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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민네이션 Nov 11. 2017

낭만과 유기

낭만주의 철학_이병옥_철학아카데미

20171112_철학아카데미

낭만주의철학_이병옥 교수

8장 낭만주의 형이상학의 역설

[교재 : 낭만주의의 명령, 세계를 낭만화하라_초기 독일낭만주의 연구_프레데릭 바이저]



들어가기


독일의 몇몇 주도적 낭만주의 사상가들은 1790년대 후반에 이미 그들의 새로운 형이상학, 즉 이후에 낭만파를 특징짓게 될 세계관의 기본 윤곽을 그려 두었다. 1975년부터 1797년까지 횔덜린과 노발리스, 그리고 프리드리히 슐레겔은 여러 단편들에서 이 형이상학의 기초를 마련했다. 이후 셸링은 1800년에 '초월적 관념론 체계System des transcendentalen Idealismus' 와 1801년에 '나의 철학체계에 대한 기술'에서 보다 체계적으로 정식화한다. 이 독트린의 정식화에서 사상가들 사이에 몇 가지 중요한 차이가 존재한다. 그러나 또한 몇가지 유사성과 공통점이 있고 오늘은 그것들을 살펴볼 것이다. 관념론과 실재론을 종합하려는 시도, 보다 정확하게는 피히테의 관념론과 스피노자의 실재론을 종합하려는 한 낭만주의 형이상학의 시도이다.



낭만주의, 시기구분


낭만주의는 보통 세 개의 시기로 구분된다. 1797녀부터 1802년까지 예나를 중심으로 형성된 초기 낭만주의가 있다. 그 이후 하이델베르크와 베를린을 중심으로 한 1815년까지의 절정기 낭만주의가 있다.마지막으로 1830년까지의 후기낭만주의로 나뉜다. 우리의 강의는 독일낭만주의 최초 형성기에 해당하는 초기낭만주의로 한정된다. 저자인 바이저가 보여주려는 것처럼 초기낭만주의는 보다 철학적, 이론적이었으며 정치적으로 개혁적이었다. 후기로 갈수록 낭만주의는 지방저그 목가적, 보수적으로 되었다.흔히 낭만주의의 특징이라고 알려진 것들은 낭만주의 후기의 성격을 부당하게 일반화한 것이다.


이상, 초기 낭만주의


우리는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 그들의 주장을 너무 멀리 밀고 나갔고, 그래서 일면적이고 시대착오적으로 되었다고 말해야 한다. 다른 중요한 측면들에서 초기낭만주의자들은 계몽의 유산을 계속 이어갔고, 심지어는 그것을 급진적으로 만드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기 절제와 비판 그리고 체계성의 필요와 가치에 대한 믿음을 결코 잃지 않았다. 그리고 바람직한 문화, 진보의 가능성, 인류가 완전해질 수 있다는 생각, 심지어는 지상에서 신의 왕국을 창조할 수 있다는 믿음을 계속 간직했다. 그들은 이 이상을 실제로 성취할 것이라고 믿을 만큼 순진하지는 않았지만, 끊임없는 노력을 통해 그것에 다가갈수 있다고 주장했다.  

로마시대로 돌아가자!


피히테, 관념론


근대 서양철학의 두가지 흐름이 있다. 관념론과 실재론의 싸움이 바로 그것이다. 관념론의 선두에는 피히테가 있고, 실재론의 선두에는 스피노자가 있다. 피히테에게는 절대자아가 가장 크고 그 안에 자아가 있다. 자아는 '비아'라는 물자체를 인지하면서 결국은 자아 안으로 세상 모든 것, 자연을 포섭해나간다. 그러니깐 자아는 그런 포섭을 통해서 절대자아로 나아가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는 방식 자체는 헤겔의 변증법적 교양의 단계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반대로 스피노자 계통의 실재론자들은 '비아'라는 물자체는 항상 자아와 단독적으로도 존재하는 것이다. 그렇기때문에 스피노자 철학에서는 물 자체가 가지고 있는 실재적인 존재론은 어떤것에도 좌지우지 되지 않는 독립된 주체라고 보았다. 그렇기 때문에 신의 형상을 동등하게 부여받고 속성의 농도의 차이가 나타난다고 생각했다. 스피노자에게는 인간의 의식, 자유와 같은 개념들에서 이야기하는 '매개되지 되는 실재'에서 '절대 매개될 수 없는 실재'로 확증한다. 피히테에게는 무의식을 말하는 라캉의 철학은 없다. 무의식이라는 것은 하나의 충동정도로 보았던 시기이다. 칸트도 사실은 관념론이라고 할 수 없다. 순수이성비판에서 물자체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모든 것을 인간의 의식으로 포섭하는 관념론은 당연히 헤겔이 최고라고 할 수 있다.



