이 프로이트의 '거시기'와 관련이 없다고 주장한다. 그의 남근은 그거을 초월하는, 어떤 대상도 초월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속임수이다. 그것은 기의의 가능성을 파괴하는 뛰어난 기표이다. 속임수라는 것이 일단 밝혀지면 남근 뒤에 우리가 보는 것은 라캉의 '입 벌린 구멍'일 뿐이다. 이것, 즉 우리의 완전성을 금지하는 이 구멍은 누구의 구멍인가? 비천한 어머니와 출생의 아브젝션은 비천한 ㅇ버지를 가려 줄 신총치 못한 가리개일 뿐인가?결국 아이는 개인 통로를 통해 어머니와의 육체에서 고스란히 나오게 된다. 그러나 '아이'는 아버지의 육체에서는 사실상 아직 아무것도 아닌 것not-yet, '잠재적인'존재로 나온다. 문자 그대로 아직은 아무것도 아닌 '아이'는 생물과 무생물 사이의 경계를 따라 움직이는 부숴지기 쉬운 존재를 가진다. 그것은 아버지의 육체에서 자신의 개인 통로를 통해서가 아니라, 쓰레기 구멍을 통해 폐기물로 모성적 육체에 나타난 것이다. 어머니의 육체에서 나올 때의 아이와는 달리 아직은 아무것도 아닌 아이는 그 자신의 개인적 존재에 대한 지주를 수반하지 않는다.그보다는, 이 아이는 자신의 존재에 대한 위협, 경쟁자 및 죽음만 수반한다.
기독교, 상상계
다시 기독교적 상상계로 돌아가, 우리는 성모를 어머니의 무법의 욕망을 막아 줄 방어막으로 뿐만 아니라, 아버지의 비천한 육체에 대한 방어막으로도 읽을 수 있다. 페니스, 남근은 무원죄의 잉태에서는 부재한는 것이다. 명백히 실제 페시스도 없다. 또한 만족을, 특히 성적 만족을 상징하는 남근도 없다. 반면에 기독교적 상상계와 라캉 학자의 정신분석의 상상계는 페니스, 남근을 말씀으로 전환시킨다. 물론 라캉학자의 분석은 한걸음 더 나아가, 말씀 뒤에 있는 '입 벌린 구멍'을 노출시켜 이 환상이 속임수임을 밝혀 버린다. 그러나 라캉의 '입 벌린 구멍'은 비천한 아버지의구멍 자리에 설정된 얇은 가리개이고 부서지기 쉬운 막이다.
어머니, 사랑
사랑하는 어머니는 비천한 아버지의 환상을 막아줄 필요한 지주를 제공한다. 사랑하는 어머니는 어머니와의 연결이 압도적이고 또 극 경계 조차 없을 때까지도, 조냊의 우연성을 떠올리는 환상을 막아줄 필요한 지주를 제공한다. 어머니의 사랑의 보살핌, 또 아이가 실재라는 어머니의 인식은 아이가 생물에서 무생물로, 필요해서 우연으로의 경계 위에 쓰러지는 것을 막는 역할을 한다. 어머니의 사랑이 없다면 아이는 자신을 아버지의몸에서 나온 폐기물로서 순전히 우연을 통해 존재에 이른 아직은 아무것도 아닌 것, 죽음에 둘러싸인 아직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라고 비천시 할 수 있다. 어머니의사랑이 없다면 성도착이 죽음에 맞서는 한가지 방책이 된다. 비천하고 텅빈 페니스, 남근은 모든 진정한 대상이 주위에 모여 구축되는 초객체로 설정된다. 이 초월적 기표는 큰 사물을 대신한다. 그 기표가 이 세상의 사물이 아닌 한 남근은 죽음을 피한다. 그러면 상상의아버지는 사랑하는 아버지로서 비천한 아버지를 직면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렇지 않으면 증가하는 아버지가 아브젝션 위에다 부서지기 쉬운 막만 늘일 것이다. 크리스테바의 상상의 아버지는 어머니의 무법의 사랑으로 재해석해야 할 필요가 있다.
민네이션, 외디푸스
아이는 어머니의 자궁, 어머니의 젖가슴과 합일했다가 동질화를 느끼게 된다. 그러나 그 다음에는 어머니와 자신의 차이를 느끼게 되고 그 다음에 비천시하게 된다.비천하게 여기는 것은 자기와 연결되어 있다가 분리되는 상황이 발생하는데, 이것이 바로 주체화의 시작이다. 이것은 외디푸스에서 말하는 어머니와의 관계이전에 일어나는 일이다. 그러니깐 외디푸스적 주체를 이야기할려면 그러한 주체가 만들어지는 이유를 밝혀야 하는데, 서양철학은 이것을 은폐했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크리스테바의 주장이다.
