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그송 창조적 진화_철학아카데미
20181019_철학아카데미
베르그송 창조적 진화_류종렬
1장_생명의 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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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이상학과 인식론은 다르다. 인식론은 개별주체들의 변화를 경험적으로 축적한 것이다. 그러나 형이상학은 그런 개별주체들의 경험이 없다고 하더라도 원리를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형이상학의 가장 상층부에는 플라톤과 같은 이데아가 있다. 이데아가 존재하는 어떤 공간은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과 다른 공간이라고 상정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의 목적은 이데아가 존재하는 파라다이스와 같은 곳을 가는 것이 되고, 칼빈이후 신플라톤주의는 천국의 개념을 현실과 다른 어떤 곳으로 상정했다.
그러나 데카르트에서 실체의 분리가 일어나고, 운동이 지배하는 생명과 진화의 과정을 스피노자가 취하고, 그 반대에 칸트와 헤겔이 형이상학을 이야기했다. 물론 칸트와 헤겔은 어느정도의 초기 독일 낭만주의적인 전통(형이하학과 형이상학을 연결하려는 시도)을 가지고 있는 것은 맞지만, 인식론에서 시작해서 변증법을 통해서 상층부의 맨 꼭대기인 이데아로 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한 상층부의 높이에는 신과 같은 영역이면서 순수하고, 하나의 존재만 있으며 진리를 내포한다고 보았던 것이다.
오늘은 이러한 상층부의 높이만큼 깊이로 내려가는 베르그송의 논리를 볼 수 있다. 생명을 가지고 운동하는 가장 깊은 곳의 생명의 핵심은 지속이고 그 지속이 쌓이면서 기억이 되는 것이다. 도식화를 하자면 상층부는 신이고 하층부의 맨 아래는 물질이라고 보는 것이다.
지속일반에 대하여, 생명의 진화
우리가 가장 확신하고 있으며 가장 잘 알고 있는 존재는 의심할 여지없이 우리자신이다. 왜냐하면 자신은 내부적으로 심층적으로profondement 지각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자의자아, 심층자아, 무의식을 포함한 기억 즉 의식, 그리고 생명일반, 생명 내적 연속성이라는 표현을 볼 수 있다. 우선 내가 한 항태에서 다른 상태로 이행하고 있다는 것을 나는 확신한다. 이것은 데카르트의 사유의 확신과 다른 측면이다. 심리적 실체로서 나의 상태의 변화 과정과 이행, 즉 흐름을 확신한다는 것이다. 마치 상태가 하나의 블록을 형성하는 것처럼 하나의 시간에 하나의 블록이 현상학적 장을 형성하고 있다.
한 영혼의 상태가 변하기를 멈춘다면, 영혼의 지속'도 흐르기를 멈출 것이다. 대상에 대한 시지각을 문제 삼아보자. 그런데 지작에는 내 기억이 거기에 있어서 과정의 어떤 것을 현재 속에 밀어 넣는다. 나의 영혼의 상태는 끊임없이 부풀어 간다. 자체와 더불어 눈덩이를 만든다. 형이상학 입문에서 '실패, 실뭉치'와 같다. 진실로 사람들은 끊임없이 변하고 상태자체는 이미 변화이다. 의식사애는 변화 그 자체이다. 그것은 곧 한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이행하는 것과 같은 상태 안에 영속하는 것 사이에 본질적인 차이가 없다는 말이다. '안에'란 형이상학 입문에서 dedans, en 이란 전치사를 중요시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변이는 연속적이다. 심리학적 삶이 외관상 불연속적으로 보이는 것은 주의가 일련의 불연속적 행위에 의해 심리학적 삶에 고정된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우리의 주의는 심포니의 심발timbale치는 소리에 고정된다. 왜냐하면 심발 타격 소리들에 더욱 관심을 가졌으며, 이 타격 각각은 우리의 심리하적 존재 전체의 유동적 덩어리를 나르고 있기 때문이다.
각 타격은우리가 느끼고 생각하고 원하는 모든 것, 우리가 결국에는 주어진 순간에 있게 되는 모든 것을 포함하는 움직이는 지대의 가장 분명한 점일 뿐이다. 실제로 그것은 우리의 상태를 구성하는 이 지대 전체인 셈이다. 그런데 이렇게 정해진 상태들이 뚜렷이 구별된 요소들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상태들은 끝없이 흐름 속에서 서로서로 연속되어 있다.