스피노자, 낭만주의


초기 낭만주의자들에게는 스피노자 철학의 '실재론'이 유행하게 되는 것을 볼 수 있다. 관념론자들이 말하는 매개적으로만 존재하는 자연을 낭만화가는 것은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시를 짓거나 문학적인 요소로 묘사를 할 때도 자연에서 인간으로 들어오는 것을 스피노자 철학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슐라이허마흐에게서도 나타나는 자연주의 철학은 쉘링schelling에 의해서 확실한 토대를 가지게 된다. 스피노자에게서 자연은 '기계론'적인 요소가 인과법칙에 따라서 움직인다는 이신론적인 존재이다. 그러나 쉘링에게서는 자연철학을 통해서 '유기체'로 자리매김을 한다. 유기체는 서로 영향을 주고 받고, 서로 만들어져 가는 것을 볼 수 있듯이, 자연과 인간도 마찬가지이고 인간과 인간도 마찬가지로 유기체로 보는 것을 전제로 하게 된다.



인간, 정신


자연-인간의 도식에서 정신은 어느층위에 있는지를 생각해 보자. 정신의 발달단계에서 볼 때 '무기물-식물-동물-영장류-인간'으로 진화한다고 쉘링과 슐레겔은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스피노자에게는 이러한 위계질서는 그렇게 중요하다고 보지 않고, 자연의 실체들은 각각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속성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관념론, 실재론


피히테와 스피노자를 양립하고 결합하려고 할려고 시도했던 낭만주의자들을 살펴볼 수 있다. 낭만주의자들에게는 관념론과 실재론이 함께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지만, 도전의 대상이 된다. 피히테의 관념론-비결정론-이원론은 스피노자의 실재론-결정론-일원론과 충돌했다. 이 양립불가능성을 완전히 알고 있으면서도 낭만주의자들은 여전히 그들을 결합하고 싶어했다. 그들이 보기에 피히테와 스피노자는 각각 진리의 절반만을 포착했기 때문에 그들을 결혼시켜야만 했다. 데카르트의 인식론을 '주관주의'로 치부해버리면 쉽게 관념론을 부정해 버릴 수 있지만, 이들이 고민한 '어떻게 우리는 의식의 너머에 자연 혹은 역사가 있다는 것을 아는가?' 를 주관주의적 접근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 낭만주의 형이상학에서는 이것을 제대로 보았다. 낭만주의 형이상학을 유기체적 자연개념의 맥락 안에 위치시미견, 이러한 형이상학이 완전히 이해가능한 것이 되고, 일관적이 것이 될 수 있다.  



기계론, 유기체론


기계론에서 풀지 못하는 숙제는 사물과 사물간의 작용이다.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상정하지 않고 서로 스스로 존재한다고 생각하게 되면, 그것이 어떤 방식으로 서로 작용하는지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게 된다. '기회원인론'이라는 부분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사람이 작용해야만 사물들의 질서가 바뀐다는 것을 볼 때는 사실 기계론은 그 자체로는 이야기가 되지만 인간이 등장하는 순간 다른 형식으로 진행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기회원인론은 이 과정을 신이 작용했다고 보는 것이다.


잠재성 개념도 인간과 자연의 도식에서 살펴 볼 수 있다.


유기체, 자연개념


결국 낭만주의자들로 하여금 피히테의 고나념론의 일면성을 버리고 스피노자의 '고차적 실재론'으로 그것을 보완하도록 강제한 것은 외부세계의 실재를 설명하고 있는 비-자아의 순전한 타자성을 정당하게 두러야 할 필요였다. 낭만주의자들이 피히테와 스피노자의 통합이라는 난국에서 벗어나는 길은 유기체적 자연개념이었다. 낭만주의적 자연 개념 배후에 있는 근본 개념은 자연목적개념이다. 셸링과 낭만주의자들에게 중대한 영향을 미쳤던 텍스트인 '판단력 비판' 65절에서 칸트가 이 개념으 매우 구체적으로 정의했다. 그는 어떤 것이 두가지 본질적 조건을 만족시킬 때에만 자연목적이라고 적었다. 첫째, 그것은 유기체적 통일성을 가져야 한다. 거기서 각 부분은 전체와 분리 불가능하며, 전체의 관념이 각 부분의 위치를 결정한다. 둘째, 그것은 자기발생적이고 자기 조직적이어서, 모든 부분들은 상호적으로 서로의 원인의 결과이며, 외부의 원인을 갖지 않는다. 칸트는 이 두번째 조건이 예술 작품과 대조되는 자연목적의 고유한 특징이라고 주장한다. 예술 작품과 자연목적은 전체의 어떤 관념에 따라 산출된다는 공통점을 갖는다. 그러나 오직 자연목적만이 자기-산출적이다. 자연 설계와 구조는 어떤 내적 원리에 따라 안으로부터 나오며 예술 작품에서 처럼 외부에서 오지 않느다. 유기체적 자연 개념은 칸트의 자연목적 관념을 일반화 혹은 확장하여 자연 전체에 적용되도록 했다. 유기체적 개념은 자연 정체가 하나의 거대한 자연목적이라고, 그것의 각 부분들 또한그러한 목적이기 때문에 자연이 유기체들의 유기체라고 말한다. 유기체적 자연 개념이 지닌 가장 중요한 함의는 정신적인 것과 물리적인것 사이에 종의 구별이 아니라 정도의 구별만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정신과 육체는 더 이상 이질적인 실체들이 아니다. 그것들은 자연에 걸쳐 있는 단일한 생명력의 조직화와 발전의 다른 수준들일 뿐이다.   정신적인 것은 단지 물질 안에서 작용하는 생명력의 조직화와 발전의 최고정도이며, 물질은 단지 정신 안에 존재하는 생명력의 조직화와 발전의 가장 낮은 정도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정신을 최고로 조직되고 발전된 물질로, 그리고 물질을 더 조직되고 발전된 정신으로 간주할 수 있다. 셸링이 말하듯이 '자연은 눈에 보이는 정신이며, 정신은 눈에 보이지 않는자연이다'  