민네이션, 욕망
프로이트가 이야기하는 이드, 수퍼에고, 에고로 구분되는 논리는 이 사회가 그렇게 구성되도록 만들어낸 것은 아닌가? 거기에 보여지는 현상적인 구조로 아버지를 수퍼에고로, 어머니를 에고로, 자기 자신을 이드로 구성하고 계속해서 자신을 욕망을 추구하는 주체로 구성하는것이 아닌가?하는 말이다. 이렇게 구성되어 있는 사회에서는 그것이 자연스러운 것처럼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들뢰지의 비판과 크리스테바의 비판을 받아들이면, 이러한 전제는 구성된 것이지 원래 그런 것이 아니다.
민네이션, 프레임
그래 프레임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소쉬르의 철학에서 보는 것처럼 기표와 기의는 다시 말하면 뜻과 의미는 서로 사회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그 이야기는 사회적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언제나 그것은 프레임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본성에 기반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러한 프레임을 깨기 위해서 조지 레이코프는 기표자체를 사용하지 말라고 한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크리스테바는 반대로 기표를 사용하는데 기의를 비워 두는 방식으로 변화를 추구한다.빈껍데기만 남은 기표는 '비천시'되면서 자연스럽게 사러지고 기표 안에 새로운 '기의'는 비천시되는 기표에 연결된 프레임들을 깨뜨리고 새로운 기표가 부활하게 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인사이드아웃 방식인 것이다. 정말 놀라울 따름이다. 이것이 어쩌면 들뢰즈가 말한 '기관없는 신체'와도 같을 것이다!!!!
민네이션, 크리스테바
크리스테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시간과 몸'에 대한 이해가 먼저 되어야 한다. 인간은 내가 생각하기에는 '시간 위에 존재'이다. 따라서 시간 자체에 존재는 달라지는 것을 볼 수 있다. 몸이라는 것도 시간 위에서 매번 다른 형상, 현상을 만들어내고 반응하기 때문에 인간이 주체가 된다는것은 다시 생각해보면 규정할 수 없는 것들이 된다. 그래서 몸 자체로는 아무런 기의가 없는 '기호계'안에서 기호들의 결합이 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의 내면에는 시간을 지내면서, 심지어 뱃속에서도 어떤 상상들이 자리잡는 것은 맞다.라캉과 프로이트는 그 상상의 발현자체를 너무 늦은 시점으로 보는 것이고, 크리스테바는 그 상상의 시초를 매우 빨리 보고 있는 것이다. 주체 형성 방식에 있어서도, 욕망을 구성되는 주체는 프로이트-라캉의 정신분석학적접근이고, 크리스테바는 사랑으로 구성되는 주체이다. 한번 생각해보면, '이드-에고-수퍼에고'라는 도식에서 크리스테바에서는 '성도착-에고-아가페'로 가는 도식이 될 수도 있을것 같다.여기서 성도착이라는 것은 허상이라고 볼 수 있고, 이러한 허상은 사회가 만들어 준 것이다.
민네이션, 고민
현재의 페미니즘이 만약에 남성성이 가진 우위를 추구하는 방식이라면 이 사회에 허상인 '욕망하는 아버지'만 남게 된다. 여자도 남자도, 인간으로 통합되고 모든 인간이 '욕망'으로 만들어진 주체들로만 환원되는 것이 아닌가?여기서, 들뢰즈가 비판한 '프로이드 분석의 기반은 자본주의'라는 것을 가지고 오면 이것은 결국 자본주의가 사주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럼 '욕망하는 주체'는 계속해서 무엇인가를 욕망하게 만드는 사회구조를 완성시키고, 가정도 사회도 국가도 그러한 흐름을 더욱 가속화시키고 영속화시키는 방식으로 가게 되는것은 아닌가?크리스테바가 말하는 '사랑의 주체'는 오히려 새로운 희망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주체, 의미
데카르트에게서 주체는 초월적 주체이다.이러한 초월적 주체는 의미를 순간적으로 직관한다. 이러한 코기토는 후설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크리스테바는 '시적언어의 혁명'에서 이러한 주체를 반박한다. 의미는 이미 있었던 것이 아니라 '상호텍스트성'을 가지고 순간순간 창조되는 것이라고 볼 수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결국은 의미화 과정 중에 있는 주체라고 할 수있다. 이러한 주체의 형성을 시적언어로 이야기해보면 '기호계와 상징계'사이에서 일어나는 연결들로 설명할 수 있다. 상호텍스트성은 텍스트들의 역사성이라고 할 수 있다. 의미화과정이라는 것을 프랑스언어로 하면 'Sujet-en-proces'라고 부른다. 텍스트들도 발생적 텍스트와 현상텍스트로 나누어서 계속 생겨나는 텍스트들과 현상적으로 존재하는 텍스트들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시적 언어는 '상호텍스트성'의 관점에서 실천적인 언어를 만들어내고 결국 이것이 혁명론까지 간다. '말-언어-생각-실천-행동-현상-구조'가 바뀌는 것을 볼 수 있다. 시는 감정이 들어가는 장르이다. 이것은 크리스테바에게서는 '기호계로 복귀'할 수 있는 수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