생명, 이미지
이미지는 현상학적이다. 이미지는 그러나 어떤 운동이 일어나면 동시에 발생한다. 인간의 두뇌에 인식되는 지속의 경향성이 보여지고, 실제로 움직이는 것들의 이미지가 켜켜이 쌓인다. 그러나 재밌는 것은 그것이 시간적으로 연속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계속해서 새로운 연결과 진화와 창조가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운동안에서는 계속된 이미지가 연속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미지드의 연속이 결국 영화로 이어지기 때문에 들뢰즈는 '시네마'에서 이러한 이미지들의 연속인 영화의 의미론을 분석하는 것이다.
그러나 개념, 관념, 형이상학은 방향성이 먼저 결정되어 있고, 거기에 이미지를 끼워 맞춘다. 그리고 항상 동일성을 반복하면서 정체성을 유지한다고 주장한다. 그렇기 때문에 정체성은 이미 틀 안에 존재하고, 그 틀에 계속해서 기억을 끼워 넣으면서 동일성을 유지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윤리의 기본적인 성격은 선억적인 바운더리이다. 인간은 사유하는 동물이다. 라고 말하는 것은 인간의 프레임이 먼저 주어지고, 생명을 사유한다, 동물' 안에 넣어놓으면서 그 깊이를 더해가는 것이다. 좀 더 생각하면 그것은 기억이 언어에 기반하고 있는 것이다.
개체, 분화
개체는 더이상 분화하지 않는다. 개체가 분화하면 생명을 잃어 버린다. 그러면 지속성이 멈추게 된다. 개체라고 우리가 부르는 것은 생물학적으로 가장 작은 단위에서 붙어서 작동하고 운동하는 것을 뜻한다. 생명이면 움직이는게 당연하고 그것은 개체이다. 그러한 개체가 분화되는 것이 가능하다고 하는 것이 바로 개념주의, 혹은 관념주의인 것이다.
개념, 관계
개념은 홀로 서 있다. 그러나 생명은 오로지 관계의 연속이다. 어떤 관계로 연결되어 있는가가 그 정체성을 결정한다. 그러나 상층부의 개념은 홀로 존재하고 다른것들보다 다른 가치를 전하려고 상승작용을 한다. 개념과 관계라는 측면에서볼 때 개념은 완전성으로 가고 관계는 수평관계로 간다. 개체들은 계속해서 운동한다. 운동은 부인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계속해서 관계는 생겨날 수 밖에 없는데, 관념상으로는 그러한 관계를 계속해서 동일화시켜서 예상시키기 위해서 사회학이나 사회과학이 강력해지는 것이다. 사회과학이 강력해질 수도록 예측력은 늘어나고 사회는 동일화와 동일성을 찾아서 갈 것이다.
민네이션, 생각
인간이 진정으로 확신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의 기억 안에서 체계적으로 경험과 인식이 축적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지금 컴퓨터나 수, 직성의 개념으로 우리를 보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위상학적인 측면에서 공간에 배치하기 위해서 일부러 그렇게 서로를 배치시킨다. 그러나 베르그송이 말하는 것처럼 인간의 기억은 산발적이며, 창발적이며, 언어로 묶이는 것들은 기억으로 잡혀 있는 것 같지만, 몸이 경험하는 것들은 언어가 없이도 어떤 이미지나 감정이 기억되어 있다.
베르그송의 생각 안에는 생명은 항상 방향을 알 수 없으며, 능동적으로 작용하면서 인간의 내면 깊은 곳에서, 세포 깊은 곳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생명은 그 자체로 운동하고 있고, 지속을 만들어내고 있고 그러한 지식은 계속해서 자신의 길과 경험과 방향을 만들어낸다. 그러나 존재 자체가 현상학적이기 때문에 드러나는 것이지, 이미 생성되어 있는 예견된 것이 아니다. 끊임없이 다른 형태, 다른 변형을 가지고 간다는 의미에서 창조적 진화가 일어나는 것이라고 말한다.
민네이션, 고민
인간이란 정말 무엇인가? 다시 돌아보는 과정이 필요하다. 사실 인간의 이미지는 역사적이지 않다. 역사적일려면 동일성이 있어야 하는데, 패턴정도까지는 갈 수 있더라도, 동일성이 유지되는 것은 아니다. 비슷한 것들이 도래하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래서 나는 베르그송이 어느정도 맞는다는 생각을 한다. 그런데 생명이 운동을 하고 지속성을 가지기 위해서는 다른 개체들과의 연동되는 부분에서 관념론이 말하는 '윤리'가 생겨날 수 밖에 없다. 우리의 모든 운동이 서로 시간과 공간 안에서 겹치지 않고 투명하고 교차한다면 베르그송이 맞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역사는 '악'에 대한 대응으로 필요에 의해서 생겨난게 아닐까?