낭만주의, 포텐


낭만주의자들에게서 중요한 개념은 potenzienung리라는 개념이다. 이것은 우리가아는 '잠재성'의 개념이라고 볼 수 있다. 사물 안에 잠재성이 내재해있고 이것이 어떤 방식으로 드러나는지는 그 순간순간마다 다르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잠재성 개념에서 낭만주의자들은 자신들의 형이상학을 계속해서 만들어가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민네이션, 생각


칸트, 헤겔, 라캉, 리쾨르, 스피노자, 마르크스, 샤르트르, 하이데거, 레비나스, 한나 아렌트, 들뢰즈를 지나서 낭만주의로 왔다. 스피노자 계통의 철학자들과 데카르트 계통의 철학자들은 사실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싸움을 다시 부활시킨 것이라고 할 수 있다.다시 말하면, 관념과 사물을 분리하는 이원론과 관념과 사물 자체를 하나로 보는 일원론의 싸움이라고 할 수 있다. 세상이 존재하게되는 방식을 세상으로부터 출발해서 인간으로 올 것인가? 아니면 인간으로 출발해서 세상으로 갈 것인가?로 보는 측면들이 있다.만약 세상에서 인간으로 온다면, 다시 신에서 세상으로 그리고 인간으로 올 것인가? 의 문제가 발생한다. 인간에서 세상으로 온다면, 다시 신에서 인간으로 그리고 세상으로 오는가?의 문제도 발생한다.스피노자는 신에게서 세상, 인간이 나온다고 생각했고 그렇기 때문에 동등한 원리로 움직이되 신의 속성의 농도가 있다고 생각했다. 농도라는 것은 나의 생각이다. 들뢰즈가 말한 '차이와 반복'에서 속성이 더 많은 것들은 계속해서 반복할 수 있는 성질이 많다는 것을 생각하게 되었고, 그것이 결국은 사물들의 차이로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낭만주의의 대표적 화가인 외젠 들루크루아의 작품들


민네이션, 낭만주의


낭만주의가 가지고 있는 철학적 사조는 '새로운 시도, 기존 체계를 넘나드는 사유'라는 것이다.그러한 사유에서는  '돈키호테' 같은 새로운 도전들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어쩌면 초기 낭만주의에서 이러한 자유분방함, 새로운 사유의 시도, 다양한 관점의 통합이 일어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절정기를 지나서 후기로 가면서 초기 사조들을 지키려는 보수화 경향이 나타났고, 그러한 과정에서 낭만주의는 말그대로 '로마로 복귀'하는 정도로 정형화되어 버리는 것이 아닌가?어떤 사람의 생각과 인격도 '형상화과정'이 있고, 그 과정이 지나면 단단해져서 '변질되지 않는 고유한 성질'이 드러나는 것을 볼 수 있다. 고유한 성질이 곧 '개성'인데 인간만이 아니라 존재와 사물도 각각의 개성이 있다. 이러한 과정을 사유해보는 것이 '과정철학'이고 이것의 시작을 살펴보는 게 '관념론'이라고 보면 이것이 실재로 퍼져 있는 상태를 보는 것이 '현상학'이라고 할 수 있으며, 그러한 현상들이 인간에게 어떤 의미를 주는가가 '해석학'이라고 할 수 있다. 낭만주의를 나는 그렇다면 어떤 방식으로 접근할 것인가? 해석학인가? 아니면 현상학인가? 아니면 관념론인가? 아니면 실재론인가? 하나하나 돌아볼 수도 있을 것이고, 하나로 집중해서 평가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민네이션, 낭만


낭만주의가 표방하는 새로운 도전을 나는 좋아한다. 돈키호테처럼 엉뚱하게 시도하는 것이 사실은 인생의 낭만이라고 생각한다. 라캉에게서는 이것이 충동이나 무의식의 명령이라고 볼 수 있지만, 크리스테바에게서는 이러한 시적언어가 상징계를 넘어서는 처음의 기호계로 돌아가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낭만화한다는 것은 조금은 부드럽게 만드는 작업이다. 부드럽게 만들어서 흡수하고 그것을 통합하고 그런 과정에서 새로운 것들이 나오는 것이다.



민네이션, 인격성


나의 인격은 어디서 오는가? 인간이 인간이 되는 것은 어디서 오는가? 세상에 주어졌거나, 던져졌다고 하는 것은 그럴 수 있다쳐보 나의 인격의 기원과 상상의 시초는 어디서 오는가? 이런 고민들을 하고 있을 때 '인격적이지 않은 신'의 관념이 교회를 타고들어오면 하나님의 존재는 비인격적인 신의 측면만 부각되어 믿는 사람이건 안 믿는 사람이건 하나로 통일 시킨다. 이러한 과정에서 믿는 사람은 기복신앙으로, 안믿는 사람은 신앙에 대한 혐오로 돌아선다. 나는 '인격적인 신'과의 실재적인 만남을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다. 영적으로만, 정신으로만이 아니라 실재로 세상을 만든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 나와 대화하는 것들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과정에서 또 '신사도주의'로 빠져버리면 인격적 신의 현현'이 아니라 현실을 잡아 먹는 '영지주의적 현현'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깐 현실에서 자신의 존재를 미치고 싶어서 미쳐버린 신의 모습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하나의 관점이 있다. 그것은 사랑이다. 사랑으로 생각해 보면 우리는 위와 같은 오류와 오해에 빠지지 않는다. 인격적이 되는 이유는 사랑이다. 사랑하기 때문에 인간은 인간이 된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고, 사랑이 결국 그 말씀으로 현현한다. 하나님을 사랑으로 이해하고 경험하는 이들마다 신의 실체 속으로 들어갔고, 그러한 신의 실체 속에서 인생들은 완전히 새로운 길을 걷게 되었다. 영지주의도 넘어서고, 신의 죽음도 넘어서서 부활하는 생명, 사랑하는 존재와 주체로 다시 태어나는 부활을 맞이하게 되었다.  


민네이션, 프렉탈


프렉탈은 자기유도적 형상이다. 다시 말하면 큰 차원이던 작은 차원이던 같은 형상을 유지한다는 것이다. 작은 삼각형들이 모여서 큰 삼각형이 되지만 여전히 작은 삼각형과 똑같은 형상이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프렉탈인데, 이러한 프렉탈 개념에서 '바이탈'개념이 나올 수 있다. 물질과 관계를 이루는 가장 근본적인 핵심 이론들은 계속해서 자기유도성을 통해서 만물을 움직이고 생동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내가 하는 고민은 자연과학이나 자연질서에만 그러한 프렉탈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사는 사회에서도 프렉탈이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프렉탈을 찾아내서 사회를 다시 구성해보려는 시도, 그것이 어떻게 보면 체계이론이 될 수 있고 '유기체적 정치체제'를 만들려고 하는 논문주제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프렉탈이 깨지는 방식으로 사회가 구성되어 버리면, 그 사회는 제대로 작용하지 못하게 된다는 점에서 어떻게 보면 '정상화' 논리라고 할 수 있다. 원칙주의 혹은 토대주의적인 전통도 있을 수 있다. 그것은 내 안에 창조한 하나님의 대한 실제적 경험이 외향적으로 나오는 과정이라고 볼 수도 있다.


프렉탈 구조는 우리의 일상에 가득하다. 비단 사회뿐 아니라 우리의 정신에서도 존재한다.


민네이션, 과학


스피노자가 주제로 떠오르면서 '오비탈'의 개념과 양자물리학적인 관점도 제시된다. 사물들 간의 빈공간, 사물 안의 빈공간은 사실은 빈공간이 아니라 빈공간처럼 보이지만 어떤 물질이 차지하고 있었다.그리고 물질들의 존재들은 계속해서 오비탈 속에서, 원자들의 움직임속에서 발현되는 flow의 연속이라는 것도 볼 수 있는 것이다. 미시세계로 접근해보면 무기물과 같은 작은 물체들에도 여전히 거대한 세계가 숨겨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현대과학적으로 접근하게 되면 '유물론' 혹은 '기계론'도 다른 방식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원자들도 사실은 오비탈의 개념에서 볼 때, 정해진것이 아니라 계속 움직이고 있다. 그런의미에서 낭만주의는 현실을 제대로 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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